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와인과 사람을 버리는 수영장

by 말미잘

옛날부터 아빠는 소주만 좋아했다. 와인 같은 건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빠가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을 게 분명한, 창고방 한쪽 서랍에 처박혀 있던 커다란 와인을 학창 시절의 내가 몰래 마실 수 있었다. 5L는 될법한 커다란 약수통 모양 유리병에 담겨있는 레드와인이었는데 정말 더럽게 셨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내가 마셨던 건 Carlo Rossi에 대용량 저그 와인이었고, 굉장히 저렴한 와인이었다. 맛이 없어도 어쩌겠는가? 버젓이 술을 살 나이는 아니고, 술을 맛보고는 싶었으니 조금씩 따라서 홀짝홀짝 마시길 여러 날, 결국 그 와인병은 내가 혼자 다 비웠다.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시큼한 와인을 잔뜩 먹어댄 경험 덕분인지 나는 와인의 산미가 좋았다. 주로 레드 와인을 더 마시긴 하지만 화이트 와인도 꼬박꼬박 챙겨 마시고 있다.


아내가 굴을 샀는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길래 내가 요리하기로 했다. 감바스를 만들 듯 굴 볶음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구매한 화이트 와인이 떠올랐다. 일단 사두고 천천히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샀던 와인이다. 하지만 굴 요리를 하는데 화이트 와인을 넣지 않을 수 없고, 이왕 요리하느라 땄는데 마시지 않을 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와인을 땄다.


마늘과 양파를 올리브 오일에 볶고, 잘 씻어 물기를 제거한 굴을 넣고 볶는다. 화이트 와인을 조금 넣어 단맛과 신맛을 추가한다. 굴을 볶으며 와인을 잔에 따라 조금 홀짝거렸다. 2만 원에 집어온 저렴한 와인이었다. 향부터 맛까지 저렴한 화이트 와인 그 자체였지만 2만 원 치고는 맛이 괜찮았다. 굴 볶음과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와인이 기대보다 맛있다고 생각하며 Carlo Rossi의 저그 와인을 떠올렸다. 그건 정말 맛이 없었지. 새삼 맛있는 와인과 맛없는 와인을 구별하는 내가 신기했다.


예전에 어떤 친구가 내가 와인을 즐기는 것을 보고 비싼 와인과 싼 와인에 어떤 차이를 느끼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아마 그 친구에게는 비싼 와인이나 싼 와인이나 다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물음의 바닥에는 '와인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음'도 깔려있었을 것이다.


문보영의 [사람을 버리는 수영장]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 역시 '모르겠음'이었다. 나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다는 문보영의 시를 좋아하지만 [사람을 버리는 수영장]은 왜 이런 시를 써야 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는 수영장, 그런 수영장을 바라보는 남자친구, 남자친구는 수영장을 바라보며 상처받음을 느끼고, 나는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물고기였으며 그 사실을 오랫동안 숨겨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이해한 시의 내용이었다. 그건 그저 재미있는 환상일 뿐이었다.


최근 다른 책에서 [사람을 버리는 수영장] 시를 다시 읽었다. 문보영 시인의 시와 산문이 함께 있는 책이었는데, 책 속의 산문이 [사람을 버리는 수영장]의 이해를 도와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남자친구가 왜 수영장을 바라보며 상처받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가슴 먹먹한 시였구나. 음미하듯 몇 번을 다시 읽었다.


비싼 와인과 싼 와인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어떤 와인이 맛있고 어떤 와인은 맛이 없는지, 와인의 향이 닫혀있는지 열려있는지 알기 위해선 많이 마셔봐야 한다. 테이스팅 노트를 적어보는 것도 좋고, 와인에 대한 기본 정보를 공부해 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나는 많이 마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보영의 시들이 갑자기 와닿는 것도 같은 까닭일 것이라 생각한다. 시를 읽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 잘 모르면서도 계속 읽다 보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내가 처음 [사람을 버리는 수영장]을 읽었을 때와 최근에 다시 읽었을 때 사이에 몇 편의 시들이 놓여있는가. 맛있었던 시들과 맛없었던 시들이 혀에 맴돈다. 굴을 씹어 삼키고 화이트 와인을 입에 잠깐 머금어 넘긴다. 2만 원 치고는 맛있는 화이트 와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침대 도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