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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Jul 20. 2016

환승역의 연인들

잊지 못할 지나침 - 그들의 용기를, '사랑'이라고 하는 걸까

 여자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몇 걸음 따르더니 그 자리에 서서 고무줄을 하는 계집아이처럼 깡충깡충 뛰었다. 내가 그 여자와 시선이 부딪쳤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여자는 열차의 불빛에 막연히 시선을 던졌겠지. 그 두 사람은 어찌될까. ...  저이들은 나를 모르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며, 불빛이나 소음이나 바람의 부분으로 나를 끼워 넣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만나지 못할지라도 그들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던 키 큰 중위의 웃음을 나는 생생히 떠올릴 것이다. 그 여자의 깡충거리던 작별의 동작을 잊지 않을 것이다.


-황석영, <몰개월의 새>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초점도 없이, 하염없이 그냥 쳐다봤다. 요즘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우두망찰하게 정지되어 있는 때가 많다. 지금도 계속되는, 요 몇 달 사이에 겪은 일이 나를 파괴시킨 까닭이다. 실패 정도라면 차라리 좋겠다. 그러면 금세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다시 도전하면 되니까. 하지만 다시 일어서기가 무서울만큼, 파괴되었다. 나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제 발로 사람들을 떠났다.

 후텁지근한 공기에 머리가 아팠다. 내가 겪은 일을 덤덤히 듣고, 이해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을 휙- 핥고 지나갔다. 아주 기분 나쁘게. 나는 몸을 떨었다. 그러다 이내, 끈끈한 한숨이 입술 끝에 엉겨붙었다. 지나간 일을 떠올리다 그리운 사람들이 생각났던 까닭이다. 그리운 사람들을 하릴없이 그리워하다가 마음이 뭉그러졌기 때문이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외로움이 되곤 한다. 그 때문에 나는 외로워서, 일어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녁, 한참 퇴근시간인 길거리에는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들이 제갈길을 가고 있었다. 간혹 연인들의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각자의 모양대로 그들은 함께 걷거나 서 있었고, 혹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들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주고 있을까? 또 서로를 얼마나 품고, 사랑하고 있을까?

 문득 몇 개월 전 보았던 어느 연인들이 떠올랐다. 아마도 끈덕지게 기억될, 얼굴조차도 모르는 어떤 연인들이.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목마른 가슴 위로 태양은 타오르네/ 내게도 날개가 있어 날아갈 수 있을까/

별이 내리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바보처럼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서 있네/

이 가슴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 있네/


-자우림, <샤이닝> 




 몹시 지친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그날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마 일상의 한 조각인 그런 날, 어제도 겪었고 내일도 있을 법한, 글자 그대로 '평범한 날'이었으리라.

그날의 이미지는, '흐림' 그 자체. 사람 때문에 외로워서 더더욱.

 좀 더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미지들과 조각난 감정들이 지나간다. 먼저는 저녁이 매우 짙었던 느낌. 그날 길거리에서 마주친 백열등이 유독 밝게 다가왔으니까. 날씨가 좋지 못했다. 비는 오지 않았으나, 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하늘이었다. 푸른 멍처럼 어두침침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어두워보였다. 봄철이라고 여기기엔 이상하리만치 움울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인적으로 몹시 지친 날이었다. 이유 없이.

 아마 사람 때문에 힘들어했던 것 같다. 그리움이 사무쳐서 외로움이 되고, 그 외로움을 어찌할 바 몰라 힘겨워했던, 어느 날. 그래서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철을 타고 서서히 집에 가까워졌다. 도중에 한 번 환승을 해야 했다.


 환승 때문에 내린 역에서, 나는 한 쌍의 연인을 보았다. 정말 우연히 보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황망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보았으니까. 구석에서 둘 다 웅크려 울고 있었다. 깊은 울음이었다. 애처로운 떨림이 느껴졌다. 그들은 하염없이 울었다. 남자는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서. 여자는 그런 남자를 감싸 안고.

 나를 비롯한 군중들이 제각각의 호기심으로 그들을 둘러싼 채 기웃거렸다. 제아무리 구석이었지만, 퇴근시간인데다 환승 계단 방향이라 사람은 더욱 많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무슨 사연일까, 둘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몹시 궁금하고 또 마음이 먹먹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그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 군중의 하나일 뿐. 이 장면을 흘끗 본 것만으로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그들에겐 매우 중요한 순간일 텐데, 이를 구경거리 따위로 만드는 데 동조한 듯해서.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순간 남자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고 싶었어. 이런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굵직한 탄식이 터졌다.

그의 심정을 나도 똑같이 느꼈다. 이내 뜨거운 게 눈가에 맺혔다. 왜 그랬을까.

 


  자정이 가까워진 지금, 창밖을 다시 본다. 언제 그랬냐는듯 아까와는 달리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더 밝아진 가로등과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왠지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그런 탓에 그리움은, 외로움은, 더욱 짙어져 마음 깊은 곳을 묵직하게 두드린다. 그 두드림을 해소하려 가만히 글을 쓴다.  그 연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황석영의 문장처럼 "저이들은 나를 모르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며, 불빛이나 소음이나 바람의 부분으로 나를 끼워 넣을 것"이겠지만, "그러나 나는 다시 만나지 못할지라도 그들을 오래 기억할"려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 어떤 사랑의 이야기가 저런 말을 터져 나오게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다 자기 마음속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거절당할까, 버림 받게 될까 두려웠지만 끝끝내 고백하고, 또 이를 받아주고.. 마침내 세상의 시선도 아랑곳않고 서로를 부둥켜 안았던 그들. 현란한 말로 지껄이기보다, 그저 흐르는 눈물과 함께 서로의 몸과 마음을 감싸안았던 그들. 그래서 "가난하고 숨기고 싶은 초라한 영혼"마저도 이해하고 받아주려 했던 그들. 거칠고 외로운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를 선택한 그들..


 그들의 용기를, 사랑이라고 하는 걸까?


그날 내가 보았던 그 연인들이 부디 행복하기를, 그리고 우리들도 서로를 좀 더 '사랑'해보려 노력하기를. 

그렇게 많은 이들이 서로서로 보듬어주기를.

두 손 모아 가만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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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www.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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