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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욱 Mar 01. 2020

아들아, 잃지 말아야 할 꿈이라면 잃지 말자–이광수

아빠가 쓰는 위인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듯이, 우리 역사도 좋았던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야.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보면 아픔도 참 많았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오랜 역사 동안 특히 아팠던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빠는 일제강점기라고 얘기하고 싶어. 주권국가로서의 권리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일본에 의해 강제로 점령되어 버린 참으로 아픈 역사지.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일제에 의해 억지로 끌려갔던, 또는 속아서 갔던 수많은 위안부나 강제징용공 할머니, 할아버지들처럼 그때의 상처와 아픔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야.


 같은 나라 사람이면서도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의식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있는데, 하물며 완전히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차별 없이 대해줬을까? 그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내지인, 조선 사람들을 조선인이라 하며 다르게 대우했어. 모두 일본 천황의 신민이라면서 일본 사람은 1등 신민이고, 조선인은 2등 신민이었던 거지. 또 다른 신분이 만들어지고, 자행되는 차별과 핍박 속에 노예 같은 시간을 살아야 했던 우리나라 사람들. 그렇게 마주해야 했던 현실 앞에서 많은 지식인들 또한 이 시간은 참으로 힘겨웠을 거야.


 이러한 고민을 안고 살았던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했어.


 “일제가 무력으로 우리를 점령했으니, 우리도 독립군을 양성해서 무력으로 일본을 내쫓아내야 해!”


 “우리가 지금 무슨 힘이 있다고! 미국처럼 강대국과의 활발한 외교활동을 통해 우리 사정을 잘 설명하고 호소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지금 독립을 해야 하는데 또 강대국에 의존하겠다고? 지금은 우리가 힘이 없으니, 스스로 강하게 힘을 길렀다가 적당한 틈에 일본을 쫓아내는 것이 현명한 거야.”


 생각하는 방법은 저마다 달랐지만, 어쨌든 목표는 한 가지였어. 우리나라의 독립.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어.


 “일본이 이렇게 강한데, 우리가 과연 독립을 하는 게 가능이나 할까? 그냥 강한 일본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도록 애쓰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도저히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현실 앞에, 자기 신념에 따라 친일을 선택한 지식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야.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춘원 이광수였어. 오늘은 민족이 사랑했던 대문호에서 대표적인 친일파로 전락해 버린 그 안타까운 일대기를 이야기해 볼까 해.



 이광수는 어릴 때부터 총명한 인물이었다는구나. 너만한 5살 때 이미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살 때 동양고전을 두루 섭렵했다고 하니, 정말 신동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10살 때 콜레라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마는 아픔을 겪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본 친일파 송병준의 추천으로 친일단체 일진회의 후원을 받아 일본에 유학을 간단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일본의 엄청난 발전상은 어린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어. 1909년에 일본어로 단편소설을 하나 발표하는데, 그 내용이 조선인 소년이 일본인 소년을 매우 동경하는 그런 내용이었다는구나. 일본에서 유학하며 그가 받았던 인상이 어땠는지 대략 짐작이 가. 1917년에는 무정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이야. 이 소설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를 대문호로 기억하는 중요한 계기가 돼. 아마 네가 나중에 고등학교를 가게 되면 그의 문학 작품에 대해서도 종종 배우게 될 거야.


 하지만 그도 여느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는 사람이었단다. 일본 수도인 도쿄에서 유학생들 주도로 독립선언이 있었을 때 그 독립선언문을 쓴 사람이 바로 이광수였어.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을 때 그곳에 참여하여 독립신문 발행을 맡기도 했단다. 하지만 외지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너무 힘겨워서였을까, 혹은 정말 항간에 떠돈 소문처럼 그가 일제에 포섭되었기 때문일까. 그는 조선으로 홀연 귀국하고 말아. 바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지만 별다른 조사도 없이 바로 풀려나는데, 이미 일제에 타협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행적이지.


 그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기 시작해. 한 마디로 우리 민족이 열등해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거야.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당시 크게 유행했던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 오늘 좀 어려운 말이 많이 나오지? 사회진화론은 원래 찰스 다윈이라는 학자가 주장한 진화론에서 나온 건데, 생물이 진화해서 발전해 왔듯이 사회도 마찬가지라는 거야. 그런데 진화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적자생존, 약육강식, 자연도태 같은 용어들이 동원되거든? 결국 더 우수하고 강한 자만 살아남고 열등하고 약한 자는 사라진다는 거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된 거야. 이 논리가 당시 일제강점기였던 현실에 적용되니, 조선 민족은 열등해서 민족개조가 필요하다, 즉 민족개조론의 근거가 된 거지. 약한 조선이 강한 일본에 점령된 것은 당연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어.


