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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Dec 08. 2015

어머니의 작은 소원

세 번째 편지 - 초로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가. 밥은 잘 챙겨먹니?

 아이구, 미안해. 또 이러는구나. '아가'라는 말이 입에 붙어서. 그래도 애미한테는 이 호칭을 좀 용납해주면 좋겠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너는 장성한 어른이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어린 아기로 보이는구나. 젖 먹이고, 냄새나는 똥기저귀 갈아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시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온 우리는, 알 턱이 없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겠구나. 그분은 우리와 줄곧 함께 하고 계셨을 테니.


이렇게 작던 아기가 어느새.

 그토록 작고 귀엽던 내 새끼, 내 핏덩이는 어느 샌가 어엿한 어른이 되어 한 가정을 책임지게 되었구나. 허허, 세월이란 참. 네가 없는 적적한 집 안에서, 좀처럼 들춰보질 않았던 앨범을 펴놓고 잠시 상념에 잠겨보네. 네 아비는 잔다. 이 모습을 보면, 다 늙어서 웬 청승이냐고 꾸짖으면서도 살며시 옆에 앉아 도록(圖錄)을 함께 넘길 그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나 나누련만. 굳이 깨우진 않을란다. 십 수 년을 같이 산 부부지만, 때론 홀로 간직하고픈 순간과 시간이 있다(너도 시간이 지나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삶으로 깨닫게 될 게야).


 그러고 보니 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구나. 첫눈에 반해 조심스레 쫓아다녔던 네 아버지 따라 멋모르고 결혼했던 게 이십대 초반, 지금의 너보다 훨씬 어릴 때였지. 처음엔 그저 훤칠하고 멋진 몸, 낭랑한 목소리에 반해서 쫓아다녔고, 나중엔 네 아비 성품에 매료되어 조금씩 나를 열어갔단다. 결혼할 무렵에는 ‘아, 꼭 이 사람 곁에 함께해야겠구나.’하는 심정이었지. 곧 환상에서 깨어났고 너무 일찍 결혼한 걸 후회했지만, 이미 너를 가진 뒤였지. 한동안 어쩔 수 없이 살다가, 마음이 바뀌었다. 내 못난 모습도 어떻게든 이해하고 품으려는 네 아버지의 노력이 참 고마웠거든. 바꿔 생각하면 그이도 내 모습에 많이 실망했을 텐데 말이다. 여전히 가끔은 웬수같다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아들. 이 애미가 표현이 서툴러서 그동안 미뤄두고 억눌렀던 이야기를, 이제야 적어 보낸다. “잘 자라줘서 고맙다.” 참 건강하고 씩씩하게, 부모 속 썩이는 일도 거의 없이 올곧게 잘 자라주었다. 네가 분가(分家)하고 더 이상 곁에 없으니 그제야 소회(素懷)가 밀려오는구나. 곁에 있을 때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적적함이구나.

 인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갈 우리 아들. 고생길이 훤히 보인다만 그게 우리 인생이고, 나와 네 아버지가 부대끼며 걸어온 여정이야. 힘들고 다 포기하고 싶고, 견딜 수 없을 순간이 숱하게 널 덮쳐올 거다. 하지만 아들아. 어떤 사람의 말처럼, 흔들리며 피는 꽃이 더 아름다운 법. 너는 결혼을 앞두고 때때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부부 같이 사랑하며 살 수 있느냐’고. 그런데 우리 부부 같은 게 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지금도 많이 싸우고 부딪히는데.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선한 가치'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고생이 없었다면, 평탄하게 살며 너를 키웠다면, 느이 아버지와 내가 지금까지도 계속 같이 살고 있을지, 또 이렇게 늠름하게 아들녀석을 잘 키워냈을지 자신할 수 없어요.


 확신하건대 우리 가족은 사랑, 나눔 등의 '선한 가치'를 추구하려고 애썼고, 그 가운데서 겪는 고난이 우리 모두를 성숙하게 했다. 길고 긴 세월을 휘돌아보니 역경과 아픔이 다아 축복이고 선물이었음을, 초로의 늙은이는 다시 깨닫고 있다.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 깨달았는데, 요즘 부쩍 자주 읽는 성경에 이미 이런 말이 있더구나.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장 3~4절)


너에게 삶으로 보여준 자랑스러운 유산, "선한 가치의 추구"

 평생을 역경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선한 가치. 예를 들어 사랑, 헌신 등을 추구하며 살아오려 애썼던 우리의 삶. 그거 하나는 우리가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산 중 하나란다. 바야흐로 네가 슬하를 떠난 지금, 환란, 인내, 연단, 소망 이런 열매의 가장 큰 수혜자가 너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과 빚진 마음을 함께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남아있을 뿐.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베풀며 살기를. 명심하거라.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피는 돌고 돌아야 생명력이 있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아가. 애미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이따금씩 전화 한 번만 해다오.

 요즘 젊은 애들 바쁜 거 안다. 밤늦게까지 야근은 일상이고, 주말엔 피곤하니 자야지. 친구들 만나기는 좀 어렵겠니? 그리고 신혼이니 색시랑 알콩달콩 시간 보내랴, 집안일 하랴, 나중엔 애도 봐야 할 거고. 이렇게 저렇게 바쁘더라도, 문득 생각날 때 편하게 전화해주었으면 좋겠구나.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혹은 택시 안에서. 걷다가. 아니면 친구들 만나 한 잔 하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하면 어떻겠느냐구? 그건 용기가 안 나. 얼마 전에 네가 ‘최신폰’으로 핸드폰을 바꿔줬었지. 조금만 배우면 금방 한다면서 가르쳐주기도 하고. 하지만 아서라. 말이 쉽지. 기계 다루기 무서워서 밥솥이랑 가스불도 겨우 켜고 끄는데. 최신 전화기는 오죽하겠니? 게다가 네가 회의 중이면 어떡하니? 상사와 술자리 하고 있으면? 전화 못 받으면 무슨 일 있는 건가 싶어 걱정할 거고.. 그냥 네가 전화해주는 게 이 애미 건강에도 좋을 것 같아. 못자란 가슴 졸이느니.. 너도 알다시피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편이니까.

 전화 못 받을 일은 없을 게다. 요새는 잠귀도 밝아지는 바람에 네 아버지 뒤척이는 소리에도 잠을 깨곤 하니깐. 네 빈자리가 생긴 뒤에는 더 자주 깬다.

 아들아, 너무 괘념치는 말아라. 십 수 년 같이 살다가 헤어졌는데 당연히 허전하지. 뱃속에서부터 함께 했던 사랑스러운 존재와 헤어졌는데 당연하지. 그렇고말고.    

 

 아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건강이 최고다. 밥 잘 챙겨먹고, 또 전화도 주고.. 그래. 그랬으면 좋겠구나. 세월이 언제 이리 흘렀는지.. 내 마음속에선 아직도 작은 아이인데. 늙은이의 청승맞은 감상이라 생각하면서도, 부모된 자의 마음이 다 이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 나도 느이 조부모님으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듣곤 했으니. 이제야 그분들을 이해하게 됐구나.

엄마는 그저 네 행복 하나만 바라고 기도할 뿐. 이제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제아무리 바빠도 이따금씩 전화 한 번만 해다오. 어미의 작은 소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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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1번 -  http://girlwhothinks.com/

2번 - http://www.wallpaperup.com/ 

3번 - http://www.thebest.gr/

표지 및 마지막 - https://goodfridayblues.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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