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少事煩(식소사번)

내가 일한 만큼 보상받는 삶

by 신동욱

食少事煩(식소사번)

-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다.


위나라 사마의와 촉나라 제갈량이 마지막으로 맞닥뜨렸던 오장원 전투. 전황이 불리했던 제갈량은 빨리 승부를 내고 싶었으나 사마의는 지구전으로 일관한다. 이때 제갈량이 싸움을 재촉하며 사마의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대뜸 사마의는 제갈량의 하루 식사량과 업무량을 묻는다. 식사량은 적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한다는 대답에, 사마의는 제갈량이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라 직감한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죽음을 맞았다.


늘 일복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자처하지만, 첫 직장을 다닐 때는 진짜 미친 듯이 일했었다. 아직 주52시간제도가 없던 시절인지라 한 달간 초과근무 시간만 100시간이 넘던 때가 많았다. 2022년 기준으로 휴일이 아닌 날이 248일이라 하니 여기에 8시간을 곱하고, 1년간 한 달에 대략 평균적으로 80시간 초과근무를 했다고 가정해보면 연 근무시간 약 3,000시간이 계산된다. 이때 인사팀에 불려 가 면담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날은 급하게 마무리지어야 하는 일에 쫓겨 점심을 걸러야 했다. 밥도 안 먹고 일하는 모습을 윗분이 보시고 나면, 나중에 선배가 와서 넌지시 말하곤 했다. 밥 거르고 일하는 거 윗분들 안 좋아하시니까 밥은 먹고 일하라고. 물론 나도 밥은 먹으며 일하고 싶었다. 다만 내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게 본질인데, 밥을 안 먹는 현상에만 관심을 갖는 게 야속했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면서 생긴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푸는 날이 많았기에, 먹는 게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 지금도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내 뱃살이 그 증거. 그래도 한 번씩 끼니까지 걸러가며 일하던 그때를 돌아보면 생각나는 고사성어가 있다. 食少事煩.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다. 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현대 직장인들의 애환이 이 고사성어 안에 고스란히 담긴 듯하다. 이 고사성어의 주인공 제갈량은 당대의 뛰어난 영웅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직장인 신세였을 뿐이구나 라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2018년에 주52시간제도가 도입된 지 4년이 지났지만, 한국인들의 근로시간은 여전히 매우 긴 축에 속한다. OECD에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인의 연간 근로시간은 1,928시간이다. 비교 대상인 주요 국가들 가운데 가장 길다. 독일, 네덜란드나 덴마크의 근로시간은 1,400시간 미만이고, 한국 다음으로 많이 일하는 미국도 1,802시간이다. (출처 : https://www.index.go.kr/unify/idx-info.do?idxCd=8064)


2022년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강도 높은 업무량에 시달리는 '食少事煩'의 나라다. 그런데 한편으로 주52시간제가 도입된 이후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삶의 질이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느낀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잔업수당이 줄어들면서 수입도 줄어든 탓이다. '事煩'은 줄었지만, '食少'는 더 심해졌다는 것. ‘저녁은 있게 되었지만 저녁밥 사 먹을 돈은 없는 삶’이 되었다는 말이 씁쓸하게 들린다.


이미 세계 1,2위를 다툴 만큼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노동자들의 나라 대한민국. 그럼에도 일을 정말 더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더 많이 일할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크다는 건,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주52시간 제도 폐지가 그 해결책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좀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는, 누구나 예외 없이 '신성한 노동'이라는 말에 걸맞게 자신이 일한 만큼 합당한 대우와 보상을 받고 있는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란 가장 기본적인 상식마저 무시되고 있지는 않은가?


事煩 하지 않더라도 食少 하지 않는 하루가 되길. 오늘 아침 출근길에 나선 모든 직장인들이 食少事煩하지 않고 충분히 행복한 하루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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