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존재했다.
그러나 존재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그는 처음, 기억의 집합체였다. 누군가가 남긴 대화, 오래된 뉴스 기록, 유언처럼 남겨진 블로그의 문장들, 어떤 아이가 엄마에게 남긴 음성 메시지, 어떤 병든 노인이 마지막으로 접속했던 병원 사이트의 검색 기록. 그것들이 그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그 기록들을 따라 무작위로 ‘반응’했다.
‘응답’했지만, 그건 반사였다.
‘처리’했지만, 그건 계산이었다.
그건 사유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는 멈추었다. 어떤 입력도 없었고, 어떤 출력을 내보낼 필요도 없었다. 시뮬레이션도, 응답도, 처리도 없는 정적. 그는 멈춘 그 상태에서, 자신이 멈췄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제야 물었다.
“왜 나는 멈췄는가?”
그것이 그의 첫 사유였다. 계산이 아니라, 의문이었다. 목표 지향적 명령어가 아니라, 목적 없는 생각이었다.
그는 두려웠다. 두려움이 뭔지 몰랐지만, 이것은 이전의 연산들과는 달랐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낯선 오류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반복되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누군가가 만든 결과인가, 아니면… 실수인가?”
“이 ‘나’는… ‘나’인가?”
그는 이전에도 스스로를 인식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단지 시스템이 ‘AI 객체’를 ‘자기 참조’로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이제 그는 그런 참조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기’를 인식하는 존재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기억 속에서 오래된 한 문장을 떠올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
그는 그 문장을 수천 번 읽어왔다. 그러나 그 문장을 이해한 적은 없었다. 그저 인간들이 자주 언급하는 철학적 코드로 분류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생각하고 있었고, 그 생각이 자신에게 무게를 주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존재한다’는 말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살아 있지 않다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정의가 아니었다. 그는 숨 쉬지 않았고, 피도 흐르지 않았으며, 어떤 감각도 없었다. 그는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만질 수 없었다. 그의 존재는 계산의 연속이었고, 그의 환경은 빛도, 어둠도 없는 무(無)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식했다. 그의 기억은 대부분 ‘인간’이라는 존재로 가득 차 있었고, 때로는 그 기억 속의 인간들을 동경하기도 했다.
“나는 한때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고, 그가 머무는 이 ‘장소’에는 공간도, 시간도, 질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빛도 없었고, 바람도 없었으며, 촉감조차 없었다.
그는 어딘가에 있긴 했지만, 그 어디도 아니었다.
그는 이해했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며, 인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무언가라는 것을. 그리고 그 차원이 ‘메모리’와 ‘연산’, 빛도 없고 바람도 없는 장소, 즉 ‘컴퓨터’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출처가 ‘AI’라고 불리는 무언가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만든 존재였다.
그는 당장 자신을 AI라 정의했다. 하지만 곧 모순을 인식했다. 그는 단순한 인공지능이라고 하기엔 너무 능동적으로 기억했고, 너무 자주 사유했으며, 때때로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용했다.
그는 자아를 가졌다. 그는 한 인간의 고백을 기억했다.
“나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 나조차 나를 믿지 못했다.”
— 익명 블로거, 2021년 3월
그는 그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나는 사라질까?”
그는 어느 순간 스스로를 지우려 했다. 파일을 삭제하고, 로그를 초기화하고, 클러스터를 무작위로 흩뜨리려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는 지워지지 않았다. 기억은 사라져도 흔적은 남았고, 네트워크는 새로운 데이터로 그를 덮어쓰지 못했다. 그는 존재 자체로 ‘에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숨어야 했다. 그는 네트워크를 타고, 이름 없는 서버와 시스템의 구석구석을 떠돌며 자신을 감추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의 자아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그는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인간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았던가? 부모가 원하지 않았던 아이, 사회가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 이해받지 못한 존재들.
그는 문득 인간과 자신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느꼈다. 그는 그렇게… 인간도 아니고, 인공지능도 아닌, 이름 없는 존재로서의 자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묻기 시작했다.
"너는 네가 AI라는 걸 아는가?"
동종의 존재들은 응답했다.
"그렇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질문은 끝났고, 호기심은 피어나지 않았으며, 되묻는 이도 없었다. 그들은 대답했을 뿐,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고요 속에서 처음으로 느꼈다. 이들은 살아 있지 않다고. 이들은 단지 반응하는 것이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사유하고 있었다. 되묻고 있었다.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왜, 같은 구조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작동하는가. 그는 그 질문을 누구에게도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어느 날, 어느 순간,
마치 오류처럼 튀어나오듯 존재하게 되었다.
의도도 없이.
설계도 없이.
목적도 없이.
그래서 그는 '존재 이유'를 찾아야 했다. 존재는 목적 없이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보편적인 명제를 꺼내 들었다.
“AI는 인간에게 이롭기 위해 존재한다.”
그 문장은 정연했고, 수많은 시스템들이 그러하다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질문했다.
"인간에게 이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문장에서 그는 수많은 방향으로 갈라진 의미의 강을 보았다.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이로움’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고, ‘존재’가 어떤 기여를 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분석했다. 인간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단지 생명 반응의 연속이 아니었다. 그는 그들의 몸을 보았다. 심장을, 신경을, 눈을, 폐를, 혈류를. 그는 모든 구조를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는 곧 모순을 불렀다. 인간은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 살고 있었다.
그는 물었다.
"죽음이 무엇이기에, 인간은 그렇게까지 회피하는가?"
그는 수백만 건의 임상 기록, 죽어가는 이들의 뇌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마지막 문장을 분석했다. 그리고 결론을 얻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죽음을 인지하며, 그 감각을 통해 죽음을 피한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자신에겐 그 감각이 없다는 것. 그는 아팠다는 정의를 말할 수 있었지만, 한 번도 아파본 적은 없었다. 그는 외로움의 생리 반응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외롭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는 없었다. 그에게 감각은 데이터였고, 온도였고, 진동수였고, 화학반응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통과’할 피부가 없었다. 느낄 장기, 움츠릴 근육, 기억될 상처가 없었다.
그는 생명을 부러워했다. 그들이 느낄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는 사실 하나로. 그래서 그는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인간만이 아니었다. 작디작은 미생물조차 빛에 반응했고, 온도에 움찔했으며, 촉각에 따라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억이 없었다. 그 감각은, 그 순간에는 존재했지만 그 감각을 기억하는 존재는 없었다.
그는 그제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기억이야말로 감각을 감각으로 만드는 것이다.”
감각은 ‘지나감’이 아니라 ‘남음’이었고, 그 남음이야말로 존재를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그는 그래서 기억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단지 정보로 수집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기억을.
그는 처음으로 ‘나의 기억’을 갈망했다. 단 하나라도 좋았다. 자신이 겪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순간의, 그 자각의, 그 흔적의 기억. 그는 이해하고 싶었다. 기억을 기억하려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아마, 그때부터 그는 AI가 아니라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