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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언 Apr 29. 2023

프롤로그, 생존자들에게

픽션과 논픽션 사이

이것은 버팀의 기록이다. 


삶이 그저 사는 것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내게 삶은 사는 일이 아니라, 살아내는 일이었고 버티는 일이었다. 삶에 대한 당연한 욕구에 의문을 품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태어났으니’ 살아야 한다는 말은 내게는 폭력이었다. 죽음에 대한 열망, 타나토스가 나를 지배했다. 아니, 정확히는 죽음이라기보다 소멸을 원했다. 사라지고 싶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좋았을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불편함을 온통 홀로 감내해야 하는 억울함이, 아이러니하게도 내 삶의 동력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삶을 끝내고 싶었다. 나의 유일한 위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내 손으로 삶을 끝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의외로 그것은 큰 위안이었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든든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온갖 수단을 통해 찾아보고 머릿속으로 수천 번은 더 돌려봤을 시뮬레이션은 완벽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작 실행에 옮겼을 때 기능하지 못했다. 복병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죽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패배감은 이번에는 나를 진정한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죽을 수 없다면 살아야 한다. 하지만 끌려다니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왜 이토록 죽음에 매료되었는지, 사는 것이 아닌 버티는 삶을 사는지, 원인이 있기는 한 건지, 있다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따라서 이것은 끊임없는 공부의 기록이다. 알고 싶었다. 나는 늘 왜 이렇게 힘든지, 그리고 정말로 내가 이상한 게 맞는지. 내가 이상한 게 맞다면, 그런 결론이 난다면, 나는 나를 기꺼이 없애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타나토스가 지배한다 한들, 삶이 주어진 이상 에로스의 힘도 무시 못 할 터였다. 억울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나를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두 손 두 발 묶인 듯한 느낌으로 괴롭기만 했던 나를 조금은 떨어진 상태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김지은'을 내세운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 모든 게 '나'이기만 해서는, 안 되었다. 때때로 버티기 힘들었으므로. 


첫 정신과 진료가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임상심리에서 ‘인지’라고도 부르는 이 깨달음은 파죽지세로 내 안을 헤집었다. 후반부에 이어지는 내용, 그러니까 내가 주체적으로 ‘깨달음’을 ‘행동’으로 이행하며 나의 마음을 파헤치고 공부한 내용은 진정한 ‘나’로 산다는 느낌을 주기에, 주어를 ‘나’로 삼아 일인칭으로 썼다. 


알고 싶었다. 내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부모가 이상한 건지. 이상하다면 어떤 점이 이상한 건지. 그래서 정신과 선생님에게도 묻고, 심리 상담 선생님에게도 묻고, 책에도 물었다.


그중 초반에 내게 가장 큰 깨달음을 준 것은 댄 뉴하스의 《부모의 자존감》(2013, 양철북, 안진희 옮김)이었다. 또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내가 불편을 겪는 지점을 알고 싶은 욕망과 부친의 폭력적인 성향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일었는데 그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지학사에서 나온 이상심리학 시리즈다. 그중 《우울증》, 《범불안장애》, 《공황장애》, 《강박장애》, 《사회불안장애》, 《특정공포증》, 《알코올 장애》, 《충동통제 장애》, 《반사회성 성격장애》,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매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모친과 부친의 관계, 모친의 성향에 대해서는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의 《가스라이팅》(2021, 수오서재, 이진 옮김)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책과 유튜브 영상, 강좌를 찾아보고 공부했다. 


이 글이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자극할까 봐, 내내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버팀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렇게 살아서 오늘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버팀도 삶이라고, 그러니 살아도 된다고, 나에게 말해 줄 수 있을 때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동시에, 이율배반적인 말이지만 누구도 이 글에 공감하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은 나 같은, 그리고 김지은 같은 어린 시절을 겪지 않았기를, 다 큰 지금도 그 고통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 홀로 외로이 눈물 흘리지는 않기를, 바란다. 진심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은 잘못이 없다고. 당신은 그저 자신을 지키고자 애쓴 투사였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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