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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Nov 24. 2015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당신께 보내는 편지

마음속 붉은 꽃 한 송이

 "花無十日紅"

 오늘,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를 따라 걷다가, 투박한 현판을 마주했어요.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봤어요. 현판이 걸린 가게 안에, 왠지 당신이 있을 것만 같아 다급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거기 없었어요. 다만 중년 남자 한 분이 나지막이 “어서오세요”라고 환영해주었을 뿐.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했던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거기에 머무르기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보내지 못할 편지를 써요.



 인연이란 참 신기합니다. 당신이란 사람이, 또 나라는 사람이 서로 만나기 전에는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 당신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만나 내가 알아왔던 세계가 흔들리는 기적을 경험했어요. 흔히 영화나 극에서 화자되는 격동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당신은 나를 흔들었어요. 지진처럼 한순간에 급 변한 게 아니라, 낙숫물이 바위를 변화시키듯, 그렇게 천천히 말이에요.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당신께서는 식물을 참 좋아했습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제 한 자리 지키고 뿌리내린 그 모습이, 참 닮고 싶다고. 지나가다 마음을 끄는 식물을 발견하면, 두툼한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줄기나 잎을 쓸어 올리곤 하던 당신. 마치 사랑하는 이의 몸을 더듬듯, 그렇게 세심했어요. 왜 그렇게 조심스럽냐는 질문엔, “잘못하면 이 두툼한 손이 해칠까봐.” 머쓱한 웃음을 짓곤 했던 당신.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때묻지 않은 미소가 생생하게 제 눈동자에 고여요.


 당신은 화초(花草)를 유독 좋아했죠. 그 때문에 꽃 이름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어쩌다 한 번 같이 길을 걸으면, 이건 무슨 꽃, 저건 무슨 꽃, 하면서 해맑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꽃에 얽힌 사연까지도 나누어줬어요. 그래서일까. 제아무리 긴 꽃길이라도 당신과 함께 걸으면 그렇게 짧을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걸을 때는 너무나 긴데.. 왜 그런지를 몰랐지만요.

 그리고 당신 곁에서 걸으면, 내가 너무나 작게 느껴졌어요. 길도 크게 느껴졌죠.

 당신은 언제나 꽃 이야기 뒤에 “화무십일홍”이란 말을 덧붙이곤 했어요. 열흘 붉은 꽃은 없다면서.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언젠가 찬란함은 퇴색되고, 시들어 사라져버린다고. 그래서 순간의 아름다움보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고 싶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영원함’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땐 왜 그랬는지 몰랐어요.


 어느 날 당신은 내게 화분을 주었습니다. 흙에다 “花無十日紅”이 새겨진 작은 팻말을 꽂아서.

 “초롱꽃이에요. 예쁘죠?
고민 많이 했어요. 마음에 들었으면.
그리고 이건, 좋아하는 말이라고 해서 준비해봤어요. 고마워요.”

 은방울꽃이라고도 하는 그 꽃. '감사'와 '성실'이라는 꽃말을 지닌 꽃. 다른 꽃들과 다르게 꽃망울을 푹 숙이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어요. 겸손함을 느낄 수 있어서. 꼭 당신 같아서. 나는 꽃이 그토록 찬란할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깨달았어요. 동시에, 내 마음에 붉은 꽃 한 송이가 피어올랐습니다. 아름다운 홍색 꽃 한 송이가.     


작별인사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당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개화(開花)의 기쁨도 잠시, 당신께서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동료와 주변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어요. 처음으로 당신께 서운했습니다. 하염없이 원망스러웠고 화가 났습니다. 떠나기 전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할 때, 크게 따져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하지만 막상 당신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화내지 못했어요. 대신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휘청거렸고.. 당신은 식물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그 손길로 내 등을 쓸어주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당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하지 못한 작별인사를 머금은 채.

     


그리고 참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길거리에서 마주한 현판이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은 없다. 당신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아요. 그때 받았던 찬란한 은방울꽃은 다 시들고, 황량함만 길게 남았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이나마 아름답게 핀 그 추억만으로도, 나는 행복할 수 있어요.     


 나는 사랑이 뭔지 몰랐어요. 왜 당신 곁에 서면 작아지는지, 왜 영원함을 생각하게 되는지, 몰랐어요.

그치만 이젠 알 것 같아요.

이제 마음속 홍(紅)색 꽃은 지고 없어요.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요.

하지만 붉디붉은 꽃 한 송이가 피었다가 졌다는 사실은,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남아있을 거예요.


당신과의 추억처럼..


오래도록 머금었던 못다한 말을, 이제야 전합니다.

고마워요, 내게 사랑을 알려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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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미지 출처: https://pixabay.com/(이하는 작가명)

표지, 4,5번 사진: Adina Voicu

1번 사진: littlepepper

2번 사진: gws2020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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