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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Feb 15. 2016

초심(初心)을 마주하다

두 마디 말, 그 속에서 직면한 내 마음

 워드를 켰다. 커다랗게 뻗은 백지와, 깜빡이는 커서. 뭔가 적고 싶어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머릿속이 꿉꿉하다. 문장은 어떻게든 이어나가지만, 감성이 잘 안 풀린다. 맺히는 건 있지만, 원하는 흐름과 개연성이 없다. 쓴 글은 많은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가만히 갈무리해둔 게 점점 늘어간다. 한숨과 함께 컴퓨터를 껐다. 후우. 잘 안 풀리네..



 이런 말씀 조심스럽지만, 널리 알려지면서 너무 사람들을 의식하시는 건 아닐지.

 공동체에서 ‘요즘 글이 안 써진다.’는 사연을 나누자, 길고도 짧은 시간동안 나를 봐왔던 동생이 내게 조심스럽게 건넨 말이었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전에 말씀하신 ‘초심’을
되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나는 그저 하하, 웃기만 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던 까닭이다.     



 다시 컴퓨터 앞. 오늘 하루를 반추하다가 문득 그 친구의 말에서 생각이 멎었다. ‘사람들을 의식한다.’ 당연하지. 혼자 볼 거였으면 일기장에 간직하지,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 쓸 리가 없잖은가. 글이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읽혀야 한다. 제아무리 빼어난 명문(名文)인들 읽는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읽는 사람이 없는데 영향이나 감동을 받을 사람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작가는 필연적으로 독자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독자 또한 작품의 참여자로,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소통하는 까닭이고.. 미주알고주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는 내 나름대로의 훌륭한 논리를 완성해갔다. ‘논리의 산’ 위에서 나는 내가 쌓은 누각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논리의 산’을 내려와 ‘누각’을 뒤로 한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형언하기 어려운 미소를 함께 지으면서. 초심(初心)이라는 말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글에 대한 내 첫 마음과 첫사랑은 어땠더라.. 눈을 지그시 감고 글과 처음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글과의 첫 만남, 열 여섯.

 때는 열 여섯, 중학교 3학년.

 어릴 적부터 감수성이 풍부하고 외로움을 많이 탔던 나는,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며 외로움을 해결할 요소들을 계속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책을 읽을 때 마음이 진정된다는 걸 깨달았다. 더 나아가 글을 쓸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학(文學)!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생각만 해도 설렜다. 그래서 한동안 열심히 읽고 쓰다가 9월의 어느 날, 결심한다. 작가가 되기로.

 들뜬 마음을 다스리며 집에 와서 내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원고지 찾기'였다. 평소엔 백일장 때나 겨우 썼지만, 이제 나는 작가가 될 거니까. 모름지기 작가라면 원고지에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한참을 뒤적거렸을까. 마침내 원고지를 발견했고, 활기차게 펴서 책상 위에 놓았다. 가장 애용하던 샤프를 꺼내어 손에 쥐고, 책상 앞에 앉았다. 첫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그때 그 첫 마음을, 잊지 못하리..

 그 순간, 엄청난 희열이 찾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내 마음속에 한 어린아이가 들어와 뛰놀기 시작했다.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해맑게, 온몸으로 즐거워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 절절하게 다가오는 그 느낌. 결코 잊지 못하리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스스로에게, 친구들에게, 낯선 이들에게, 이 세상에, 미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썼다. 독자를 배제할 수는 없었으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털어놓는 게 글을 쓰는 가장 큰 목적이자 즐거움이었다. 그게 글에 대한 첫사랑이자 첫 마음이었다. 初心.


 그랬다. 처음엔 그저 쓰고 나누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고, 남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나를 표현할 뿐이었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고민은 항상 있었으나 ‘내 글끼리의 비교의식’은 없었다. 남이 쓴 좋은 글을 보면 감탄하고 또 내심 질투하긴 했어도, 초조해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다. 성장에 대한 강박감 때문에 내 글에서도 우열을 나누기 시작했고, 남의 좋은 글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일이 늘었다. 이제는 글쓰기 자체의 즐거움보다, 어떻게 하면 글을 통해서 더 많은 것들(예를 들면 명성이나 칭찬 등)을 얻을 수 있나 계산하는 나를 본다. 본질에서 멀어지는 나를 본다.

 결국 동생 말이 맞았던 거다. 초심을 되찾으라는. 그래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부끄러웠던 거다. 어느 순간부터 가슴 깊숙이 퍼지는 ‘울림’을 무시한 채 꾸역꾸역 글을 쓰려 하는 내 모습을 마주했기에.


글에 대한 첫 마음, 첫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글과 처음 만난 그날, 내 속에서 해맑게 뛰놀던 어린아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기뻐했던 느낌을 고스란히 되새겨본다.


 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 첫 마음. 첫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변질시키지 않고, 오염시키지 않고. 그러기가 결코 녹록치는 않겠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성찰하며 애쓰다보면 어느 샌가 성숙해져 있으리라. 아주 건강하게. 지금껏 잘 자라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성숙해가리라.


 초심을 잃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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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표지: "Quiet time" by Leland Francisco(flickr.com)

1번: Photo by designatic(Pixabay.com)

2번: "Writing" by Vassllls(flickr.com)

3번: Photo by ikon(Pixabay.com)

4번: Photo by PublicDomainPicture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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