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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Apr 18. 2016

설렘, 봄날의 꽃잎

내가 잃어버렸던 것

 무신경하게 길을 걷다가, 나뭇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꽃나무에 시선이 멎었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위아래로, 천천히, 눈으로 쓸어보았다. 다들 꽃이 지고 흐트러졌는데도, 유독 그 나무 하나는 아직도 꽃이 많이 맺혀 있었다. 조금 더 다가가 가까이서 본 하나하나의 꽃망울은 강인했다. 마치 여기 보라는 듯 힘이 있었다. 참 희한했다. 이상했다. 분명 시들어가는 중인데,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더욱 아름다워보였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 나무, 그 꽃들만이 아니었다.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봄날의 풍경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는 내 마음이 더욱 이상하게 다가왔다. 어, 이게 뭘까? 낯설고 당황스러운 기분을 추스르는데, 때마침 꽃잎 하나가 얼굴에 사붓이 떨어졌다.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이, 간지럽게 미끄러졌다. 나는 간질한 촉감을 담뿍 느꼈다. "꽃잎을 피부로 느껴보기는 참 오랜만이네." 중얼거리는데 찌릿 하고 무엇인가 가슴을 울렸고,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 나는 '설렘'을 잃어버렸던 거다. 설레는 마음. 설렐 줄 아는 감성을..



약 한 달 전.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새로운 공부.

 나는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는 한편,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문학공부를, 또 하나의 전공으로써 하게 된 것이다. 원래의 전공(공부)까지 끌어안고 뛰어들었기에 고생길은 안 봐도 훤했다. '너의 열정은 알겠으나, 괜찮겠느냐'는 주변의 근심 어린 질문엔 그저 허허 웃었다. 고생이야 당연한 거고, 그렇담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가 관건이니까. 그리고 역경에 대한 태도는, 제아무리 머릿속으로 셈해봐야 알 길이 없다. 직접 부딪쳤을 때에야 자신과 직면하며 참 모습을 알게 되는 거니까.

 그 외에도 이런저런 사연과 이유가 있었다. 물론, 모두 하나같이 문학공부에 대해 긍정과 희망을 잔뜩 머금은 옹골찬 씨앗이었다. 그래서 그 '씨앗'이 어떻게 발아(發芽)할지, 어떻게 결실을 맺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때문에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절로 헤벌쭉 웃었다. 걷잡을 수 없는 설렘과, 기쁨과, 행복감. 너무 들떠서 동네방네 소식을 알렸고, 내 사연을 아는 지인들은 하나같이 축하하며 응원해주었다. 특히 글을 통해 인연을 맺었거나, 사이가 깊어진 지인들은 더더욱 기뻐했다.


 그러나, 현실은 아주 차분히, 차례차례, 기대감을 압도해나갔다.

현실에 부딪치며 사라지기 시작한 '설렘'

 분명히 언어, 정확히는 한국어인데, 내가 알던 국어가 아닌 듯 전혀 생소하고 난해한 어학 수업. 우와. 이렇게 복잡하고 심오했던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문학이론들. 같은 작품을 봤는데 어떻게 저런 질문이 나오지? 지천에 널린 똑똑한 사람들. 어매, 저런 필력은 어찌하면 얻는다냐.. 곳곳에 산재한 문장고수들. 배우는 건 참 좋지만, 점수를 염두에 둬야 하니 갑갑해지는 마음. 수업 들을 자격은 얻었지만, 출석 부를 때마다 표시되는 학적은 다른 과.. "이방인". 그 외에도 참 많은 부분에서 다양한 면이 나를 옥죄어 왔고, 지금도 그렇다. 이따금씩 허허 웃을 뿐이다. 학기 전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각오하고 뛰어든 거지만, 내가 느낀 현실의 생존 기준은 꽤 높았다. 이대로라면 버티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되뇌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나도 모르게 깊이 한숨을 내쉬곤 했다. 공부에 더 힘을 쏟으면서 어학과 문학에 대한 지식은 점차 늘어갔고, 내 이야기를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훌륭한 작품으로 대리만족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돌이켜보면 이 무렵부터 글이 안 나오기 시작했다. 감에 의존하지 않고, 의지를 발휘해 써보려 했으나 그마저도 점차 힘겨워졌다(한 가지 다행이라면, 일기쓰기는 지장이 없었다.).

 글이 안 써지니 관찰에 소홀하게 되고, 상상력이 메말라가고, 마음이 팍팍해졌다. 계절과 날씨는 봄으로 무르익어 가는데, 마음속은 늦가을이었다. 아름다운 광경을 봐도 무신경했고, 뒤이어 사람에게 소홀해졌다.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쏟지 않다보니 나만 신경 쓰게 되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지만 왜 그런지,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었다. 뭔가가 항상 불편했다.


꽃잎이 일깨워주다.

 그런데 꽃잎이 일러주었다. 일깨워주었다. 살아남느라, 나만 신경 쓰느라 어느 순간부터 잊게 된 감각을. 한 달 전, 학기를 시작하며 기대에 부풀었던 순수한 마음을. 진솔한 내 이야기를 하는 대신, 남의 이야기와 문학이론.지식으로 채워나가던 내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었는지를.




 얼굴을 간질이던 꽃잎은, 하늘하늘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쭈그려 앉아 그 꽃잎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참 예뻤다. 자세히 보니 색깔 뿐만 아니라 모양도 예뻤다. 한참동안 관찰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무에 맺혀있는 꽃무리가 퍽 새롭게 느껴졌다.


노래 가사도 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돌이켜보면, 가장 큰 설렘 또한 사람을 만날 때 찾아왔다.

 기분 좋게 꽃내음을 한껏 맡으며 둘러보니, 꽃나무 주변에서 행복하게 사진을 찍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부부, 가족, 연인, 친구.. 아아. 손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종이와 펜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풍경을 간직하고 싶어서. 다른 이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어서. 그리고 그 순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설렘이 한 꽃잎마냥 내려앉았을 거라 확신하면서.


두근, 두근. 오랜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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