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가칭) 아빠가 쓰는 위인전"을 연재 중인 신동욱 작가입니다. 저의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개인적으로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글을 좋게 봐주시고 출간 제안을 해주신 출판사가 있어,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협의에 따라 연재하는 글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올리고자 합니다. 열심히 작업해서 조만간 좋은 책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말에 종종 나들이 가는 석촌호수 근처에 삼전도비라는 사적이 있어. 꽤 크고 위풍당당한 모습이, 뭔가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기록해 놓은 비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슬픈 역사가 새겨진 비석이야. 조선 시대에 중국의 만주 지역에 있던 여진족이 세운 신흥 강대국 청나라가 침략해 온 일이 있었어. 그때 조선이 항복하고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세운 비석이 바로 이 삼전도비야. 그래서 이 비석에는 청나라 황제를 칭송하는 글로 가득하단다. 그 내용을 조금만 살펴볼까?
‘황제께서 크나큰 인자함으로 은혜로운 말씀을 내려주시니, 열 줄로 내려주신 밝은 회답이 엄하고도 또한 따뜻하였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으나, 황제의 밝은 명령 있고 나서는 마치 잠에서 깬 듯하였네.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면서 서로 이끌고 귀순해오니, 위세가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또한 그 덕에 의지함일세.’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죽었고, 오랑캐라고 얕잡아보던 청나라 황제 앞에 임금이 9번이나 땅에 이마를 부딪치며 3번 절해야 했던 굴욕적인 항복. 그런데 이렇게 황제의 덕을 기리는 내용의 비문이라니, 참 기가 막히지? 이 글은 조선이 청나라에 바친 글이기 때문에, 조선의 신하가 썼던 글이야.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비문을 썼던 것일까. 오늘은 이 글을 쓴 주인공 이경석에 대해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의 국력은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 있었어, 당시 최강대국으로서 조선을 도와주었던 명나라 또한 전쟁의 여파로 힘을 급속히 잃고 있던 사이, 만주 지역의 여진족이 강대해지면서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운단다. 나중에 나라 이름이 청나라로 바뀌니까 편의상 청나라라고 얘기할게. 이때 조선 정부는 크게 두 가지 의견으로 갈리게 돼. 재조지은, 즉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명분론과, 두 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펴야 한다는 현실론이었지. 당시 임금님이었던 광해군은 현실론자였고,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 했단다. 하지만 성리학적 명분론과 ‘재조지은’의 논리가 뼛속 깊숙이 배어 있던 많은 유학자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신하들에 의해 쫓겨나게 돼. 이런 배경에서 다음 임금님이 된 인조는 철저히 친명정책, 즉 명나라만을 중시하는 정책을 편단다. 이것이 결국 청나라의 불만을 사게 되어, 두 차례 침략을 당하게 되지. 그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이야.
정묘호란 때는 청나라가 형님, 조선이 동생이 되기로 한 협약 덕분에 별다른 피해 없이 전쟁이 끝났어. 하지만 청나라의 압박이 점점 커지고 이제는 형제가 아닌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해오자, 조선의 명분론자들은 난리가 났어. 저 시건방진 오랑캐를 상대로 맞서 싸우자는 ‘척화론’이 크게 대두된 거야.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청나라가 조선의 왕자와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당장 압송하라고 요구하지만 거절당해. 결국 청나라는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 오는데,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야.
사실 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조선은 이기기 쉽지 않은 전쟁이었어. 많은 신하들은 도망가고, 인조도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 몇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고, 점차 남한산성은 고립되어 버린단다. 추운 겨울, 성안의 식량도 점점 떨어져 가지. 신하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일어나. 청나라에 항복을 하자는 ‘주화론’과 끝까지 맞서 싸우자는 ‘척화론’이 부딪친 거야. 앞에 놓인 선택지는 단 두 가지. 싸우다 죽을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그리고 마침내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게 돼.
앞서 얘기한 대로 청나라는 항복의 증표로 삼전도비를 세울 것을 요구해. 문제는 그 비석에 새겨질 글을 누가 쓸 것인가 라는 것이었어. 당대에 문장력이 가장 뛰어났던 인물 네 사람이 후보로 거론된단다. 이경석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어. 인조는 은밀히 그들에게 글을 써오라고 지시하지. 하지만 오랑캐라고 여기던 자들에게 항복을 한 것도 모자라, 그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큰 치욕이었을 거야. 한 사람은 병을 이유로, 한 사람은 일부러 글을 정말 엉망으로 써서 청나라에 보낼 수 없었고, 그나마 장유라는 사람과 이경석의 글만 채택되어 보내진 단다. 그들의 글 역시 억지로 대충 썼기 때문에 청나라의 질책을 받지만, 그나마 이경석의 글을 다시 수정해오는 조건으로 받아주기로 한단다.
이 비문은 조선이 청나라에 진심으로 항복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한 증거였기 때문에 청나라에게 중요했어. 제대로 써오지 않을 경우 인조의 왕위까지 아들에게 강제로 계승시키겠다는 협박까지 해. 마음에 차지 않으면 얼마든지 또 군사를 보내서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말이야. 인조는 마음이 급해졌을 거야. 이경석을 불러 삼전도비문에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으니, 글을 제대로 써 달라고 설득한단다. 이경석은 심한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당시는 자기 목숨보다 명분이 더 중요한 시대였어. 아무리 임금의 명이라지만, 명분을 버리고 오랑캐를 칭송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이었거든. 자신의 명예를 끝까지 지킬 것인가, 혹은 임금을 위해 명예를 버릴 것인가. 그리고 결국 이경석의 선택은 글을 쓰는 것이었어.
