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발견한 편지가 선물해준 글
툭.
서랍을 정리하는데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리 숙여 집었다. 곧 미소 지었다.
아아, 편지네.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미소가 더 크게 번진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간직한 녀석이었다. 다 썼는데 문단 순서를 바꾸고 싶어, 고민하다 새로 써서 보냈다. 내용을 다시 손보지는 않았으니, 거의 똑같은 또 다른 편지는 아마 받은 이가 간직했겠지.
서랍정리는 제쳐두고, 따로 갈무리해둔 편지 묶음집을 한데 모은 뒤 책상 앞에 앉았다. 대부분 내가 누군가에게 쓴 편지들(사본)이지만, 종종 내가 수신자인 편지들도 있다. 간혹 ‘쪽지’도 보였다. 뭐라고 표현할까, 이 기분을? 모르겠다. 그저 벙실벙실 웃음만 나온다.
옷 단추를 끄르듯 조심스레 꺼내어 펼쳤다. 가지각색 종이의 속살이 드러나고, 그 위에 또 각각 사연을 머금은 이야기와, 개성이 담긴 글씨, 그리고 각별한 기록들이 눈에 든다. 년/월/일(다시 돌아오지 않을)과, 쓴 사람/받는 사람의 이름이라든가, 그 앞에 쓴 애칭(‘너의 좋은 친구’)이라든가.
하나하나 사붓사붓, 애정 어린 눈으로 더듬는다. 이윽고 문단과 문단이 머금은 이야기 물줄기를 따라간다. 행간에 굽이치며 생각과 느낌으로 가슴을 적신다. 그러다보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기억에 접속하고, 되짚어가면 갈수록 편지를 쓰던 시공간을, 느낌과 생각을 그대로 마주한다.
2년 전 어느 날 밤, 5년 전 등나무 아래서, 3년 전 어느 카페에서 너를 기다리며.. 이런 생각, 저런 마음, 그런 그리움, 어떤 기쁨.. 더 나아가 조각종이(片紙)한 장에 이 모든 것을 담아내기까지 너와 나의 인연. 그 사이에서 며칠, 몇 달, 혹은 몇십 년일지도 모르는 알 수 없는 폭으로 흘러간, 또는 흐르는, 우리 사이의 이야기..
비록 안부를 묻는 종이(便紙)한 장에 불과하지만, 속에 깃든 인생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발견한 편지를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쓸 때는 그렇게 시간과 마음을 쏟아 적었는데. 상대방을 생각하고 생각하며 즐거워했는데. 다 적고 나서는 직접 전달하거나, 우표를 붙여 보낼 때까지, 두근거림과 만족스러움으로 행복에 겨웠는데. 과정 하나하나 세심히 임했다는 걸 잘 알기에, ‘어떻게 이걸 잊어버리지?’ 싶다. 어쩌다 발견해서 다시 생각났을 뿐, 서랍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영영 잊고 지냈으리라.
하지만 잊었다는 데 분노나 황당함을 느끼진 않는다. 으레 있는 일이다. 모든 일을 다 기억하진 못하니.
다만 감사할 뿐이다. 오늘 발견한 편지 한 장이, 지나간 어느 순간을 붙잡아 간직해주었으니까. 지난날 내 모습을 생생히 보게 해주었으니까.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과 감정을 되살려주었으니까. 시간을 재생해주었으니까. 어쩌다보니 왕래는 거의 없지만, 변함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나게 해주었으니까.
종이 위에 시간을 간직한다. 사람을 간직한다.
그 때문에 비록 잊힐지언정, 나는 또 다시 편지를 쓴다. 이토록 가치 있는 일이기에.
우연히 발견한 편지 덕에 사람이 그리운 오늘, 또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곧 쓸 편지를 보며 훗날, 또 시간을 재생하고, 사람을 간직하도록.
사진 출처
www.pixabay.com "jalmol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