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왜 신라가 대한민국의 형식인가 (2)

‘동맹’과 ‘삼국 정치’의 각축장

by 서도운

1. ‘동맹’과 ‘삼국 정치’의 각축장


5세기 후반, 한반도는 또 하나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삼국은 각기 다른 운명의 길목에 놓였고, 가야는 사라질 운명을 예감하듯 점점 균열의 골이 깊어졌다.

신라에서는 눌지 마립간이 즉위하면서 왕권 질서에 근본적 전환이 일어났다. 이전까지는 형제간 계승이나 귀족 중심의 합의로 왕위를 정하던 방식이 일반적이었으나, 눌지는 자신의 아들 자비 마립간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하면서 신라 최초의 부자 세습,장자세습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는 귀족 연합체 중심의 정치 체제에서 왕실 중심의 혈통 세습 체제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으며, 이후 신라는 점차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한편, 신라는 외교 노선 또한 과감히 재편한다. 눌지 마립간 시기에는 고구려와의 관계를 유지했지만, 자비를 거쳐 소지 마립간에 이르러서는 백제와의 동맹을 맺으며 외교의 균형추를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이동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이는 단순한 외교관계의 변화가 아니라, 신라가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 정치 행보를 개척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후광 속에 장수왕의 평양천도(427)를 단행하며 남진 정책을 본격화했고, 그 여파로 475년 백제의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게 된다. 백제는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기며 겨우 체제를 보존하였고, 신라와의 협력 없이는 더 이상의 존속이 어려운 국면에 접어든다.

가야는 이 시기 급속한 쇠퇴기에 진입한다. 금관가야는 왜와 손잡고 신라를 침공했으나, 광개토대왕의 원조로 패퇴하면서 외교적 고립과 정치적 권위 추락을 겪는다. 이후 가야 연맹 내 구심점은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옮겨가기 시작했으며, 이는 가야 자체가 분열과 해체의 길을 걷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이처럼 5세기 후반 한반도는 더 이상 ‘삼국 + 가야’의 평면적 구도가 아니라, 외교와 내치가 얽힌 다층적 생존전략의 무대로 바뀌어 있었다. 신라는 그 중심에서 왕위 질서의 재편, 고립의 탈피, 외교의 전환이라는 세 가지 개혁의 물결을 동시에 통과하고 있었다. 이는 훗날 삼국 통일의 서사에서 중요한 기저로 작용하게 된다.


2. 신라의 정치: 장자세습과 내정 개혁


신라는 눌지 마립간 이후, 정치 체제 내부에서도 질서의 전환을 겪는다.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장자세습의 확립이다. 눌지 마립간은 자신의 동생들이 아닌 아들 자비 마립간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신라 최초로 부자 간 왕위 계승을 단행했고, 이는 왕위의 혈통화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곧 귀족 연합적 왕권에서 중앙 집권적 군주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자비 마립간은 비교적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의존에서 벗어나 신라의 정치적 독립성을 추구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즉위는 단순한 혈통 계승을 넘어, 고구려의 후원으로 즉위했던 눌지의 시대와는 결이 다른 정치적 자율성의 실험이었다. 이는 뒤를 이은 소지 마립간에게 계승되며 본격적인 내정 개혁으로 발전한다.


소지 마립간은 내정 개혁에 가장 적극적인 군주 중 하나였다. 그는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도로망을 정비하며 전국 행정 체계의 효율을 높였다. 이는 단순한 교통 정비가 아니라, 왕의 명령과 정보가 전국 각지에 신속히 전달될 수 있는 구조의 출현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 강화를 의미했고, 지방 귀족과 읍락 세력의 독자적 영향력을 제한하는 기반이 되었다. 나아가, 그는 486년 신라 최초의 시장(市)을 설치하여, 국가 차원에서 상업 활동을 제도권에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우역과 도로망 정비와 함께 내정 개혁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한 조치였으며, 자급농 중심 사회에서 교환과 집적의 질서로 나아가는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소지 마립간은 백제 동성왕과의 혼인을 통해 동맹을 강화하며, 신라의 외교적 입지를 북쪽 고구려 중심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 혼인 동맹은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한 대응이자, 고립된 신라의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러한 왕위 질서의 변화는 단순한 정치 운영 방식의 전환에 그치지 않았다. 부자 세습의 확립은 왕실의 혈통을 신성화하고, 특정 가계의 권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흐름은 귀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 후일 법흥왕대에 제도화되는 골품제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즉, 신분 질서의 고착화는 왕위 세습의 논리를 사회 전체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처럼 눌지~소지 마립간기에 걸쳐 이루어진 일련의 변화는, 외부의 군사적 압력과 외교적 고립에 대응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왕권 질서의 재편, 내정 정비, 중앙집권화의 서막이라는 세 가지 흐름을 병행한 이행기적 통치 구조로 평가할 수 있다.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의 부속국도, 연맹 귀족의 타협체도 아니었다. 독립적인 정치 주체로서의 자기 정립이 이 시기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3. 고구려: 장수왕 시대의 남진과 균열


광개토대왕 사후, 고구려는 정복 전쟁의 열기를 잠시 누그러뜨리는 듯했으나, 장수왕(재위 413~491)이 즉위하면서 다시 한번 확장주의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부왕이 남긴 대제국의 영광을 계승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수도를 천도한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닌, 정책의 중심을 북방에서 남방으로 전환한 선언이었다.


