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왜 신라가 대한민국의 형식인가 (3)

나라를 다시 짓는 자 - 지증왕

by 서도운

나라를 다시 짓는 자 - 지증왕



한 나라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민족의 미래를 선언하는 일이다.


지증왕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는 있는 것을 ‘정비’하고,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갖추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일은 오히려 창조보다도 더 강력했다.
사로국은 '신라'가 되었고,
토착의 지배자는 ‘왕’이 되었으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백성이 되었다.

그의 통치는 눈에 띄는 업적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다지는 시대였다.
무엇이 사라져야 하고, 무엇이 남아야 하며,
무엇이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가에 대한 ‘선언’의 연속.

그래서 지증왕의 재위는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이 국가의 기틀이 되었다.
후대의 찬란한 왕국은,
그가 다듬어 놓은 이 ‘기반’ 위에 세워진다.


1. 국호의 정비 – 사로국에서 신라로


지증왕 4년, 기원후 503년.

왕은 조정에 명을 내려 나라의 이름을 고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사로국(斯盧國)’으로 불리던 오랜 국명이 폐기되고, 새로운 이름 '신라(新羅)'가 선포되었다.


‘신라’라는 국호는 단순한 명칭의 교체가 아니었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이전까지의 '사로국'은 고대 연맹왕국의 명맥을 잇는, 토착 공동체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신라는 더 이상 그런 유연한 집단이 아니었다.

지증왕은 하나의 나라, 하나의 권력, 하나의 중심을 요구했고, 그것에 걸맞은 이름이 필요했다.


‘新’은 새로울 신.

‘羅’는 벌일 라, 또는 그물을 뜻한다.

새롭게 질서를 펼치겠다는 선언.

혼성적 연맹체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로 나아가는 첫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또한, 한자 국호의 채택은 중국식 국제 질서에 편입되려는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다.

삼국이 공존하던 시기, 외교는 칼보다도 날카로웠다.

고구려와 백제가 앞서 국호와 왕호를 정비한 상황에서, 신라 역시 자존과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후일 법흥왕과 진흥왕 대에 본격화될 대외 확장을 준비하는, 말 없는 포석이었다.


2. 왕호의 변화 – 마립간에서 왕으로


지증왕은 자신을 ‘신라왕(新羅王)’이라 칭했다.
이전까지 신라의 군주는 '이사금' 또는 '마립간'이라는 호칭을 사용해 왔다.
이들은 각각 씨족적 전통과 연맹왕국적 질서를 반영한, 토착의 언어이자 지배자의 명칭이었다.

그러나 이 호칭들은 시대를 견딜 수 없었다.
삼국이 서로를 경계하며, 외세의 침투가 점차 가까워지는 시기.
지증왕은 더 이상 신라를 단순한 공동체의 연장선으로 남겨둘 수 없었다.

그는 '마립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동아시아 보편 질서에서 통용되던 '왕(王)'의 명칭을 취했다.

이 호칭의 전환은 자기 인식의 변화였고,
신라 스스로를 하나의 '왕국'으로 격상시키는 선언이었다.
이제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 혹은 중국의 왕조들과 동일한 언어로 외교를 수행할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는 내부에도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귀족 연맹의 합의로 추대되던 지도자가 아닌,
하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통치자.
그가 말하고, 명하고, 법을 세우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증왕은 외치지 않았다.
다만 한 글자를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한 글자가 신라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3. 정비의 정치 – 6부 체제의 재구성


신라의 중심, 경주는 원래 6개의 씨족 공동체가 모여 형성된 도시국가였다.

사로국 시절부터 내려온 이 여섯 부는 행정이 아닌 혈연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였고,

그 구성원들은 곧 신라 귀족층의 뿌리였다.


그러나 지증왕은 이들을 더 이상 씨족 중심의 공동체로 두지 않았다.

그는 여섯 부를 행정적 단위로 정비하기 시작했다.

씨족의 이름은 남았지만, 그 기능은 국가 운영 체계로 흡수되었다.


즉, 6부는 더 이상 신라 귀족들의 회의체가 아니었다.

왕을 중심으로 편성되는 행정질서의 일부로 재구성된 것이다.

