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결혼기념일
내년에도 까먹겠다는 건 아니고….
"당신 그거 알아?"
"뭘?"
"저번 주 목요일이 우리 결혼기념이었어."
세상에.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이나 지나 결혼기념일이 지나간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내는 나에게 우리가 지난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당신도 깜박했으나 자신도 깜박했으므로 샘샘하고 넘어가자는 제안도 했다. 하지만 역시 그럴 수는 없었다. 1년에 한 번뿐인 결혼기념일인데.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임시 결혼기념일을 만드는 수밖에.
사실 나는 기념일이나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하루하루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에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타입이다. '뭐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다.
그래서 연애할 때도 사귄 지 며칠 째니, 1주년이니 이런 이벤트도 모두 챙기지 않았다.
그런 재미없는 남편이라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도 있다. 아무 이유 없이 퇴근길에 작은 꽃다발 선물하면 좋아할 걸 알고, 작은 기념일이라도 챙겨서 케이크에 초 불면 기뻐할 걸 알면서도 막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귀찮아서라기보다 '특별함'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함에 대한 거부감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선입견이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특별한 것들은 다 가짜다.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지 않고, 밸런타인데이 같은 건 달콤한 상술이다. 특별히 나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은 다른 사람도 함께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특별 세일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거나 재고 털이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결혼기념일만큼은 꼭 챙기고 싶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이렇게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고 결혼 생활이 뻔해지고 정형화된다고 느끼면서 그랬다. 전에는 안정감과 행복감을 주던 일정한 패턴들이 불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질려버릴 수도 있고, 지쳐버릴 수도 있고, 지루해지거나, 지나쳐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럴수록 매해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뭔가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뻔하게, 분위기 좋은 식당을 예약해 맛있는 저녁 한 끼를 먹고 아내가 평소 가고 싶다고 했던 카페에서 차도 한 잔 마셨다. 서로 '나와 결혼해 줘서 고맙고, 당신과 함께해서 행복했다'는 얘기를 나눴다. 때마침 첫눈이 내려서 잠깐 구경도 했다. 내년 결혼기념일은 까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임시 결혼기념일을 만들길 잘했다고 시시덕거렸다. 좋았다.
누가 했던 말이었더라. 이런저런 기념일들에 대해 그런 핑계로라도 기뻐할 날이 많아지면 좋은 게 아니냐고 그랬다. 자주 주고받는 사랑한다는 말도 특별한 날엔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제 나도 어른인데 어린 시절 고정관념을 깰 때도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