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앞에서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소개팅 자리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신촌의 어느 파스타 가게였지요. 피자 한 조각을 잘라서 서로 접시에 올려주던 그 순간을, 그때의 떨림을 기억합니다.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소개팅을 거절했다면, 그날 몸이 좋지 않았다면,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면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우리는 만났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만나야만 했던 인연이었기에. 우왕좌왕하며 살던, 그저 한 마리 禺같던 내 인생. 그렇게 '辶'(쉬엄쉬엄 갈 착)하며 살아가던 중에 당신을 '遇'(만날 우)한 것은 실로 기적 같은 일입니다.
정처 없던 내 인생에도 드디어 이 몸을 맡길 가정이 생겼습니다. 禺가 살 수 있는 '宀'(집 면)이 생겼습니다. 내 마음의 안식을 '寓'(맡길 우)할 수 있게 되었지요. 때로 다투는 날도 있지만, 어제보다 오늘 서로를 좀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오늘보다 내일 좀 더 많이 행복하리라 믿습니다. 앞으로의 내 남은 인생도 모두 그대에게 맡깁니다. 그대가 그대 인생을 나에게 맡겨주었듯이. 마음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다는 것은 실로 기적 같은 일입니다.
나는 禺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禺의 '心'(마음 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愚'(어리석을 우)하고 우둔합니다. 회사에서는 빠리빠릿해 보이려 애쓰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똑똑한 척 하지만, 그대 앞에서만큼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오로지 그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사는, 그런 우직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기적 같은 일입니다.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이 모든 기적을 그대가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