이는 연맹체에서 중앙집권국가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중요한 전환이었다.


이러한 체제 개편은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첫째, 왕권이 귀족 연합의 상징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둘째, 후일 법흥왕의 율령 반포, 진흥왕의 군사 확장 정책을 수용할 수 있는 체질 개선이 이루어졌다.


겉보기에 변한 건 없었다.

이름도, 구성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의미와 기능은 완전히 바뀌었다.


지증왕은 제도를 뜯어고치기보다는, 제도를 '재해석'하여 국가의 도구로 만든 왕이었다.

그는 기존을 무너뜨리지 않고도,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냈다.


4. 조용한 삼국 외교 – 충돌 없는 시대의 전략


지증왕은 전쟁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고, 누구와도 동맹을 맺지 않았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무기력이 아니라 전략이었다.

당시 삼국의 정세는 묘한 균형 속에 놓여 있었다.
고구려는 장수왕의 사후, 내치 혼란과 권력 이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고,
백제는 무령왕이 즉위하며 국력을 재정비하는 중이었다.
신라는 이제 막 국가 체제를 정비해 가던 질서 구축의 단계에 있었다.

지증왕은 이 상황에서 ‘선언’보다 ‘기반’을 택했다.
무리한 팽창이나 거창한 외교 성명 대신, 내부를 다듬는 조용한 시간을 선택한 것이다.
특히 백제와는 공식적 동맹 없이도 적대 없이 흐르는 외교 기조를 유지했다.
이는 무령왕의 우호적 통치 성향과도 궤를 같이했다.

한편, 고구려에 대해서도 도발 없이 조심스러운 거리를 유지했다.
신라는 아직 고구려와 맞설 체력이 없었고, 그 빈틈을 '조용한 정비의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러한 신중한 외교는 후대에 큰 의미를 갖게 된다.
법흥왕 대에는 백제와의 외교가 점차 가까워지며 동맹의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진흥왕 대에는 마침내 백제 성왕과 함께 '나제동맹'이라는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
다만,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고,
신라가 한강 유역을 독점적으로 차지하며 동맹은 파기되었고, 성왕은 전사했다.

그 시작이 지증왕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는 결혼동맹도, 군사동맹도 맺지 않았다.
다만, 동맹이 가능할 수 있는 외교적 질서를 조용히 다져 놓았을 뿐이다.

그는 외교가 아니라 통치의 길을 걸었다.
전쟁이 아닌 제도를 택했고,
그 결과는 수십 년 뒤, 신라의 칼끝으로 나타났다.


5. 지방과 체제의 재편 – 우산국 정벌과 확장


하지만 지증왕이 아무런 전쟁 없이 조용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했을 뿐, 확장과 통합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지증왕 13년, 즉 512년,

그는 젊은 화랑 출신의 장군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우산국 정벌을 단행하게 했다.

우산국은 지금의 울릉도와 독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해양 소국으로,

본래 신라의 직접 지배는 미치지 않던 외곽 지역이었다.


이사부는 단순한 무력만으로 정벌하지 않았다.

그는 우산국 사람들에게 “나무 사자로 가득 찬 배를 이끌고 왔다”는 심리전을 펼쳐

스스로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물리적 제압보다는, 공포와 설득을 병행한 통합 전략이었고,

이는 지증왕의 정치 스타일과도 맞닿아 있다.


우산국의 복속은 상징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첫째, 신라 역사상 첫 공식적인 해양 영토 확장이다.


둘째, 바다를 통해 일본 열도 및 동해 북부 세력과의 접점이 열린다.


셋째, 국경의 외연 확대와 함께 군사적 정체성 형성의 출발점이 된다.


한편, 이 시기에는 지방 제도의 정비도 함께 진행되었다.

지방촌락은 보다 체계적으로 편제되었고,

6부 중심의 중앙 통제가 서서히 지방까지 스며들기 시작했다.


지증왕은 전쟁보다는 설득과 체계화로 확장한 군주였다.

그가 칼을 들었을 때조차, 그 칼끝에는 전략이 있었다.


