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因 / 緣
제 소중한 인연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 당신이 알게 되었다는 것은 78억 분의 1이라는 확률을 뚫고 성사된 기적, 그리고 '인연(因緣)'이다. '因'(인할 인)은 '囗'(에운담 위) 안에 '大'(큰 대)가 그려진 모습이다. 大는 양팔을 크게 벌린 사람을 묘사한 것인데, 이 囗라는 세상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표현한 듯싶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척 넓으면서도 좁다. 나와 인연이 닿은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으로 갑자기 맞닥뜨릴지 알 수 없다.
'緣'(인연 연)은 '糸'(가는 실 사)와 '彖'(판단할 단)으로 구성된 한자인데, 원래 옷 가장자리를 다른 헝겊으로 가늘게 싸서 돌리는 가선을 뜻하는 한자라고 한다. 가선이 옷을 감싸듯이 우리 인생도 인연에 감싸여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혼자 사는 인생이 아니기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당연히 좋은 인연도 있고 나쁜 악연도 있다. 내 의지로 그것을 100% 통제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인연의 비중을 좀 더 높이는 방법은 있는 것 같다.
먼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착각, 또는 모든 사람이 내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착각부터 버려야 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날 싫어할 사람은 싫어하더라. 관계를 위해 쏟을 수 있는 내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나에게 데면데면한 사람까지 잘 보이려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 차라리 내 소중한 사람에게 에너지를 더 쏟는 게 낫다.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은 포기하자. 최소한 누군가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 나 스스로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될 수 없을망정,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은 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좋은 인연을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또 한 가지. 한번 인연이 생긴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또 만날지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 더 이상 볼일이 없다 싶어도, 마지막에 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람의 기억이란, 마지막 순간에서 멈추기 마련이기에. 입사할 때 첫인상이 좋으면 직장생활이 순탄해지지만, 퇴사할 때 마지막 인상이 좋으면 내 인생이 순탄해질 수 있다.
예전 직장을 다니던 시절, 사우디 파견을 갔다가 복귀가 임박했을 즈음 시스템 매뉴얼과 인수인계 자료를 정말 열심히 만들어 후임자에게 전하고 떠났었다. 10년쯤 시간이 지나고, 그때 후임자였던 동료가 다른 회사로 이직한 후 나도 그곳에 추천 입사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직접 함께 일했던 시간은 드물었지만, 그가 나에게 믿음을 가져 주었던 것은 그 인수인계 자료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남긴 좋은 인상이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졌던 이 경험은 내 인생의 훌륭한 레퍼런스로 남았다.
불교에서는 因을 내 능력으로 잘 되는 요인, 緣을 주변에서 도와주어서 잘 되는 요인이라 설명한다. 이때 因은 5% 미만이고 緣은 95% 이상이라 한다는데, 살아본 날이 하루하루 더해갈수록 그 말이 맞다 느낀다. 내 인생의 95%를 기댈 수 있게 해주는 당신에게 감사드린다. 내 소중한 인연이 되어주신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