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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Oct 23. 2022

오름 정상까지 가는 만능키

오늘의 오름은 큰지그리오름. 부모님이 추천해주신 오름 중 하나이다. 사진으로 보이는 풍경이 멋져 꼭 한번 다녀오리라고 리스트에 올려두었던 오름이다. 교래자연휴양림 입구에 도착해서 오름 산책로를 따라 들어섰다. 교래자연휴양림의 곶자왈과, 초지를 거쳐 오름 등반로로 이어지는 코스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큰지그리오름까지 3500m. 왕복 2시간 30분 코스. 거리보다 시간이 염려되기 시작했다. 3시 30분이 넘어가는데 2시간 30분 안에 다녀오면 6시. 오늘 예보된 일몰시간은 5시 50분. 오름을 등반하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셈을 하자니 복잡해진다. 이럴 때 나는 일단 시작하고 본다. 가다가 안될 것 같으면 돌아오면 그만 아닌가. 신중해야 할 순간에 오히려 단순해지는 게 나의 단점이자 매력이다.  

"일단 가보자."


늦은 오후에 차가워진 공기가 훅 코로 들어와 옷을 여미고 곶자왈이기에 울퉁불퉁한 좁은 길을 따라 친구가 앞서고 나는 뒤를 따라 걸었다. 제법 걸은 것 같은데 겨우 800m가 지났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이 속도로는 무리일 것 같은데?' 호기롭던 내 마음도 조급해진다. 마음이 급하니 발걸음도 바쁘고 눈은 곶자왈을 느낄 틈도 없이 울퉁불퉁한 계단 돌길에서 넘어지지않을염려되어 땅만 내려다보게 다. 가는 길에 들꽃도 찍고 계절을 온몸으로 즐기는 나무도 찍으며 호흡도 깊게 들이마셔보고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찍어보는 나였는데 오름에 빨리 올라갔다 와야 한다라는 생각이 그간 즐기던 것들을 가로막아 버렸다. 오로지 들리는 것은 친구와 나의 발자국 소리, 슝슝 바람소리와 가끔 숲에서 들리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일부러 하늘을 쳐다봤다. 어느새 단풍이 한창 들기 시작한 나무도 보이고 곶자왈 특유의 거친 길과 떨어진 가을 낙엽과 덩굴식물, 나무들이 보였다.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풍경이 달라지며 빽빽한 편백나무 숲이 나왔다. 곶자왈 숲길의 구불구불하고 하늘이 막힌 길을 걷다가 하늘로 곧게 쭉쭉 뻗은 편백나무들을 보니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했다. 뭔가 신령한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는 착각이 들더니 갑자기 힘이 나며 발걸음이 가벼워져 친구와 벌어진 거리를 가볍게 뛰어 쫓아가 본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드는 편백나무 숲길이 었다. 숲 입구에 나무 평상이 몇 개 놓여 있었는데 다음에는 꼭 와서 이 숲의 기운을 듬뿍 받아가리라 혼자서 약속을 하고 길을 재촉했다.

오름 등반길에 다다르자 경사가 다소 급해지고 길 조금 더 좁아져 내딛는 걸음이 더 조심스럽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은 탓인지 약간의 현기증도 올라오는 듯 하지만 앞서 걷는 친구에게 말도 안 하고 그저 조용히 따라갔다.

"괜찮아?" 친구가 내 걸음과 얼굴만 보고도 괜찮지 않음을 알아봤다. 조용히 내미는 손을 잡고 마지막 몇 걸음 힘을 내서 드디어 큰지그리오름 전망대까지 도착했다. 답답했던 하늘이 시원하게 열리더니 사방으로 트인 환상적인 풍경에 말문이 막혔다. 이제까지 걸어온 힘든 순간이 한순간에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자연이라는 큰 손이 잘 올라왔느라고, 올라오느라 애썼느라고 따뜻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듯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전망대에서 돗자리를 깔고 차도 한잔 마시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감탄세례를 쏟아냈을 텐데 그럴 여유가 없어 잠시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하산을 했다.


"덕분에 정상까지 다녀왔어."

"무슨 소리야. 난 네가 너무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간 거야." 친구가 놀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무슨 소리인가? 난 애초에 안되면 중간에 언제든지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친구의 말에 따르면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볼 때마다 내가 괜찮다고 계속 가보자고 해서 자기는 중간에 돌아오고 싶었는데 계속 갔단다. 난 사실 친구가 전혀 힘들어하지도 않고 너무 잘 걸어서 나 때문에 정상까지 못 가는 아쉬움이 남게 하지 않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결국 서로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도 서로의 마음을 생각해서 걷다 보니 오름 정상까지 이를 수 있었다.


오늘 하루 지나고 보니 오름 정상까지 가는 능키는 무거운 발걸음도 함께 내딛을 수 있는 친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실 제주의 오름들은 혼자 오르기에는 외진 곳에 있는 곳들도 많아 길을 찾기 어렵거나 인적이 드물거나 숲으로 막혀있어 무서워 가기 힘든 곳들도 많다. 그런 것들은 걱정 없이 어디든 가보자며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느 오름 정상이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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