6. 풍속과 윤리의 개혁 – 순장의 금지와 백성의 나라


지증왕 4년, 기원후 503년,

그는 조용히 한 가지 금지령을 내렸다.

“사람을 따라 죽게 하지 말라.”

즉, 순장을 금지한 것이다.


순장(殉葬)은 오랜 세월 신라에서 이어져 내려온 장례 풍습이었다.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그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도 함께 무덤에 묻히곤 했다.

이 풍습은 죽은 자의 권위를 사후에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살아 있는 이를 의례의 이름으로 처형하는 폭력이기도 했다.


지증왕은 이 관습을 과감히 끊었다.

이는 단순한 장례 절차의 변화가 아니었다.

백성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정치로의 전환,

그리고 국가 윤리의 방향성을 제시한 선언이었다.


이 조치는 두 가지 흐름과 맞물린다.


하나는, 불교적 윤리관의 수용 준비였다.

당시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귀족과 승려 사이에서 불교는 번져나가고 있었고,

순장의 금지는 불살생의 사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다른 하나는, 신분 질서의 재편성과 연관된다.

순장을 없앤다는 것은, 하층민을 '주인을 위한 도구'가 아닌

독립된 생명과 존재로 인정하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이러한 결단은 결국 법흥왕의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

그리고 진흥왕의 민중 동원 기반 강화로 이어지게 된다.


지증왕은 사람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무덤을 바꾸지 않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그의 개혁은 피가 흐르지 않는 혁명이었다.


7. 조용한 혁명가 – 왕이 되기 위한 첫 조건


지증왕은 말이 적은 왕이었다.
그의 이름을 딴 전쟁도 없고,
그가 내세운 화려한 기치도 없다.
하지만 신라가 ‘국가’로 나아가는 데 있어,
그는 가장 많은 것을 준비한 왕이었다.

그는 ‘신라’라는 이름을 지었고,
‘왕’이라는 칭호를 선언했으며,
귀족 연맹체였던 사로국을 하나의 국가로 엮는 실을 꿰었다.
그 실의 마디는 제도였고, 그 매듭은 윤리였다.

그는 제도를 갈아엎지 않았다.
그 대신 기존의 것을 바꾸지 않고도 새 질서를 부여했다.
6부는 여전히 6부였으나, 이제 그것은 씨족이 아니라 행정이었다.
왕은 여전히 왕이었으나, 이제 그것은 마립간이 아니라 '국가의 주체'였다.

백성을 돌보는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소로 밭을 갈게 하며,
사람을 죽이는 순장을 금지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왕이란 누구를 위한 존재인가에 대한 답을,
제도를 통해 그리고 침묵 속에서 보여주었다.

진흥왕이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것도,
법흥왕이 국가를 통치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증왕이 정비한 ‘틀’ 위에서 가능했다.

그는 ‘강한 왕’이 되지 않았다.
그 대신, ‘왕이 강해질 수 있는 국가’를 만들었다.


[참고 문헌 및 사료]

■ 1차 사료


김부식,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제4 지증왕

국호 변경(503), 순장 금지, 우산국 정벌, 왕호 변경 관련 기록 명시


일연, 『삼국유사』 권 1 기이(紀異) 편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관련 ‘나무 사자’ 일화 전승


■ 고대사 해설 및 개론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1997

지증왕대 정치 체제 정비 및 왕권 강화 과정 기술


이병도, 『국사대관』, 박영사, 1983

삼국 시기 국호 및 왕호 변천사 분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8: 삼국의 발전과 통일』, 2010 개정판

지증왕의 내치 중심 통치와 삼국 외교 정세 비교


■ 학술논문


정영진, 「지증왕대의 정치개혁과 국가체제 형성」, 『한국고대사연구』 제31집, 2003

지증왕대 행정체계 재편과 왕호의 의미 분석


김태식,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과 그 상징성에 관한 고찰」, 『사학연구』 제89호, 2008

우산국 병합의 외교사적·정치적 상징 해석


윤은정, 「삼국시대 순장 풍습의 변화와 국가 이데올로기」, 『역사민속학』 제18호, 2011

순장 금지와 불교 윤리, 국가 통합 담론의 연관성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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