역시 이것 때문에 그는 많은 수모를 겪게 돼. 나중에 이경석이 대표적인 명분론자이자 후배였던 송시열에게 글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어. 사실 송시열은 이경석의 추천으로 관직에 발탁되었을 정도로, 원래 서로 친했었거든. 송시열이 선배인 이경석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거지. 그런데 그가 써준 말이 ‘수이강(壽而康)’이었어. 장수하면서 건강하다는 건데, 돌려 말하면 오랑캐에게 아부하는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며 비꼰 거야. 게다가 새로 왕이 된 효종이 복수를 꿈꾸며 몰래 군사력을 기르려고 하다가 청나라에 들킨 일이 있었어. 청나라는 효종의 지시였을 거라 의심하였고 자칫 제2의 병자호란이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거야. 이때 이경석이 나서서 임금이 아니라 자신이 혼자서 벌인 일이었다고 주장해. 이것 때문에 이경석은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송시열은 청나라에 아부했기 때문에 거기서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 ‘수이강’했다고 비꼰 거지. 자신들은 임금을 위해 어떤 희생도 제대로 한 것이 없는 자들이, 임금을 위해 희생해온 신하를 조롱하다니.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겠지만 이경석은 별달리 대꾸하지는 않아.
정작 그렇게 자신들이 옳다 여기고 명분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던 명분론자들은 말로만 청나라에 대해 복수를 떠들었을 뿐, 청나라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서 나라도, 임금도, 수많은 백성들도 지키지 못했어. 오히려 인조가 항복하자 더러운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많은 사람이 떠나 버렸지. 이들에게는 나라도 임금도 백성도 없었고, 오로지 자기 명예만 중요했던 거야. 그런 그들이 임금을 위해, 그리고 제2의 전쟁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명예를 버리면서까지 힘든 결정을 하고 행동에 옮긴 이경석을 조롱하고 비방한 것이란다. 하지만 임금님은 이경석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충성심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잊지 않았어. 그가 74살이 되자 임금님은 궤장을 선물로 줘. 궤장이란 나이가 일흔이 넘은 충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인데, 신하로서는 최고의 명예였어.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는데 ‘문(文)’이란 호칭은 선비에게 최고의 영광이었다고 하는구나. 거기에 임금에 대한 ‘충(忠)’이란 호칭까지 받았으니, 누가 진짜 나라를 위한 충신이었는지 임금님은 알고 있었던 거야.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대신, 임금과 백성들을 지키는 길을 택했던 이경석. 나중에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삼전도비문을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한탄하며 애초에 글 쓰는 법을 배우지 말걸 후회했다고 하는구나. 이경석이라 한들 그처럼 명예롭지 못한 일을 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단다. 다른 명분론자들처럼 청나라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입으로 외치는 것은 쉬운 일이었어. 정작 그들은 청나라에 맞설 힘을 기르기 위한 행동도, 그럴 의지도 없었는데도 말이야. 단지 자신이 명분에 맞게 입바른 말을 하는 사람임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경석도 그런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실천으로 옮긴단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 비록 이것 때문에 장차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임금과 백성을 청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야. 명분론자들은 비굴하게 청나라 황제를 칭송하는 '삼전도비문'을 쓴 이경석을 비난하고 조롱했지만, 병자호란으로 궁지에 몰렸던 임금을 지키고, 백성들을 살렸던 것은 명분론자들이 아니라 이경석의 그 '비굴한' 글이었음을 기억하자.
아들아, 세상에는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 물론 말을 잘한다는 건 결코 나쁜 일도 아니고, 오히려 살아가는데 중요한 능력 중의 하나야. 아빠는 네가 지혜롭고 조리 있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 하지만 말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것은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것이란다. 특히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오로지 자신의 사익과 명예만 중시하는 ‘명분론자’와 같은 사람은 되지 말거라. 아무리 좋은 말도, 그것이 타인 또는 공익을 위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인 거야.
그 명분론자들이 정작 실천도 못하면서, 계속 그런 주장을 했던 것은 왜 일까? 결국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와 성리학적 정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어. 만약 그들이 자기 명예나 사익보다 공익을 더 중요시했다면, 당장 어려움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해 무슨 행동을 할지 먼저 고민하지 않았을까? 바로 이경석처럼 말이야. 그러니 누군가를 사귀게 되면 그가 하는 말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남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는지, 그리고 자신의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인지 살펴보길 바란다. 사람의 진가는 결국 그의 말이 아닌 행동에서 드러난다고 아빠는 믿어.
아들아, 너 또한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되거라. 말로 자신을 증명하지 말고, 행동으로 네 주장을, 네 삶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거라. ‘무엇을 할 거야’라고 말하기보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오늘 아빠가 이야기해준 이경석의 삶처럼, 못 지킬 백 마디 말보다 용기 있게 한 번이라도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때로는 그것 때문에 당장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를 위한 떳떳한 행동이었다면, 반드시 그들도 언젠가 너의 행동이 옳았음을 알아줄 날이 올 거야. 마치 병자호란의 치욕을 기록하는 글을 써서 당시엔 비난받아야 했지만, 더 이상 병자호란의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던 이경석의 업적을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야. 우리 그렇게 당당하게 살도록 하자. 사랑한다,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