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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Oct 21. 2015

국어사전의 추억

어릴 적 받은 작은 친절에 관한 사연, 그리고..

서랍 속 글 4 - 2010년 8월 22일 작성


 방을 정리하다가 책장을 아래쪽까지 싹 훑었다. 그러다 문득, 누렇게 빛바랜 조그만 책에 시선이 갔다. 손을 뻗어 꺼냈다. '국어 소사전'. 추억의 물건이네. 이윽고 책 방향을 돌렸다. 아직도 선명한 표식이 남아있었다. 그때 그 친구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중고등학생 때 많이 썼던 국어사전. 낡고 바랬다. 초등학생 때 쓰던 소사전은 어딨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집에는 국어사전이 딱 두 권 있다. 한 권은 두산동아 제5판으로, 약간 두꺼운 것이고 한 권은 초등학생용으로, 다소 얇은 것이다. 지금은 두산동아 사전만 쓰기 때문에 초등생용 사전이 어디 있는지조차 잊어버렸지만, 다시 찾더라도 버릴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엔 '작은 친절'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몇 월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1학기 때였다. 국어시간 준비물로 초등생용 국어사전을 들고 갔다(지금이야 스마트폰이나 전자사전이 있지만, 그땐 전자사전이 무척 비싸고 희귀한 물건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초등생!)선생님은, 책을 읽고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라고 지시하셨다. 각자 짝과 함께 이를 수행했다.

 내 짝은 능수능란하게 필요한 단어를 척척 찾았다. 그러나 나는 버벅거리는데다가 사전에 없는 어휘도 많았기에 번번이 짝궁의 사전을 빌렸다. 하루는 이 친구가, 약간 답답하다는 듯한 손짓을 했다. 그러고는 내 사전을 건네달라고 했다. 받아들고서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 애는 대뜸 "글자가 없네. 이러니 못 찾지!"라고 말했다. 글자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멀뚱히 바라봤더니, 책 오른편을 가리켰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사전들은 그 부분에 ㄱㄴㄷ~ㅎ의 '색인'이 새겨져 있었으나 내 것은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색인'이 없어서 쩔쩔 메다.

 "표시해. 그럼 훨씬 찾기 쉬울 거야."

 그러나 제대로 표기할 자신이 없어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머뭇거리는 모양새를 잠깐 쳐다보던 그 애는 이내 자기가 해주겠다며 보라색 사인펜을 들었다. 뒤이어 사전을 넘기며 각 글자의 경계를 꼼꼼하게 확인한 뒤 세심하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겨주었다. 귀찮아서 대충 할법도 한데, 마치 자기 사전처럼 소중히 다루며 깨끗히 표시했다. 11살의 나는 그 순간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당시만 해도, 시간이 꽤 흐른 지금까지 기억할진 몰랐지만.



 얼마 전 일이다. 자정 무렵, 웬일로 진동이 여러 차례 울렸다. 처음엔 전화인줄 알았는데, 다가가서 보니 문자가 연달아 세 통이 와있었다. 연락하기 힘든 사람에게서 오랜만에 온 문자였다. 80바이트가 모자라서 240바이트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이 밤에?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문자수신함을 확인했다. 천천히 다 읽고 나서, 남몰래 살며시 미소지었다. 뒤이어 감사했다. 뿌듯했다. 3개짜리 문자는 '이 감성 터지는 밤에 네가 작년 생일에 준 편지를 다시 꺼내' 읽고는, '따스한 언어에 감동 받아 울었다'는 내용이었다. '꼬마녀석 제법이야.'라는 어른의 말도 덧붙여서.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사진을 찾아냈다. 그 분이 올렸던 사진. 직접 만든 CD와, 편지를 줬었구나.

 솔직히 편지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고마움과 존중하는 마음을 담뿍 담아 정성스레 썼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마음이 기억했다(실은 편지 쓸 때 대부분이 그렇다. 내용은 그저 도구에 불과할 뿐, 진짜는 마음을 최대한 전달하는 데 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상대도 가능한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아마 국어사전을 표기해준 그 친구는, 자기가 그랬었는지, 또 내가 지금까지 그걸 기억하며 고마워하고 있을지 전혀 모르고 있을 거다. 마치 내가 편지를 보낸 뒤 구체적인 건 잊고 지냈던 것처럼. 두 가지 경험을 교차해서 생각하니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받은 친절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거나 감사하고 있나? 그리고 타인에게 얼마나 친절을 베풀었는지?

둘 다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점차 많아졌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함과 호의를 많이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면, 그건 우리네 사회가, 우리의 삶이, 조금 더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는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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