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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Feb 02. 2023

반포장 이사, 그 품이 드는 일

이사를 한 지 이제 채 2주가 되지 않는다. 사실 이번 이사는 아이를 위한 선택이었다. 늘 엄마 따라서 시골에 있는 학교까지 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던 아이는 동네 친구가 없어도, 원거리 통학을 하면서도 흔한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싶어 적어도 중학교만큼은 학교와 학원도 가까운 곳으로 꼭 해주고 싶었다. 초등학교와는 다른 학교와 학원 생활을 해야 할 아이의 피로도를 덜어주고 친구들과 언제든지 집에 와서 간식도 먹고, 마음껏 놀 수 있는 집을 그렸다. 고맙게도 큰 수고로움 없이 집을 구할 수 있었고 이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사 가는 집이 새로 지은 집이다 보니 가전이 옵션으로 다 빌트인 되어 있고, 평수는 비슷한데 집 구조가 지금 집과는 많이 달라서 짐을 많이 줄여야 할 상황이 되었다.


부지런히 버리고, 중고로 팔고, 나눔을 한 후 이사 견적을 받는데 생각보다 포장이사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비용을 듣고 망설이는 나를 보더니 반포장 이사는 어떻겠냐고 견적을 내러 오신 사장님이 말씀을 꺼냈다. 반포장 이사는 말 그대로 반쪽짜리 포장 이사였다. 짐을 옮겨주면 정리는 내가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비용이 50만 원은 줄었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는 50만 원을 아낄 수 있다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기껏 가지고 갈 짐이야 책과 간단한 살림이 아니겠는가. 호기롭게 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뭔지도 모르는 반포장이사의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 당일. 아이는 아침에 어른들이 들어오더니 현관문을 번쩍 떼어내는 것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친절하시고 손이 빠르신 분들이 오셔서 모든 짐들은 일사천리로 새집으로 옮겨졌다. 포장된 짐들이 하나씩 집으로 들어오더니 포장이사 박스는 거실과 방에 하나씩 쌓아 올려졌다.

"정리 다 끝나시면 연락 주세요. 박스는 밖에 두시면 찾아갈게요." 그제야 반포장이사와 포장이사의 차이점이 실감 났다.


모두 가시고 아이와 둘이 거실과 방 곳곳에 쌓인 박스들을 함께 올려다봤다.

"엄마 우리 이거 정리할 수 있겠지?" 이사를 경험해보지 않은 아이는 겁부터 나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그러게 일단 한번 해보자."

첫 번째 상자를 내리려는데 상자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 무거워서 내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뭔가 싶어서 봤더니 책이다. 가지고 있는 책들의 무게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바닥에 놓인 것부터 열어서 제 자리를 찾아주었다. 아이도 자기 방의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했지만 정리되는 속도는 더뎠다.


한 숨이 나오려는 그때 마침 흑기사가 나타났다. 이사는 잘했냐고 도와줄 건 없냐고 친구의 연락이 왔다. 다른 때 같으면 괜찮다고 할 나지만 이날은 누구라도 필요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와서 도와달라고 SOS를 보냈다. 친구와 함께 위에 있는 포장 박스를 내렸고 역할을 나눠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속도가  붙었지만 박스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꺼내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집 밖에 반납할 포장박스를 두고 정리를 하고 나니 친구도 나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반포장 이사의 세계는 쉽지 않았다. 무거운 박스를 옮기며 정리하고, 빈 박스의 테이핑을 떼어내어 펼치고 정리하는 일련의 일들은 잠시도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포장 이사에서는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면 뚝딱 짐정리까지 되었는데 반포장 이사는 품이 많이 들었다. 이사를 무사히 마치고 글을 쓰는데도 그때의 고단함이 온몸에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또 한 번 척척해낸 내가, 한걸음에 달려와준 친구가, 작은 손을 보태준 내 아이가 함께 해낸 반포장이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이사를 간다면 나는 주저 없이 포장이사를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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