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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Jan 30. 2016

나, 그리고 김 빠진 탄산수

슬럼프인 나를 응원하려는 독백.

 새해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가, 새로운 메뉴가 나왔다기에 호기심에 주문했다. 신년 이벤트라면서 햄버거 세트 말고도, 탄산수 한 병이 딸려 나왔다. 나는 탄산수를 그리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으므로 가방에 넣어두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글쓰기 작업을 하다가 목마르면 한 두 모금씩 마실 요령으로.

 처음 마셨던 순간을 기억한다. 옮겨오면서 받은 충격으로 터져나왔던 첫 개봉. 다 닦아내고서 입을 댔을 때 코끝을 간질였던 레몬향. 물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맛도 없는 것이, '정말 탄산수다.'라는 첫인상.

 첫 모금과 함께, 쓰다 만 글을 적었던 것 같다. 불분명한 기억이지만, 그랬으리라 확신한다.


이리저리 바빴던 1월.

 방학을 한지 한 달. 월초에야 신년회다, 이런저런 행사다 해서 바빴고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을 정도로. 그렇게 숨가쁘게 달려오다가 문득, 가만히 멈춰섰다. 멈춰 선지 약 4일. 늘 하던 것들은 충실히 하되, 소위 말하는 '안 하던 행동'을 하지는 않고 있다. 잠시 정체 되어 있는 상태. 불안하지도, 답답하지도 않다. 그저 무덤덤하다. 특히 가슴이 말이다.


 평소 예민하게 감지하던 희로애락의 감정도, 과거 현재 미래가 얼기설기 얽힌 감성도, 기어이 한 편의 글이 되어야 해갈되었던 마음속 소용돌이도, 어째선지 고요하다. 소식이 없다. 외로움 많이 타고, 감수성이 무척이나 예민한 나로서는, '아, 이게 보통 사람들이 평소에 느끼는 상태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난 대체로 항상, 가슴속에 불덩이 같은 게 돌아다녔으므로. 그 덕에 열심히 살고, 썼다. 불덩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프니까. 없어지기를 늘 기도했었는데, 요즘엔 막상 없어지니 도리어 기묘하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 계획을 세우고, 읽을거리들을 읽다가, 뭔가 생각나면 메모하거나 짧은 글을 쓴다. 점심을 먹고, 얼마 안 있어 기도회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다. 그러고는 무엇인가 한다. 무엇이 무엇인지는 매일매일 바뀌는데, 대체로 일기를 쓴다. 사실은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이 잘 써지지 않아서 혼자 보는 일기를 더 많이 쓴다. 최근엔. 다른 활동을 할 의욕과 여유가 많이 사라져도, 여전히 읽고 쓰기는 계속 하고 있다니.


뜨듯미지근한 탄산수에서, 요즘의 나를 본다.

  이 글을 쓰다 말고 옆에 있는, 김 다 빠진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신다.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도통 모를, 그렇지만 공짜로 받았기에 심심하면 한 두 모금씩 마시게 되는. 마실 때마다 생각한다. '싱거운 녀석!' 시럽 맛에 너무 길들여진 나에게, 탄산수 맛은 참 밋밋하고 어색하다. 반면에 또한, 익숙하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낯선 이의 얼굴에서 아는 사람을 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왜 이 녀석을 곁에 두고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생각해본다. 병의 모양이 마음에 들어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표면에 새겨진 표시, '레몬향 함유'. 마실 때마다 코끝에 살짝 남는 레몬의 체취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짧은 거리지만 물을 뜨러 가기 귀찮아서 그럴 수도 있고, 작업하다가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아서.. 등등.

나도 잘 모르겠다. 불가사의하다. 한 달 전부터 책상 위에 있었고, 심지어 처음에 열 때 탄산이 터지는 바람에 많은 양을 흘렸는데. 그리고 초기의 강렬했던 레몬향은 거의 다 빠지고, 코끝에만 남았다. 그런데도 아직 내용물이 남아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지만.

 가슴도 메마르고 글감도 없는데 왜 계속 글을 쓰려 할까. 모르겠다. 그냥 늘 하던 습관이라 그럴 수도 있고, 건조한 상태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고, 어떤 희망을 품고 있을 수도 있고.. 딱히 이유가 있어야 할까?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이 시시껄렁한 탄산수에서 내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한 달을 다시 한 번 회상해본다. 작년 끝자락에서부터 지금까지를.

 유례 없이 격했으며 질질 늘어지듯 마무리된 지난 학기. 그 시간에 대해 작별인사를 할 무렵이 '한 달 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방학. 새로운 꿈에 부풀어 총기 어렸던 눈빛과, 당찬 포부로 가득했던 마음을 회상해본다. 뚜껑을 열자마자 탄산이 터져 사방에 흩뿌려진 듯했던, 시작을 되짚어본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격하고 매섭게 몰아쳤던 때를 기억해본다. 탄산수를 마신 처음 몇 번은 강렬한 레몬향이 늘 코끝에 남아있던 듯한 그 시기를.

 그리고 요즘의 나를 되돌아본다. 언제였던가 싶을 만큼 무뎌진 나를 본다. 아아.. 왜 이러지. 왜 이러지. 중얼거리며 물끄러미 책상 위의 탄산수 병을 본다. "꼭 내 모습 같네." 뚜껑을 열자마자 넘쳐오르던 그 패기와, 코를 시큰하게 만들었던 레몬향, 목을 간질이던 청량감은 어디 간 걸까. 그리고 나는 어디 간 걸까.

 하지만 조급하게 굴지는 않으련다. 이번 슬럼프는 다른 때에 비해 마뜩잖지만, 동시에 내 상태를 제대로 직면하게 만들고 있다. 머릿속과 마음속을 시원하게 갈아엎고 싶다. 익숙한 감동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탄산수를 다시 본다. 탄산이 거의 다 빠진 채 병 바닥에 간신히 고여 있다. 그러나 위태로울 뿐이지, 아직도 기포가 살아있다. 이내 손을 뻗어 다 마셔버렸다. 제아무리 미지근해도, 어쨌든 탄산수는 탄산수였다. 물이나 주스의 맛이 아니었으므로.

고개를 돌려 컴퓨터 화면에 비친 나를 본다. 전원을 켜고 워드를 실행했다. 백지에 커서가 깜빡인다. 손가락을 쥐었다폈다 하고 이내 무엇인가 쓰기 시작한다. 그래, 너 글쟁이라는 거냐. 중얼거렸다. 피식, 절로 너털웃음이 나온다. 힘주어 말해본다.

"포기하지 말자." 그래. 써보는 거다. 잘 안 돼도 일단 써보는 거다.


화면 속 백지는 이내 검은 글자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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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표지 및 마지막: https://en.wikipedia.org/wiki/

https://pixabay.com

1번: by markus53

2번: by bil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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