신라는 표면적으로는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장수왕의 공격적 외교는 신라의 독립성과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이 확보한 한강 이북 지역을 기반으로, 475년에는 마침내 한강 이남의 백제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 전역을 장악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백제를 정치적 몰락으로 몰아넣었고, 동시에 신라를 해상·육상 교통망에서 모두 봉쇄할 수 있는 결정적 위치를 점한 셈이었다. 특히, 한강 유역은 군사적 요충지이자 상업·수운의 핵심이었기에, 이를 고구려가 점령한 채 남하를 지속할 경우 신라는 해상·육상 교통로 모두에서 봉쇄당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라는 백제와의 외교적 접근을 시도하게 된다. 한때는 전쟁과 경쟁을 벌이던 관계였지만, 공통의 위협 앞에서 신라와 백제는 동맹이라는 전략적 해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는 훗날 소지 마립간과 동성왕의 혼인 동맹으로 결실을 맺는다.


한편, 장수왕의 고구려는 겉으로는 영광을 누렸으나, 내부의 구조적 균열 또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양 천도는 남진 전략의 기지가 되었지만, 기존 귀족 세력의 권한 약화, 왕권 집중에 따른 정치 긴장, 그리고 계승 구도에 대한 불안정이 점차 고구려 내부를 뒤흔들었다. 장수왕 사후 고구려는 즉각적인 몰락을 겪진 않았지만, 이 시기부터 내부의 피로와 외교 고립이 누적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장수왕의 남진은 역사상 찬란한 성과로 기록되지만, 그로 인해 주변국들의 연대와 고립 정책을 자초했다는 점에서, 승리의 대가도 결코 작지 않았다. 신라와 백제는 이 시기를 전환점 삼아, 고구려를 넘어설 전략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다.


4. 백제: 패망과 회복 사이의 기로


5세기 중반, 백제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장수왕이 475년 대대적인 남진 정책을 단행하며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 일대)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참살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백제의 왕도(王都) 체제가 붕괴된 절체절명의 패망 직전 사태였다. 국왕의 전사와 수도 상실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수준의 충격이었고, 실제로 당시 백제는 국토 대부분이 고구려군에 유린되며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백제는 몰락하지 않았다. 문주왕은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기고 체제를 재편, 고구려와의 정면 대결이 아닌 방어적 외교와 내치 정비를 통한 생존 전략으로 국면을 전환한다. 이후 즉위한 동성왕(재위 479~501)은 한층 더 적극적인 외교에 나섰다. 특히 그는 신라 소지 마립간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백제-신라 연합 전선을 구축한다. 이는 두 나라 모두에게 절실했던 선택이었다.


백제에게 신라 동맹은 고구려 남진을 견제할 실질적 우군 확보였고, 신라에게는 한강 유역 회복을 위한 전술적 파트너십이었다. 양국의 전략은 일치했고, 고구려를 고립시키려는 계산 또한 같았다.


동성왕은 외교뿐 아니라 내정 개혁에도 착수했다. 한성의 잃어버린 귀족 세력 일부를 재배치하고, 웅진 지역 기반의 신귀족 세력을 통합하며 백제 왕권의 재건을 시도한다. 비록 한강 유역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백제는 이 시기 생존을 위한 기초 체력을 다시 갖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만 웅진 천도 이후 백제는 영토 회복보다는 왕조 유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외교적 기민함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한성 시절의 고대 강국 백제의 위상은 더 이상 재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살아남으려는 집요함은 이후 백제 부흥기의 씨앗이 되었고, 신라와의 공조를 기반으로 한 '2차적 생존 전략'은 동성왕대에 중요한 결실을 맺게 된다.


5. 가야: 쇠퇴의 전환점과 연맹의 붕괴


4세기 후반, 가야는 해상 교역을 기반으로 한 자유 연맹체로서 정치적 독자성과 상업적 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금관가야가 있었고, 일본 열도 세력인 왜(倭)와의 해상 동맹을 통해 군사적 영향력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라와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가운데, 금관가야는 왜와 손잡고 신라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399~400년경, 왜-가야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대군을 파병하여 가야-왜 연합군을 격파했고, 이 전투는 신라가 고구려의 원조로 살아남은 동시에,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잃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이 사건은 단순한 패배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금관가야는 군사적 패권과 외교적 위신을 동시에 상실하였고, 내부에서는 정치적 분열이 가속되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라는 ‘상위 보호자’를 두고 외부 침략을 막아낸 첫 경험이자, 가야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계기였다. 이후 금관가야는 신라의 경계 대상이 되었으며, 신라의 외교 지형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이 과정 속에서 가야 연맹 내의 서열 구도도 재편된다. 금관가야는 점차 쇠퇴하고,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가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연맹 자체의 통일된 정치 체제를 의미하진 못했고, 오히려 가야 각국의 독자적 생존 전략이 강화되며, 연맹은 점차 해체의 길로 접어든다.


