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류아 X 심작가. 심작가가 구상/제작하고, 세류아가 쓰다. 그 작업기록
심작가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youngtory15/?fref=ts
생애 첫 합작품.
더 뜻깊게 기념하기 위해,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작업기록을 적어보았다.
어느 날 <심작가>에게서 제의가 왔다. 이별을 소재로 영상을 만드려 하는데, 거기 들어갈 나레이션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만 놓고 보자면 큰 구상과 설정까지 어느 정도 끝나,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참 많은 생각이 오갔다. 가장 먼저, '작업 시간(기한)을 맞춰야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됐다. 나는 쓰고 싶을 때 쓰고, 잘 안 써지면 쓸 마음이 생길 때까지 놔두는 편이다. 이런 태평스런 방식이 가능한 건 쓰기부터 발행까지 나 혼자 진행하기 때문이다(쓰다 만 글이나 성에 차지 않아 다듬어야 할 글, 시기가 맞지 않아 묵혀둔 글 등등이 다수 있다.). 계륵 마냥 폐기되지 못한 채 서랍 속에 묵혀둔 글들. 길게는 6개월 이상 빛을 보지 못한 것도 있는데, 합작을 하게 되면 이런 천하태평이 가능할 리 없다.
게다가 외부 텍스트에 내 이야기를 흘려 넣는 방식은, 아주 생소했다. '내가 잘 해낼까?' 창작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만 작업해왔고, 여기에 익숙했으니. 홀로 하는 작업은 첫 단계, 그러니까 새하얀 백지에서 벗어나는 과정. 그거만 잘 넘어가면 다음부턴 내 마음대로 완급조절, 호흡조절, 구조조절 등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의견충돌'이나 '갈등'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뭐, 완성을 향한 스스로와의 사투 정도는 있었지만.
그러나 합작을 하게 되면, 한 작품을 두고 여러 사람의 구상, 의견 등이 이리저리 얽혀 잘못하면 큰 갈등이 생길 위험도 있었다. 내가 경험한 '합작'이나 '협업'은 대개 대학교의 (악명 높은)'조별과제'였기에, 당장 부정적인 생각부터 밀려왔다. 게다가 나를 돌아봤을 때, 작품과 작업에 대한 애정(혹은 욕심)이 큰 편이다. 그래서 다른 이와 의견을 맞추기 어려울 듯 보였다.
그리하여 처음엔, 거절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었다. 마감기한에 쫓기기도 싫고, 창작하되 갈등 없이 평화롭게(=나 혼자)했으면 싶고, 어쨌든 메인은 영상이니 잘 맞추지 못할 듯하고.. 게다가 마감이 이번주래. 영상촬영은 나흘 뒤고. 세상에. 사실상 4일 남았는데. 어떻게 쓰겠어? 안 될 거야 아마..
제의는 고맙지만 좀 어렵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우왁. 마음속에서 묵직한 게 뒤퉁스럽게 튀어올라왔다.
왜 부정적인 생각 뿐이냐? 엉?
글이랑 삶이랑 따로 노네!
정신이 번쩍 났다. 그러게. 죄다 '안 된다, 안 된다' 뿐이잖아? 평소 쓰는 글에는 대개 '그래도 희망을 갖자!'라고 해놓고.. '진솔함이 내 글의 최고 가치'라고 말하면서 정작 내 삶에는 적용하지 못하다니.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독자에 대해서, 글을 쓰느라 고민하고 투자한 시간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나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몹시 부끄러웠다. 역발상을 해보았다.
-'내가 잘 해낼까?' -> 해보지도 않고 사서 걱정이라니.
-촉박한 마감기한 ->
1. 기한 때문에 생기는 절박함으로 창의력과 능률 증가
2. 잘 해내기만 한다면, 마감기한 이후에 확실히 작품이 하나 탄생한다!
-합작으로 생기는 갈등이 싫다 -> 갈등이 생기면 풀면 되지. 대화로 글로.. 글쓰기는 뒀다 뭐하니?
-의견을 맞추지 못할 듯하다 -> 포기할 건 포기하고, 타협 안 되는 부분은 확실히 얘기하면 되지.
-영상에 덧입히는 건데, 제대로 된 글이 나올까? -> 어쨌든 최종완성은 심작가의 몫. 판단에 맡겨!
-기존 플롯이 이미 있는데.. -> 제일 큰 고민이 해결됐네. 이제 살 붙이기만 하면 되잖아!
부정적인 생각이 완패했다. 도전하기로 마음을 다잡고, 응했다.
구상을 듣고,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계속 질문하고 질문하고 질문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둘의 심상을 최대한 일치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배경음악은 머릿속에 녹아들 정도로 반복해서 들었다. 음과 이야기를, 이야기에 맞는 감정을 끌어내고자 했다.
영상 장면 장면에 어울리는 문장을 초 단위로 잘라 고민했다. 나레이션이라는 특성을 고려해 단어와 문장을 더듬었다. 중간점검을 하며 나의 심상(이미지)과 심작가가 떠올린 심상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심작가가 미처 이야기 못한 설정을 새로 말해주어 엎기도 하고(!), 심작가가 내 플롯에서 힌트를 얻어 영상과 장면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바통을 넘겼다. 마감기한이라는 요인이 가장 컸지만, 심작가 말마따나 "이렇게 카톡으로만 진행하기보다, 다음에 또 작업하게 되면 그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듯" 싶어 그에게 나머지를 맡기고 손을 뗐다. 급히 진행되어 조금 아쉬웠다. '논의는 충분했을는지? 내 플롯이 영상에 잘 녹아들도록 편집이 될까? 아니, 내 플롯이 영상에 도움이 될까? 전체 완성도는 어떨까?' 이런저런 궁금증과, 기대 반 걱정 반. 이젠 내 손을 떠났으니, 다만 연락을 기다릴 밖에.
약 1주 뒤 심작가를 통해 완성 작품이 도착했다.
미처 다듬지 못했던 부분도 잘 다듬어주었고, 필요에 따라 새로운 문장을 넣기도 했다. 그 중 가장 기뻤던 건 문체와 어투를 거의 그대로 살린 점이었다. 예를 들어 "집에 가야지, 라고 생각했다."에서 ','는 꼭 넣어야 할 부호인데, 다른 사람이 보면 어색할 여지가 컸다. 그런데 이를 그대로 잘 살려주었다. 초 단위로 나눈 세세한 설정도 잘 반영해주었다. 또한 섬세한 영상미가 깃들여져, 나레이션이 더욱 빛을 발했다.
나도 심작가도, 서로에게 말했다. "다음에 기회 생기면 또 같이 작업하자!" 라고.
여러모로 신선하고 좋은 경험이었다. 영상이 글에 영향을 미쳤고, 글이 영상의 영향을 받았다. 혼자서 했다면 아마 절대 이뤄내지 못했으리라. 이 작업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영상, 음악과의 합작. 그리고 시간배치까지 고려한 문장들. 글과, 글에 어우러진 사진으로만 메시지와 이야기를 전했던 나였는데, 이제는 3차원 영역 진출! 아니, 다른 작가와 호흡 맞추기까지 해냈으니, '4차원으로의 도약'이라 해도 괜찮겠지?
덩달아 철칙이나 다름없던 '쓰고 싶을 때 쓴다'는 관습과 게으름을 깼으니, 여러모로 참 의미 있고 힘이 나는 쾌거다.
그래. 앞으로도 도전하자.
특히, 창작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