 이렇게 이광수는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입대를 적극 권장하는 활동을 해. 본인의 이름도 창씨개명하여 일본식 이름인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바꾸고, 완전히 일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


 “조선 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와 차별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에 나서는 분들도 많았지만, 독립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차라리 완전한 일본 사람이 되어 차별을 받지 말자고 주장한 이광수. 변절이었든 현실적 대안이었든, 어쨌든 그것이 조선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지. 하지만 그가 절대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해방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이루어지게 돼. 이후 조용히 중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4년 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연행되고 재판을 받는데, 그 자리에서 자신의 친일 행위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끝까지 변명을 한단다. 하지만 역사 속에 그의 이름은 친일파라는 낙인과 함께 남겨졌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폐렴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게 돼.



 이광수 또한 민족의 앞날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여. 아빠는 그가 가졌던 그 고민 자체는 진짜였다고 생각해. 하지만 만주에서, 상해에서, 연해주에서, 해외 각지에서, 혹은 조선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의해 감옥에 갇히면서도 끝까지 독립을 꿈꾸며 싸웠던 사람들과 무엇이 달랐길래 그렇게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 걸까? 그들은 독립이 불가능한 꿈이라 생각하지 않았어. 지금은 비록 일본이 매우 강하고, 조선은 너무나 미약해서 주권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조선인들이 함께 힘을 합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해방의 날을 볼 것이라는 그 꿈을 결코 버리지 않았던 거야. 힘이 강한 자가 힘이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에도 독립운동가들은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당당히 맞서 싸웠어. 해방이 오게 된 직접적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했기 때문이지만, 해방을 꿈꾸는 독립투사들이 없었다면 현실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거야.


 하지만 이광수는 거대하고 무력한 현실 앞에 굴복했고 해방을 불가능하다고 포기해 버렸어. 차라리 일본인과 똑같이 되는 것이 차별을 극복하고 잘 살게 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거야. 그래서 일본인처럼 황국신민으로서 당당히 군대에 입대하여 전쟁에 나가 싸우고,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거지. 그는 더 이상 꿈꾸기를 포기하고 말았어.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최선의 방도라고, 스스로 타협해 버리고 만 거야. 그것이 수많은 독립투사들과 이광수와의 차이점이었다고 아빠는 생각해.



 아들아, 오늘 이광수의 얘기를 들어보니 어떤 생각이 드니? 앞으로 살다 보면 거대한 현실 앞에 압도될 때가 있을 거야. 도저히 네 힘으로 불가능해 보일 것만 같은 일이 반드시 생길 거야. 물론 때로는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란다. 그때는 너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거라. 결코 놓지 말아야 할 꿈인지, 아니면 포기하더라도 상관없는 것인지 잘 판단해야 한다.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결정되게 될 거야.


 절대 버리지 말아야 할 꿈이라고 판단을 내렸거든,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거라. 불가능은 네가 불가능하다고 여길 때 정말 불가능한 것이 된단다. 소중한 꿈을 포기하는 순간, 너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계속 변명을 하며 합리화하게 될지도 몰라. 이런 이유 때문에, 저런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이야. 이광수도 그랬어. 그는 조선 독립의 꿈을 포기한 후, 스스로를 계속 합리화하기 바빴어. 조선은 약하니까, 약한 조선이 강한 일본에 잡아 먹히는 것은 당연하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게 나으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더니 그것만이 조선인이 잘 살게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완전히 믿어 버리게 되었어. 이처럼 끊임없이 변명해야 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게 결코 포기하지 말았어야 하는 꿈이었음을 보여주는 거라 아빠는 생각해.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결코 놓지 말아야 할 가치가 있어. 그것이 딱 무엇이라고 아빠도 말하기는 어렵지만, 네가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너 스스로 찾게 될 거라 생각해. 그리고 그것에 대한 네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꿈을 가지게 된다면, 그 꿈을 쉽게 잃어버리지 말자. 최소한 너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삶은 살지 않도록, 스스로 변명하는 삶은 살지 않도록 노력하자. 그 정도의 인생만 살아도 어느 정도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사랑한다, 아들.

     


# 오늘 아빠의 다짐

 - 아들이 무엇이 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도록 도와주자. 그리고 아들이 향해가는 꿈을 옆에서 응원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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