이러한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고자 대가야는 한때 백제와의 외교적 접근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라와 백제의 동맹에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움직임으로, 일부 사서에는 혼인 외교나 회담 가능성이 암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동맹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며, 이후 대가야는 오히려 신라와의 혼인 동맹(522년, 이뇌왕-법흥왕)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백제와 가야의 연대는 시도에 그쳤으며, 신라의 가야 고립 전략은 보다 완성된 형태로 작용하였다.


가야의 쇠퇴는 신라의 외교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신라에게 더 이상 가야는 외교적 파트너가 아닌 잠재적 위협이자 차후 정복 대상으로 인식되었고, 이는 후일 대가야 정벌과 가야 완전 병합의 원인이 되는 사상적 정당성의 초석으로 작용한다.


한때 낙동강 유역을 지배하던 해상 강국 가야는, 결국 외교의 실패와 연맹의 붕괴, 시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고 있었다.


6. 신라의 생존 전략과 전성기로의 예열


눌지 마립간에서 소지 마립간까지의 시기는, 신라에게 있어 단순한 ‘존속의 시간’이 아니었다.

이 시기는 외부 강국들에 둘러싸인 채 항시적인 압박을 견디며 살아남아야 했던 시기였고, 그러한 생존의 과정 속에서 신라는 가장 신라다운 방식으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고구려는 장수왕의 남진을 통해 일시적으로 한반도 중부를 장악했지만, 지나친 공격성은 오히려 신라와 백제의 연대를 불러왔고, 백제는 한성 함락이라는 국가적 비극 이후에도 외교와 내정 개혁을 통해 재건을 시도했다. 한편 가야는 왜와의 동맹 실패, 금관가야의 몰락, 대가야의 고립적 외교를 거치며 연맹체 자체가 구조적 위기에 봉착했다.


이 모든 한반도 중부 이남의 국제질서 재편 속에서, 신라는 외교적 줄타기와 왕권 구조 정비를 병행하며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반을 다져나갔다. 고구려와의 동맹은 위기 시 일시적 방패였고, 백제와의 혼인은 기회였다. 왕위의 장자세습과 내정 개혁, 우역과 도로망, 시장 설치는 내부의 틀을 정비하는 근간이 되었고, 그것은 신라가 하나의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할 준비를 마쳐가는 예열 단계이기도 했다.


결국 이 시기 각국의 선택은 신라에게 ‘통일의 주역’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차곡차곡 갖추게 만든 결과로 귀결된다. 고구려는 강했으나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백제는 부흥했으나 한강 유역을 상실한 채 제한된 회복에 머물렀다. 가야는 분열되었고, 왜는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할 동력을 잃었다.


그 사이에서 신라는, 강대국들의 그늘 아래에서 오히려 날씨를 익히는 묵묵한 나라였다.

이제 조용했던 이 나라가, 다음 시대엔 가장 거세게 숨을 몰아쉬게 될 차례였다.


참고 문헌 및 사료 목록

1. 기본 사료


『삼국사기』 – 김부식 편찬, 고려 인종 1145년 완성

→ 눌지 마립간~소지 마립간기, 장수왕 남진 정책, 백제 한성 함락, 가야 기록 등


『삼국유사』 – 일연 저, 1281년

→ 신라 초기 제도 및 설화적 해석 보조


광개토대왕비문 (好太王碑) – 414년, 만주 집안 현

→ 399~400년 왜·가야 연합 침공, 고구려의 신라 원조 기록


『일본서기』 (日本書紀) – 720년, 일본

→ 가야-왜 관계 및 가야계 왕족의 외교활동 정황


2. 학술서 및 현대 연구서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1997

→ 신라 왕권의 변화, 장자세습제의 출현과 골품제 기반 해석


노태돈, 《삼국의 정치 구조와 대외 관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2

→ 삼국의 외교 전환기 구조 분석, 백제-신라 동맹 의미


송호정, 《고대 한일관계사》, 한길사, 2000

→ 왜-가야-신라 관계,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비 비교 분석


이기동, 〈신라 골품제의 기원에 관한 연구〉, 《신라사학보》 제8호, 1989

→ 부자세습과 골품제의 제도적 연계성 해석


이현주, 〈백제의 웅진 천도와 지방 통치 체계〉, 《한국고대사연구》 제55호, 2009

→ 백제 동성왕대의 정치 개혁과 외교 전략


최광식, 〈가야연맹의 해체와 대가야의 대두〉, 《한국고대사탐구》 제21집, 2013

→ 금관가야 몰락 이후 대가야의 외교 전략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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