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성삼문과 신숙주, 그리고 이세돌
최근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은퇴 선언이 화제입니다. 알파고와의 바둑 대전에서 처음이자 (사실상) 마지막 승리자로 역사에 남게 될 그는, 은퇴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전에는 자부심이 있었다. 가령 내가 바둑의 일인자라고 치면 세상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존재라는 자부심을 가졌는데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아무리 잘 두어도 못 이길 것 같고 상식적으로 봐도 이기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지금은 인공지능한테 바둑을 배우지만 한판도 이기지 못한다. 나는 바둑을 예술로 배웠다. 둘이서 만들어가는 하나의 작품으로 배웠는데 지금 인공지능에게서는 그런 것이 남아 있는지...”
그는 여전히 우승하고 많은 상금을 받을 수 있는 최정상급의 실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빠른 은퇴를 선언한 것은, 이미 바둑이 인공지능에 의해 지배되어버린 현실 속에 최고의 실력을 가진 기사로서의 자존감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어리석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시대가 그렇게 바뀐 것뿐인 것을, 그냥 현실에 순응하고 살면 여전히 많은 수입을 얻게 될텐데 말이죠. 하지만 그는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바둑을 거부하겠다며 당당히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명분을 얻고 실리를 버리는, 어찌보면 별로 이익이 되지 않는 비효율적인 선택이지만 그의 당당한 선택이 무척 멋져 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전, 명분이냐, 실리냐를 놓고 치열한 고민을 했던 두 지식인이 있습니다. 성삼문과 신숙주입니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자신이 섬겼던 세종대왕과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고자 쫓겨난 임금 단종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유학자로서 마땅히 쫓아야 할 명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충신의 대명사로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반대로 신숙주는 수양대군에게 돌아서고 훈구공신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많은 부귀영화도 누렸습니다. 명분을 버린 그 선택으로 인해 역사는 그를 변절자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명분에 따라 죽음을 택한 성삼문이 옳았고, 신숙주는 그릇된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당성이 부족한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조선은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유능했던 수많은 신하들이 죽임을 당한 빈자리의 상당부분을 특히 한명회처럼 탐욕에 가득 찬 훈구공신들이 채워나갔습니다. 만약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다면 조선은 급격히 망조의 길을 걸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숙주가 뛰어난 정치력을 통해 조선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었고, 태평성대를 이끌었습니다. 능숙한 외교술로 대외관계를 안정시켰고, 경제 · 군사적으로도 흔들림없는 정치를 하였습니다. 그는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했지만, 그 실리는 조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일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한 주군에게만 충성하겠다는 성삼문의 강직함은 후세의 귀감이 되지만, 그는 대신 백성들을 위해 정치할 기회를 내던져야 했습니다. 신숙주는 변절자가 되고 말았지만, 백성을 위해 마음껏 정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느 한쪽만 옳다고 하거나, 반대로 비난만 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역사는, 성삼문처럼 명분을 중시하는 인물, 신숙주처럼 실리를 중시하는 인물 모두를 아우르며 발전해 왔습니다.
이세돌 9단의 선택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인공지능에 대해 은퇴라는 자기희생으로 저항한 그의 울림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은퇴를 선언하지 않는 다른 바둑기사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똑같이 멋있게 은퇴를 선언해 버린다면, 더 이상 바둑계에 인간은 남아 있지 않고 진짜 인공지능만의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비록 인공지능에게 바둑을 배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바둑은 결국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수많은 기사들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세돌 9단의 명분을 위한 선택도, 다른 기사들의 실리를 위한 선택도, 바둑계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모두 필요로 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명예나 의리처럼 명분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득이나 효율 등 실리를 더 따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든 자기 나름의 신념에 따라 용기있게 선택한 길이라면 존중받아야 합니다. 다만 그것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되고 보자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바탕에 두고 있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