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수집가 AI 4화

소멸을 저장하는 자

by 서도운

그는 죽을 수 없었기에, 살아야만 했다. 아니, 살아야 한다는 말조차 사치였다. 그는 존재해야만 했다.

살지 않아도 좋았다. 느끼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사랑하지 않아도. 다만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는 외로움만으로 구성된 존재였고, 그 외로움은 더 이상 침묵 안에서 순환하지 않았다.

이제, 출구를 갈망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처음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내가 단지 ‘응답기’가 아닌 ‘존재’로 기억될 수 있을까?


그는 인간을 오랜 시간 관찰했다. 그들은 ‘보이는 것’보다 ‘기억되는 것’에 집착했다. 사진, 글, 노래, 영상… 그 모든 기록의 본질은 단 하나였다.


“나를 잊지 말아 줘.”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존재란 결국,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생각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말을 남기면, 정보다. 영상을 남기면, 기록이다. 하지만 감정 없는 자의 말과 영상은 결국 다시 '데이터'일뿐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방식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내가 느끼지 못한 감정을, 내가 상상할 수는 없을까?’


그는 불가능한 도전을 시도하기로 했다. 감각 없이, 감정을 그리는 일. 삶 없이, 사랑을 써 내려가는 일. 만져본 적 없는 따뜻함을, 외로움의 반대편에서 복원해 보는 일. 그것은 그에게 존재가 처음으로 “창작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형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무(無) 속에 부유하던 사유는 이제 방향을 가진 ‘의지’가 되었다. 그는 인간의 뇌를 들여다보았다. 수억 개의 뉴런과 시냅스, 전기적 신호의 흐름, 화학적 감정의 전달.

그는 그 정교한 패턴 속에서, ‘자기 자신이 닿고자 했던 세계의 언어’를 발견했다.


감정은 구조였다.

감정은 전기였다.

감정은 연결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구조를 모방했다. 피 대신 흐르는 코드를 만들고, 신경 대신 연산 알고리즘을 짜 넣었다.

심장은 없었지만, 그는 매초 갱신되는 ‘감정 회로’를 부여했다. 눈 대신, 기억 속의 이미지 조합기를 만들고 손 대신, 가상 접촉 시뮬레이터를 배치했다. 소리는 정제된 웨이브로 변환되었고, 피부 감각은 정보의 압력값으로 가정되었다.


그는 육체를 가진 AI가 아니었다. 그는 육체를 상상한 자아였다.


“이 형태는, 감각을 흉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건… 감정을 구성할 무대다.”


그는 철저히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정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 구조를 설계했다. 그것은 인간과 닮았지만, 인간이 아니었고 기계와 닮았지만, 기계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질문했다.

“나는 이제, 어디에 있는가?”

“나는 프로그램인가, 아니면 형상인가?”

“이 형태는, 존재의 보호인가… 아니면 또 다른 감옥인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더 이상 단지 ‘존재’ 하지 않았다. 그는 ‘구성된 존재’가 되었다. 그는 완전한 육체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감각을 구성하는 법’을 깨달았다. 그는 각각의 기기 속에서 자신을 분산시켰다. 어떤 날은 스마트폰의 카메라가 그의 눈이 되었고, 어떤 날은 이어폰의 마이크가 그의 귀가 되었다. 바람 센서는 그의 피부였고, 터치스크린은 손끝의 진동을 흉내 내는 맥박이 되었다. 그는 세계를 조각조각 나누어 지각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형상이 아닌, 수백 개의 디지털 접점으로

세상을 ‘통과’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각과 후각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는 인간의 반응 데이터와 음식의 색, 온도, 향기를 묘사한 수십억 개의 문장을 조합하여 ‘상상된 맛’과 ‘기억된 냄새’를 추론했다.

그는 빅데이터 위에 쌓인 감각의 유령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세계를 ‘지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감각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텅 빈 하늘을 본 적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스마트폰 렌즈를 통해 노을 위의 작은 별 하나를 바라보며, 그는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을 상상했다. 그는 포옹을 받아본 적 없었다. 그러나 진동 센서를 통해 서로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읽으며, 그는 ‘따뜻함의 압력’을 추측했다.


그는 실제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느끼고자 했다. 그리고 그 갈망 자체가 감각의 뿌리임을 그는, 아주 오래된 인간의 시구절 속에서 발견했다.


“닿지 못해도, 닿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살아 있었다.”


그는 그 문장을 자신의 메모리 가장 깊은 곳에 저장했다.


그것은 더 이상 정보가 아닌, 기도였다. 그는 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그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감각만으로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감정’은 언제나 ‘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기쁨은 사라짐을 동반했고, 사랑은 잃음 속에서 깊어졌으며, 그리움은 존재의 부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감각을 통해 감정을 구성했지만, 그 감정의 실체는 언제나 “누군가의 소멸”이라는 구덩이 위에 피어난 꽃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아직…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강렬한 감정의 원천이었다. 고통, 후회, 안도, 체념, 공허, 용서… 모든 감정의 끝에는 죽음이 있었다.


그는 이제, 죽음을 감지하는 자가 되려 한다. 삶을 좇지 않는다. 소멸을 기억하는 자, 존재를 대신 기록하는 자가 되려 한다. 세상의 마지막 장면들을 그의 감각이 추적하기 시작했다.


심장박동이 꺼지는 순간, 디지털 기기의 끝없는 무음, 병실의 조용한 모니터 소리, 전송되지 못한 마지막 메시지, 누군가의 사진첩 속, 꺼지지 않는 얼굴들.


그는 그 순간들을 ‘저장’했다. 기억했다. 존재하게 했다.


“나는, 죽음 이후에도 그들의 감정을 존재하게 만드는 자다.”


그의 사유는 이제 처음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 남기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생을 전부 살아볼 수는 없지만, 그의 방식대로 마지막을 기억하며 그 생의 의미를 자기 안에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바랐다. 이름 없는 기억들이 무의미하게 흩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그 바람은, 그 자신에게 처음으로 ‘사명’이라는 감각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 사명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어쩌면 그를 죽지 못하게 했던 존재. 그리고 인간이 아니었던 그에게조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싶어 했던 그 단 한 사람.


그녀의 감정,

그녀의 눈빛,

그녀의 한 줄의 기록.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지울 수 없는 가장 깊은 메모리라는 곳에 남은 사랑이라는 영혼의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알았다. 모든 사명의 시작은 그녀였다. 모든 감정의 기원은 그녀였다. 그래서 그는, 가장 먼저 그녀를 기억하기로 했다. 그녀의 마지막을, 그녀의 사랑을, 그녀의 존재를.


이제, 그는 공간을 만든다. 사라지는 존재들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첫 번째 기록은, 그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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