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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Feb 03. 2023

제주에 살 길 잘했어

1월 말 폭설이 내리고 한라산 꼭대기에는 여전히 두터운 눈이 보이는데 지난 며칠 제주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볕이 좋고 따스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예사롭지 않다. 거실 블라인드를 올려보니 날씨가 이건 나가야 하는 날씨다. 몸속 광합성 유전자가 발동한다.

"어디 가려고?"

"이런 날은 무조건 바다지!" 이른 아침부터 나를 위해 발품을 팔아주는 친구가 흔쾌히 동의해 준다.

"월정리 가보자."


월정리 바다는 내게는 각별한 바다 중 하나다. 십 년 전 육아로 힘이 들던 시절. 아끼는 후배들이 나들이를 시켜 주었던 바다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당시 내게는 너무나 생소한 이름의 이 바다는 당시 어쩌다 가게 된 우연성과 비취색이 만드는 이국적인 매력에 한참을 감탄했던 첫 만남이 있다. 그런데 그 뒤로 관광객들 사이에 너무 유명해져서 가면 사람 많고 가도 차세울 곳이 없다는 도민들의 푸념을 담는 바다가 돼버렸다. 조용한 시골 바다는 그 사이 여느 관광지처럼 되어버렸고 당시 유일한 루프탑 카페는 그 세련된 건물들 사이에 힘없이 끼어 볼품이 없어져 버렸다. 이제는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카페와 음식점들로 주변에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까지 생겨서 원래 살던 사람들은 조금씩 자기들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들렸다.


이른 시간이라 인적이 드문 월정리 바다는 햇볕 아래 비취색을 그 어느 때보다 가감 없이 보여주며 내 심장을 때렸다. '우와!' 외마디 감탄사만이 나오고 손 사진을 찍기에 바빠진다. 그냥 별다른 세팅을 하지 않아도 그냥 찍히는 모든 사진이 관광 엽서 사진이 되어버린다. 날씨가 좋은 날은 역시 제주는 바다가 먼저다!

"너무 좋지 않니? 제주가 제주 하네!"

"너 지금 좋다는 말을 몇 번 하는지 모르지?"

유달리 맑은 하늘과 비취색 바다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과 바다가 만들어내는 포말과 파도 소리는 누구라도 쉬게 했다. 어른들도 아이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의 바다. 모두 월정리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어린아이가 된다. 모래사장도 거닐고, 만세도 해보고, 폴짝 뛰어 사진도 찍어보는 그런 바다.

나이가 드니 제주에서 태어나고 제주에서 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는 무조건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대학을 가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감정이 있었고, 별다른 문화생활이나 놀거리가 없는 답답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삶에 치기가 들고 부딪힘이 많은 날, 속 시원하게 울어버리든지 멍 때리고 싶은 날, 날씨가 너무 좋아 어디든 가고 싶은 그런 날. 제주는 비상구를 여럿 내어주는 그런 곳이다. 어디든 1시간 이내로 가면 산과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이런 비상구가 되는 장소 하나 있다면 삶은 더 다정하고 달콤해지지 않을까? 날이 좋으면 바다로, 가슴이 답답할 땐 짙은 녹음이 있는 숲으로, 머릿속을 텅 비워 내고 싶을 때는 오름과 한라산으로. 이게 제주다. 제주에 살 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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