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시작
1. 국가라는 이름의 시작
― 형식 없는 정통에 질서를 부여한 첫 군주
진한은 이름을 가졌지만, 국경은 없었다.
사로국은 권력을 행사했지만, 권위는 흩어져 있었다.
그곳에 존재한 것은 '신화적 기원'과 '공동체의 기억'이었고,
국가라 불릴 만한 형식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신라의 실질적인 국가 개조는 지증왕(在位 500~514)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그는 관제와 지명, 행정구역을 정비하고, '신라'라는 국호를 대외적으로 천명하며, 고대국가의 실체를 구성한 개혁 군주였다.
하지만, 모든 형식에는 시작이 필요했다.
그 시작은 바로 내물 이사금이었다.
『삼국사기』는 서기 356년, 김 씨 내물의 즉위를 기록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김 씨가 처음으로 왕위를 세습하니, 그 후로 김 씨가 왕통이 되었다.”
이는 단지 한 사람의 즉위가 아니라,
권력의 계승 구조가 혈통 중심으로 고정되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또한 내물은 ‘이사금’이라는 유서 깊은 호칭 대신, ‘마립간’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왕의 호칭이 신화적·합의적 지위에서, 고유한 통치 권위로 이행되었음을 상징한다.
그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정복으로 위에 서지도 않았다.
다만, 이전의 모호한 정통을 하나의 형식으로 묶어낸 군주였다.
그리하여 신라는 이 시점에 비로소 ‘국가’라는 단어를 기억 속에서 꺼내어, 언어로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완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질서가 생겼다.
형식은 생겨났고, 역사는 그 형식을 계승하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 왕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독립적인 권위를 갖다
신라는 오랫동안 왕을 ‘이사금’이라 불렀다.
그 말은 ‘잇금’, 곧 맏이 또는 연장자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왕은 여럿 중 하나였고, 합의로 선택된 자였다.
그는 모든 것을 결정하기보다는, 오래된 연맹체의 전통 위에 앉은 대표에 가까웠다.
그런데, 내물은 다른 이름을 선택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그의 즉위와 함께 김 씨가 왕위를 잇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동시에, 『삼국사기』와 후대의 왕호 기록에는 ‘마립간(麻立干)’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는 이사금과 차별화되는 칭호이며, 내물 이후 눌지, 소지, 지증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 간 지속된다.
‘마립간’은 고대어로 ‘우두머리 간’, ‘우뚝 선 자’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간(干)’은 본래 만주-한반도 지역에서 군장이나 추장을 뜻하던 표현이었고,
‘마립’은 높고 독립된 존재, 즉 타자 위에 선 자를 의미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칭호는 더 이상 왕을 공동체의 맏형이 아닌,
고유한 혈통과 권위를 지닌 통치자로 규정한다.
그는 누구의 선택을 받아 위에 오른 자가 아니라,
태어남 그 자체가 곧 통치의 정당성이 되는 존재였다.
이로써 신라에서 최초의 정치적 형식이 등장한다.
왕이라는 존재가 이름을 통해 제도화된 것,
그 자체가 마립간 체제의 출발이다.
― 흩어진 권위가 땅 위에 모습을 드러내다
국가란, 권력이 공간 위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이전까지 신라는 이름만 있고 땅은 없었다.
왕은 있었으나 왕궁은 없었고,
지배는 있었으나 그 권력이 머무는 곳은 불분명했다.
내물대에 이르러, 신라의 통치 중심지는 서라벌(徐羅伐)로 고정된다.
이는 곧, 왕이 거하는 ‘왕경’의 형성을 뜻하며,
즉, 서라벌이 수도로서의 사로국이 실질적으로 성립한 순간이었다.
『삼국사기』와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부터 경주 일대에는 도로 정비, 궁성 건축, 왕릉 조성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왕의 무덤이 일정한 공간에 집중되고, 도성의 중심축이 정해지며, 지배자는 비로소 공간적 실체를 얻게 된다.
또한, 이 시기의 신라는 철기문명에 기반한 교통·군사 조직의 형성이 병행된다.
경북 내륙과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내륙 교통망은,
왕경을 중심으로 한 통합의 그물망이 된다.
이제 국토에는 중심과 변방이 생겼고,
왕의 명령은 공간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서라벌은 단지 한 도시가 아니라,
정통이 형식으로 정착한 공간적 상징이었다.
그곳은 더 이상 촌락 연맹의 회의 장소가 아니었다.
왕은 그곳에서 군림했고, 권위는 흙과 돌 위에 자리를
잡았다.
― 의존이 아닌, 생존을 택한 외교의 시작
4세기 후반, 신라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위협받기 시작했다.
왜구(倭寇)는 남해를 따라 상륙했고, 내륙까지 노략질이 번졌다.
