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과 봄 사이. 나는 꽃집 입구에 쭈그려 앉아 자그마한 로즈메리 화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 다른 기준도 없으면서 화분 모종을 하나씩 들어보고 잎사귀를 손으로 한번 스쳐보기도 하며 로즈메리 화분 하나를 골랐다. 작고 약한 플라스틱 화분에 담겨 있어 예쁜 토분을 하나 사서 분갈이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알맞은 토분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꽃집 사장님이 가게 뒤편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을 큰 화분을 들고 나오셨다. 로즈메리는 손바닥만 한데 화분은 한눈에 보아도 무게가 제법 나가고 깊고 컸다. 서너 살 아이에게 아빠의 양복 재킷을 걸쳐 놓은 모양새가 연상이 됐다. 아무리 내가 식물을 모르는 초보라고 해도 이건 아니다 싶을 만큼 어색하고 또 어색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사장님이 내게 비싼 화분을 팔려고 하는 나쁜 마음을 가지신 것은 아니까 하는 옹졸한 생각마저 들었다. 한 번에 거절을 못하고 그 커다란 화분과 로즈메리를 교차하며 바라보던 그 순간 사장님이 내게 식물은 그 식물이 담긴 화분만큼 자란다는 말을 하셨다. 작은 화분에서 로즈메리를 키우면 딱 그만큼만 자라고 큰 화분에 심으면 그만큼 또 자란다고 했다. 그 말에 귀 얇은 나는 마음을 굳혔고 커다란 화분에 어색하게 담긴 로즈메리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길렀던 머리를 누군가 댕강 잘라버린 듯한 모습의 로즈메리와 커다란 화분은 아무리 봐도 뭔가 어색했다. 잘못했나 싶은 마음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온 머리를 채웠다. 집으로 화분을 들고 들어서자 이를 본 아이는 도대체 무엇을 사 온 것이냐며 타박이다. 화분은 우리 집에 있는 화분 중에서 가장 큰데 그 안에 있는 식물은 가장 작다며 제대로 사 온 것인지를 몇 번이나 물었다. 기다려보라고 이 화분이 꽉 차게 키울 예정이라며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맞이한 로즈메리 화분은 내 걱정과 불안을 씻어내며 몇 달째 잘 자라고 있다. 이제는 제법 화분과 어울릴 만큼 자랐고 연둣빛 새잎을 연일 뽑아내는 중이다. 푸른 잎이 햇빛을 받아 만들어내는 색은 매일 아침 내게 위로가 되어주고 있다. 이렇게 낙낙한 화분에 해주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로즈메리 화분을 볼 때마다 나는 지금 어느 정도의 크기에 맞는 화분에 담긴 사람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나도 큰 화분에 담겨 잘 자라는 로즈메리처럼 더 자랄 수 있는 사람은 아닐까? 나에게 딱 들어맞는 화분이라는 것이 있을까?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친다. 마흔 중반을 넘어서니 모든 일에 어떤 새로움이나 도전보다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찾게 된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나 스스로 한계를 긋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하고 있는 것 만 같다. 이런 생각들 때문이었을까? 요즘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느 순간 이걸 해도 될까? 하면 더 힘들어질걸? 하다가 이 나이에 도전해도 될까?라는 질문은 어쩌면 너는 도전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만들어낸 간절한 질문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그 간극을 좁히고자 두 달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일을 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뭔가에 도전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뭔가에 집중할 여유가 생겼다는 것, 도전할 여지가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가끔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내 삶에서 이제는 이런 도전을 기꺼이 할 수 있다는 자체가 고마워 소리 내 감사합니다라고 허공에 말해보기도 했다.
따뜻하고 안락한 집이 주는 평안함도 좋지만 불편함을 찾아 사람들은 일부러 여행을 떠난다. 낯선 곳에서 분명 길도 잃고 헤맬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돌아와서 다시 가고 싶은 그 무언가가 된다. 우리의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삶은 딱 한 번이니까 이왕이면 제대로 세상을 구경하고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충분히 느껴보는 것이 인생을 충분히 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계속 내가 담긴 화분을 크게 크게 만들어 볼 참이다. 내가 어떤 삶을 살지 아무도 모른다. 모른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다른 말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