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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Mar 01. 2016

'손글'을 생각하다.

감정을, 마음을, 사람을 담는.

사각사각. 슥슥.


오랜만에 컴퓨터 워드 화면이 아닌, 종이 위에 손으로 글을 쓴다. 손글.

 대개는 펜으로 쓰지만,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한다. 샤프로, 연필로, 만년필로.. 무엇을 택하든 종이 위를 가로질러 흐른다. 생각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 있고, 필기구는 손 안에서 이를 열심히 좇는다. 생각이 뻗어간 지점까지 닿기 위한 달리기. 그 길 위엔 발자국 대신 글씨가 이모저모 남는다. 이내 손아귀가 아려오고, 조금 더 견디다 손을 좍 펴며 펜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참았던 깊은 숨을 하아- 내쉰다. 느린 수고를 잠시 쉬고 있자니, 문득 작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생각이 거대하게 밀려왔다. 나 참, 못 말린다니까. 픽 미소 지으며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년, 시월.

우연히 접한 흥미로운 뉴스.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을 허우적거리다가, ‘손글씨 못 쓰는 디지털 세대’(*링크)라는 뉴스를 봤다. 나도 예전엔, 아니 지금까지도 ‘글씨를 잘 쓴다’는 말보다는 ‘좀 신경 써서 잘 써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에, 쓰면 얼마나 못 쓸까 싶어 즐겁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클릭해서 영상과 본문을 보았다.

 너그러운 미소는 이내 갸우뚱 하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뀌었고, 뉴스가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심각하고 놀라운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악필(惡筆)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디지털 기기 사용. 어렸을 적부터 디지털이 손수 하는 필기를 대신하다보니 손힘이 약해지고, 그러면서 악필이 늘고 정도도 점차 심해진다고. 기분이 참 묘했다. 학교 다닐 때 필기 때문에 자주 고생했는데.


 나는 남들에 비해 손이 많이 느린 편이다. 수업시간에 노트필기를 하다가 선생님이 ‘아직 다 못 적은 사람?’ 하면 으레 번쩍 손을 들었다. 외국어 수업 때 받아쓰기를 하면 못 알아들어 못 적기보다는, 불러주는 걸 손이 따라가질 못해서 틀릴 때가 많았다. 또 학교나 학원에서 어쩌다 반 전체가 시험을 크게 망치면 ‘깜지’(종이가 까매지도록 빽빽하게 단어 등을 적는 일)를 했는데, 거의 항상 친구들이 다 가고 나서도 남았다. ‘깜지’가 무의미하고 진절머리 나게 비효율적인 방법이라 싫어했음은 차차하더라도 말이다.

 깜지를 다 하지 못해 홀로 남았을 때, 내가 게을러서 다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선생님들은 핀잔을 주며 지켜보시다가 두 가지를 깨닫고 해방시켜주셨다. 하나는, 내가 꾀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쓴다는 점. 그래서 알게 되는 또 다른 하나는, 얘는 손이 많이 느리다는 사실. 한때는 ‘내가 손이 느리다고? 느려봤자 얼마나 느린데?’라고 생각했었으나, 오랜 시간에 걸쳐 같은 상황을 빈번하게 겪다보니 생각을 고치고 인정하게 되었다. ‘난 손이 느리다’고.

 뉴스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들고 다니면서 필기를 대신할만한 디지털기기가 희귀하고 비싼 시절에 초중고를 나온 걸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애석하게 여겨야 할까?’ 한때는 오락가락했으나, 이제는 확실하게 답한다.

"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대에 태어난 걸 늘 감사하게 여긴다."

 처음으로 글자와 글씨, 글을 배울 무렵은 연필이나 샤프 등을 이용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쓰는 방법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시대였다. 물론 그때도 ‘디지털 입력’은 존재했겠지만, 아직 학교현장까지 깊이 보급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아날로그로의 교육이 당연했던 시대. 그런 시대 속에서 나는 어린시절을 보냈고, 글자와 글씨를, 글을 배웠다. 불편하고 느렸고 번거로웠지만, 돌이켜보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를 체득한 뒤 글을 쓰기 시작한 지금은 디지털 입력이 널리 보급된 후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으니, 더욱 더 감사하다.



 나는 거의 모든 글은 컴퓨터로 쓰고, 컴퓨터로 퇴고하고, 컴퓨터로 완성한다(요즘 그렇지 않은 사람 찾기도 힘들겠지만.).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시간도 노력도 덜 들고 여러모로 편리하다. 오히려 ‘손글’만 고집한다면, 구시대 발상이리라.

