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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Aug 29. 2016

무지개와 할아버지

무지개에 얽힌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할아버지의 믿음.


친구와 함께 길을 걷는데, 무지개를 봤다. 아주 선명하고 예쁘다.
#1

 친구와 길을 걷는데, 선명한 무지개가 떴다. 아름다운 하늘을 배경으로. 간만에 핸드폰을 꺼내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다. 참 또렷하고 예뻤다. 나도 모르게 헤벌레 웃었다. 안 좋은 일이 생겨 참 많이 힘들고 외로운데, 조금 위로가 됐다. 바람도 선선해서 좋고. 마음까지 시원해졌다.

 아아, 이렇게 청명한 무지개를 언제 또 봤더라.. 기억을 더듬는 순간, 잠시 어린시절로 여정을 떠났다. 그러면서 가슴속에 고여있던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 또한 그러모았다.



#2

 무지개에 관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선명한 기억은 아홉 살 때 즈음이다. 햇살이 아주 따갑게 내리쬐는 한여름, 할아버지 댁에서 우연히 ‘직접 만든’ 무지개. 

 돌이켜보면 그 시절, 할아버지 댁에 자주 놀러가곤 했다. 이젠 추억으로만 회상할 수 있는 그곳. 검은색 대문이 있고, 들어가면 양 옆으로 화분이 가지런히 놓인 다섯 개의 흰돌 계단이 있었다. 올라가면 할아버지께서 젊은 시절부터 썼던 낡은 낚시의자가 있고.. 당신께서는 늘 똑같은 자세로 거기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시곤 했다. 그 앞을 지나면 현관이 나왔다.

 계단 옆으로는 빨래터를 겸한 수돗가가 있었다. 다 자란 지금이야 시시할 정도로 작지만, 어린아이 때는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였다(가끔 동네 아이들과 같이 놀곤 했었다.).

 나는 새로 산 물총에 물을 잔뜩 넣고, 수압을 높이려 펌프질을 했다. 그리고 흰돌계단 맨 위에 서서, 태양을 등지고. 대문을 향해 발사-! 매섭게 뻗어나가던 물줄기는 얼마 안 있어 힘없이 수그러들고 흐트러지며 추락했다.

 그리고 그때, 무지개를 보았다. 얇은 폭포처럼 가느다랗게 흩어져 흐르는 물줄기 속에, 무지개가 녹아 있었다. 황홀했다. 그림책과 교과서에서나 봤었는데. 너무 신기해서 몇 번이고 물을 뿌렸다. 반해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할아버지를 불렀다.



#3


 할아버지는 산전수전 다 겪고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청소년 때 6.25동란을 겪고, 혈혈단신으로 세상에 던져졌다. 이후 죽도록 고생한 끝에 어느 정도 재산을 모으셨다. 그 덕에, 노년에는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면서 사셨다.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시고, 그렇게 좋아하는 술담배도 마음껏 하시고(!). 지금도 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면 ‘풍류’, ‘여유’ 라는 단어가 먼저 생각난다. 하지만 몸 생각 않고 지내시다가 1년가량, 갑자기 지독하게 앓고 세상을 뜨셨다. 마지막 며칠간은 내내 눈 감고 있다가 떠나셨다.


#4

 “할아버지, 저게 무지개에요?”

 당신께서는 예의 담배를 물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을. 어린 내가 보기에도 뭔가 깊이 생각하시는 듯했다.

 “어어, 맞아. 무지개.”

 “왜 생기는 거에요?”

 “할애비도 잘 모르는데. 근데, 무지개를 보면 항상 좋은 일이 생겨.”

 할아버지는 여러 가지 속설을 많이 믿고 계셨고, 그것들을 자주 이야기해주곤 하셨다. 돌이켜보면 대부분은 미신에 불과했지만, 당시엔 알 턱이 없고 단지 재미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들었다.

 “진짜요?”

 “그럼. 좋은 일도 생기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잘 풀려. 할아버지가 살아오면서 무지개 보고 난 뒤에 잘못된 적이 한 번도 없어.”

 “우와. 비법이 뭐에요?”

 “믿음이라는 건데, 더 크면 알게 돼.”

 이 말을 하고 난 뒤 할아버지의 묘한 표정은, 참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마치 사진처럼. 나는 믿음이 뭔지 몰랐기에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내, 뭔가 보물 같은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되물었다.

 “할아버지, 그거 저 주면 안 돼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담배를 비벼 끄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이건 못 줘. 네가 가질 수는 있어도. 못 주는 대신 나-중에 이 할애비 죽고 나면, 무지개 볼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해. ‘할아버지가 지켜본다.’ ‘지켜준다.’하고. 됐지?”


#5
그날의 하늘과 무지개를 닮은 사진.

 떠나시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새벽 2시 즈음에 집 전화기가 울렸고.. 잠결에 받아보니 병원. 급히 옷을 입고 헐레벌떡 뛰쳐나왔고, 달렸다. 허겁지겁 병실로 들어갔을 때 할아버지가 보였고- 1분도 채 안 되어 중증환자감시장치의 숫자와 그래프는 0을 나타냈다(두고두고, 임종을 지키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경황 없이 왔다갔다 하는 사이, 빈소가 차려지고 식 준비를 했다. 한숨 돌리고 난 뒤 아침 7시 즈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묵직하게.

 비는 하염없이 내리다가 오후 들어 그쳤고, 흐리멍텅한 하늘 속에서 햇빛이 비쳤다. 그리고 잠시 머리를 비우고 싶어 나온 바깥에서, 무지개와 마주쳤다. 그 무지개가 너무 예뻐서, 나는 울었다.


#6

 그리고 다시 몇 년이 지나서 오늘, 이렇게나 선명하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났다. 안 좋은 일이 터져 특별히 외롭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때에.

 무지개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좋은 만남이 있을 거라고? 저 무지개가 할아버지의 현신(現身)이라고? 그 어느 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 근거도 없다. 어렸을 적엔 진짜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알았지만, 이젠 아니다. 다 근거 없는 미신일 뿐.

 하지만 그런 걸 떠나서 나는, 믿고 싶다. 지금은 힘들지만 앞으로는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좋은 만남이 있을 거고 그래서 또다른 역사가 시작될 거라고. 또한 저 무지개가 비록 할아버지의 현신은 아닐지언정,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영접하고 신앙을 가지셨으니, 먼저 천국에 가셔서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계실 거라고..


#7

 이동하며 사진을 찍는 그 몇 분 사이, 무지개는 조금 희미해졌다. 나 또한 여기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다. 무지개가 길게 걸린 이곳을 떠나기 전, 나는 마음을 담아, 추억을 담아, 미소를 머금어 읊조렸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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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표지 및 2번: https://pixabay.com by "Janakudrnova"

1번: 함께 있던 친구 SJ

3번: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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