신라의 독자적인 군사력만으로는 이 침입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때 신라는 북쪽의 강국,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했다.
『광개토대왕비』에 따르면, 서기 400년, 광개토왕은 대군을 이끌고 신라에 파병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신라에 주둔하였다.
“신라가 위급하여 사신을 보내와 왕에게 구원을 청하니, 왕은 수군과 보병 5만을 보내 왜군을 무찌르게 하였다.”
— 『광개토왕비문』
이는 종종 신라가 고구려에 예속된 계기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내물의 선택은 굴욕이 아닌 현실적 외교 전략이었다.
그는 단기적 자존심보다 장기적 생존을 택했고,
더 강한 힘을 끌어들이되, 그 안에서 자신의 형식화된 왕권을 지켜냈다.
이 외교의 물증은 신라 땅에서도 발견된다.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제 그릇,
이른바 ‘호우명기(壺杅銘器)’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광개토태왕 호우 십 년(壺杅十年), 신라왕(新羅王)”
이 명문은 신라 왕이 이미 ‘왕(王)’으로 호칭되고 있었으며,
광개토대왕 10년(서기 400년)에 그와의 외교가 공식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교류되었던 사료에는 ‘사로국’이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는다.
광개토왕비문과 호우명기 모두 ‘신라(新羅)’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형식이 갖춰졌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외부가 그를 하나의 국가로 호명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내물은 왕권을 구축했을 뿐 아니라,
신라라는 이름을 형식 안에 올려놓은 최초의 군주였다.
내물 마립간은 단지 군사적 지원을 받은 왕이 아니라,
외교적 형식을 갖춘 ‘신라왕’으로, 고구려와 대등한 체계를 시도한 군주였다.
그때부터 신라는 삼국 중 가장 유연한 외교 감각을 가진 나라로 진화해 간다.
고구려에 기대돼 되지 않았고, 백제와 맞서되 충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외교적 균형 감각은, 훗날 삼국통일의 초석이 되는 외교 전략의 시원이 된다.
― 정통의 형식에, 합의의 제도를 남기다
내물은 혼자 지배하지 않았다.
그가 정통을 형식화했다면,
그 형식 안에는 여전히 여섯 촌장의 기억,
그리고 공동체 합의의 관습이 남아 있었다.
신라는 애초에 연맹이었다.
박혁거세가 왕이 되었던 순간에도, 그것은 촌장의 회의로 추대된 권위에 불과했다.
그 전통은 내물대에도 단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치적 완충 장치로 이어졌다.
이때 시작된 것이 바로 귀족 합의에 기반한 정치 구조,
후일 명확히 ‘화백회의(和白會議)’라 불리게 되는 정치체의 시초다.
비록 이 명칭이 내물 시기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의사 결정을 만장일치로 이루는 귀족 회의 체계는 이미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대등(上大等)이라는 최고 귀족 관직은 아직 이 시기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후대 법흥왕대(6세기 초)에 이르러 화백회의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초는 이 시기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내물은 왕의 칭호를 새로 만들었고, 왕경을 정비했으며, 외교의 질서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공동체적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그는 국가를 만들면서도,
그 안에 여전히 회의와 합의의 목소리를 들려주도록 하였다.
형식은 권위를 주었고, 합의는 그 권위를 통제했다.
그 균형 속에서 신라는, 가장 독특한 정치체로 성장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이 구조는 오늘날까지도,
권력을 가진 이 위에 존재하는 ‘합의의 권위’,
즉,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라는 현대적 견제 장치로 이어진다.
그 정신은 멀리 있지만, 그 원리는 결코 낯설지 않다.
― 강하지 않았으나, 형식을 만든 군주
내물은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전쟁도, 위대한 건축물도, 극적인 통일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질서 없는 정통에, 형식을 부여한 사람이었다.
그는 왕이라는 칭호를 새롭게 정했고,
왕이 거할 도성을 정비했으며,
왕의 이름이 외부에 불릴 수 있도록 국가의 외교 형식을 설계했다.
그의 시대에 신라는 단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신라는 흔들릴 수 있는 모양을 갖추었다.
형식을 갖추었다는 것은,
그 어떤 위기에도 질서를 유지할 틀을 만든 것이다.
그는 사로국을 마침내 수도로 만들었고,
그 왕권을 마립간이라는 이름에 담아 고유화시켰다.
그리고 신라라는 이름이 외부의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도, 바로 그의 시대였다.
내물은 끝을 이룬 이가 아니었다.
그는 시작의 구조를 만든 사람,
이후 왕들이 머물게 될 구조물의 토대를 깔아준 건축자였다.
그는 조용히 시대를 열었고,
그의 손에 쥐어진 권위는 아직 약했지만,
그 손은 형식이라는 이름의 미래를 조용히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