 그런 반면, 전적으로 컴퓨터에 의존하는 건 또 아니다: 글감이 떠오르면 갈무리해두는 ‘글감노트’는 100% 손으로 쓴다. 글 내용을 좀 더 확장시키고 싶어 구상할 때도 손으로 쓰거나 그린다. 나아가 이따금씩, 이면지를 꺼내 굳이 손으로 쓸 때도 있다(보통 조금 쓰다가 답답해서 컴퓨터로 이어가지만.). 어쨌든 뭔가 차분하게, 또 깊이 생각하고 싶을 땐 늘 손으로 글을 쓴다(대개 일기가 그렇다. ‘손일기장’이라는, 제목 그대로 손으로만 쓰는 일기장이 있을 정도니 말 다했지.).

 글 초입에 묘사했듯 손으로 글을 쓰는 작업은 '앞서가지 못할 달리기'다. 생각은 계속 뻗어나가고 마음은 저만치 앞서는데, 손과 펜은 아직 여기에 묶여 있다. 간혹 닥치는대로 무엇이든 써보는 행동을 통해 글이 태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승리감도 잠시, 이내 생각의 격류(激流)가 매섭게 들이친다. 만족감이 무색하게, 또다시 '앞서가지 못할 달리기'가 시작된다. 반복. 반복.


  이런 비극 아닌 비극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따금씩 손글을 쓴다. 왜냐하면, 손글쓰기만이 주는 유익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 쓸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다.
 먼저는 ‘느림의 아름다움’을 꼽고 싶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뒤집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연구결과와 수십 수백 가지의 신제품이 쏟아진다. 세상이 너무나도 빨리 변하기에, 그 흐름을 최소한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될 것 같은 시대. 그래서 뭐든지 빨라야 하고. 우리나라는 더더욱 그렇다. 아예 ‘빨리빨리’가 국민정서이지 않은가. 하지만 손글쓰기는 느리다. 제아무리 빨리 쓰려 해도 한계가 있고, 가면 갈수록 속도는 떨어진다. 종종 손을 풀기 위해 쉬기도 해야 한다. 자연스레 여유를 가지고 글 내용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고유성’이 있다.

손글씨는 비슷할지언정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정자로 또박또박 깨끗하게 잘 쓴 사람들의 글씨를 보아도, 자세히 읽다보면 사람마다 획이나 받침에서 각자의 개성이 미묘하고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성격까지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내가 아는 것 이외에도, 더 많은 정보가 손글씨 안에 담겨 있다(글씨를 연구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정보를 읽어내는 ‘필적학’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손글에는 ‘감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끔 누군가에게 써주었던 손편지나, ‘손일기장’을 다시 보곤 하는데,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바로 느끼게 된다. 기록된 내용 이상의, ‘감정’을. 글씨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문단과 수정부호 하나하나에 새겨진 마음을.

 글자와 단어 그리고 문장이 의미하는 객관적 의미는, 그걸 독해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다 이해한다. 뜻이 전달된다. 글 자체에서 오는 행간의 의미, 글쓴이의 의도까지도 충실히 전달 가능하다. 오타가 아닌 이상 글씨 때문에 왜곡, 와전될 일이 없다. 디지털은, 그런 점에서 최적이다.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왜 문장과 문장 사이의 띄어쓰기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지, 어느 문장의 마침표는 잉크가 꽉 눌려 번져 있는지. 왜 이 문장은 휘갈겨 썼는지, 어느 부분에서는 글씨가 작다 못해 쪼그라드는지, 어느 부분에서는 썼다 지웠다 하는 흔적이 엿보이는지, 손수 글씨를 하나하나 아로새기는 모든 과정, 모든 시간 사이사이에 어떤 생각을 했을지.. 디지털은 담아내지 못한다.

 이는 감정의 영역, 다시 말해 사람 고유의 영역이다. 손글은 감정을, 사람을 담아낸다.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더 깊이. 더 세밀하게. 더 세심하게.



 내게 손글 쓰기는 정말 불편하고 어렵고 힘들다. 생각이 복잡하고 많으며, 손도 느리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나 내가 왜 글을 쓰는지를 생각하고, 그 고민 끝에 쓴 글이 어디에 가서 닿고 어떻게 열매맺기를 바라는지 생각한다면? 궁극적으로 뭘 하고 싶은 건지 생각한다면?

 손글 쓰기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가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워드로 이 글을 마치고 나서는, 쓰던 손글을 마저 이어가야겠다.


베를린, 1936년

 손수 적는 글씨와 글이 내 마음에 닿고, 당신의 마음에 닿고, 나와 당신을 이어주기를.

그렇게 우리가 좀 더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기를 바라며..


사각사각. 서걱서걱.

종이 위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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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표지 및 마지막: https://www.flickr.com by "simpleinsomnia"

2번: https://pixabay.com by "Unsplash"

3번: https://www.flickr.com by "erinkohl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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