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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Mar 22. 2017

가만히 누운 방에서

이 치열한 세상에서, 머리 두고 편히 쉬는 곳. 내가 나인 공간

 일과를 마치고 호수를 가로질러, 방으로 돌아온다.


 작은 전등을 켜 은은한 온기를 불어넣고, 묵직하니 업혀 있던 겉옷을 벗어 걸어둔다. 나머지도 편한 것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잠잠하다. 침묵이 나를 압도한다. 혼자 살기에,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조용함은 계속된다. 다만 얕은 숨소리만이 귀에 들이칠 뿐. 파도처럼 규칙적으로.

 물끄러미 침묵을 응시한다. 그러기를 잠시, 편안하게 누워 심호흡을 한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아아, 고생 많았어 오늘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만 하는 삶의 연속. 자기 능력을 입증해야만 하는 상황의 반복. 내가 더 뛰어나답니다! 날 봐요! 날 쓰세요! 경쟁에 경쟁. 매일같이 양산되는 번쩍번쩍 성공신화. 그때마다 새로 생기는, 바벨탑만큼이나 높은 야망의 마천루. 그 밑에서 희망은 피고 또 지고, 혹은 매매된다. 다음날이면 사라질지언정.

 불쑥불쑥 엉겨붙어 발목 잡는 과거. 버티기도 벅찬 듯한 현재.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미래. 그 세 갈래 길 한가운데 주저앉은, 갈증과 피로에 짓이겨진 영혼.


 500원 더 싼 메뉴를 고르며 부여잡은 위장. 목구멍은 포도청. 밥벌이의 무서움. 어떻게 하면 더 가지고 더 누릴까. 본능적으로 달려나가는 욕망의 전차. 갈수록 무거워지는 인간의 굴레. 그러다 문득문득 보이는, 겸연쩍게 홀쭉한 지갑. 그것마저도 노리며 바라보는, 야바위꾼의 군침 어린 시선. 희번득한 언변. 감쪽같은 돌변.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더니. 어느새 참변.



 문을 잠그고 현관에 들어서면, 도처에서 날 노리며 도사리던 많은 것들과 단절된다. 물론 청소도 해야겠고, 밥도 먹어야 하고, 바구니를 보니 빨래도 해야겠고. 의무와 함께 삶은 계속된다. 그렇지만 이 공간은, 까다롭지 않다. 오롯이 나에게 주어졌다. 감시자도 없고, 어떠한 역할 기대자도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도, 보여질 일도 없다. 끊임없이 말할 필요도 없고, 뻑뻑한 의자에 뻣뻣하게 앉아 있을 필요도 없고, 공기를 읽으며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다만 밖에서 덕지덕지 붙인 껍데기들을 하나씩 긁어 벗겨낼 뿐이다.


나를 더듬어가는, 나의 동굴

 밖에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마천루를 쳐다보며 기어올랐다면, 방으로 돌아와서는 태고의 동굴로 간다. 찬찬히 벽을 짚으며 어루만진다. '아, 내 마음결이 이랬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응? 이건 왜 그런 걸까?' 나를 더듬어간다. 아니면 동굴 근처 어딘가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며, 허름하고 소박한 두레박 하나 조심스레 내려본다. 무언가 길어올리지 못해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좋다. 그대로 좋다.


In Excelsis Deo

 하루의 종말은 대체로 방에서 맞이한다. 임종이 다가올수록 침묵 속에 가만히 잠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하루를 복기하며, 다시 한 번 동굴이나 우물 속으로 아주, 아아주 깊이 들어간다. 나는 알 수 없는 날숨을 기일게 뿜어내며 가만히 눕는다.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린다. 이렇게 치열한 세상 속에서, 다만 머리 두고 편히 쉴 수 있는 방 한 칸이 주어졌다는 데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여기서 나는 나일 수 있다. 그대로의 나를, 여기서는 마주한다. 그리고 그 시간 덕분에, 다가올 내일을 살아갈 힘이 생긴다.


 고단함과 함께 가라앉는 눈꺼풀 위로, 행복한 미소와 눈물이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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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pixabay.com 

표지 및 2,4,5번: "Unsplash"

1번: "phonolee"

3번: "2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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