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직장은 보고서 형식을 어마 무시하게 중요시 여기던 곳이었다. 한 장으로 잘 요약해야 하면서도 글자 폰트, 크기, 줄 간격 등이 칼 같았다. 심지어 무척 중요한 보고서는 간격이 일정한지 자로 대어 보는 윗분도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탈자는 절대 없어야 하고. 난 숫자를 다루는 재무 담당이라 글로 된 보고서를 쓸 일이 잦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보고서를 써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정말 괴로울 따름이었다. 형식에 맞추어 보고서를 잘 쓰는 것은, 무척 중요한 능력으로 평가받았다. 그놈의 형식이 뭐라고, 내용만 충실하면 되지 왜 그리 중요하다 여겼을까.
형식을 의미하는 한자, '形'(모양 형)은 '幵'(평평할 견)과 '彡'(터럭 삼)이 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한자는 幵이다. 두 개의 '干'(방패 간)이 나란히 그려져 비슷한 모양임을 표현하면서 '모양'이란 뜻이 생겼다고 한다. 이 한자를 보면 쌍방이 서로 같은 것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매개가 바로 형식이란 생각이 든다. 누군가 干이라 말했는데 상대방이 千이라 알아들으면 이해시키는데 실패한 것이다. 상대방도 똑같이 干라고 알아듣도록 돕는 수단이 형식이다.
보고서 형식이 중요한 이유는, 보고서의 본질이 결국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데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장면도 볼록렌즈로 보느냐, 오목렌즈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 그 보고서 내용이 어떤 형식으로 담기는가에 따라 의도대로 잘 전달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오로지 형식에만 집착하는 것은 안될 일이지만, 본질만 보라며 형식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도 그리 좋은 자세는 아니다.
예절을 의미하는 '禮'(예도 예)라는 한자도 보고서 형식과 관련이 있을 듯싶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표현한 한자 '示'(보일 시)와 그릇에 곡식이 가득 담긴 모습의 '豊'(풍성할 풍)이 합해 만들어졌다. 제물을 풍성하게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 과정이 바로 禮인 것이다. 내용과 형식을 함께 갖추어 극진히 제사 지내는 그 마음이 엿보인다.
좋은 보고서에는 禮가 담겨있다. 스스로도 정말 애정 있고 중요하게 여기는 프로젝트 보고서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도 크게 심혈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이리도 해보고, 저리도 수정해 보면서 보고서를 예쁘게 보이려 하고, 윗분의 마음에 들어 꼭 통과시키겠다는 혼신의 의지를 담을 것이다. 문제는 작성하기 싫은 보고서도 써야 한다는 것. 그래도 어쩌겠나, 먹고살려면.
직장인 65.4%가 보고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업무시간의 1/3을 보고서 작성에 할애한다는 설문조사를 봤다.("직장인 70%, 보고서 스트레스 심해.. 이유 1위는?" 싱글리스트, 2021년 8월 25일 자) 오늘도 보고서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있을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함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