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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언 Apr 29. 2023

3. 일 등 아니면 다 꼴등

픽션과 논픽션 사이

김지은은 부모든 선생이든 어른이 시키는 일을 거스르지 않는 아이였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했다. 어느샌가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은 일도 미리 알아서 안 하는 아이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집에 돌아오면 신발을 벗기가 무섭게 숙제부터 했다. 숙제를 마치면 다음 날 등교에 차질이 없도록 가방 정리를 해 두고서야 다른 일을 했다. 타고난 저녁형 인간이라 아침에 눈 뜨는 게 늘 버거웠는데도 초중고 십이 년 동안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바라지 않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씨 성을 가진 담임 교사는 시험을 보고 나면 성적이 좋은 아이들을 앞에 불러세워 다른 친구들에게 박수를 받게 했다. 그리고 돌아가며 손등에 동그란 이빨 자국이 나도록 깨물었다. 공부를 더욱 잘하거나 말을 잘 들을수록 이빨 자국은 여러 개가 되고 진해졌다. 그것이 공부 잘하고 선생님 사랑을 받는 아이라는 증거였기에,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받는 아이들을 시샘했다. 김지은은 늘 받는 아이였지만, 뿌듯한 한편으로 선생님의 침이 묻은 손등을 얼른 닦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해지곤 했다. 선생님 보는 앞에서 그것을 닦는 일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았고, 무엇보다 ‘상’을 받지 못한 다른 친구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김지은은 존재 가치를 부여받았다. 학업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딱히 사교육을 시키지도 않아도, 다시 말해 특별히 투자하지 않았는데도, 존재감도 없던 딸이 자신의 트로피가 되어 준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항상 일 등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런 생각조차 수십 년이 지나서 하게 된 것이지만.


이 등 성적표를, 벌벌 떨리는 마음으로 부친에게 내민 날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일 등 아니면 다 꼴등이여!”


이 등은 졸지에 꼴등으로 전락했다. 그 사이를 빈틈없이 메우는 김지은의 노력이나 착실함, 실력 같은 가치는 삽시간에 휘발되었다. 모친도 옆에서 침묵으로 동의했다. 김지은은 그때 절감했다.


‘아…. 이 등부터는 다 꼴등이구나. 일 등이 아니라면 나는 가치가 없구나.’


김지은은 다음에는 꼭 일 등을 하겠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천만다행으로 그 결심을 이루어졌다. 김지은이 다니던 학교에는 전교 일 등을 하는 아이가 교사들과 교장, 교감에게 저녁을 사는 희한한 풍습이 있었다. 김지은도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런 ‘귀한’ 기회를 얻었다. 횟집에서 거하게 얻어먹은 자리에서 담임은 모친에게 말했다고 한다.


“어머, 지은이네에 자가용도 있는지 몰랐네요.”


모친은 우리를 없는 집이라고 무시했던 모양이라고 분해하면서도 자신이 전교 일 등짜리 아이의 엄마라는 걸 내심 뿌듯해했다. 평소에는 구겨져 있던 김지은의 마음도 그 모습을 보는 순간은 활짝 펴졌다. 한껏 펴진 부친의 가슴을 보며 김지은은 마음이 놓였다. 이 집에서 자신이 존재해도 된다는 허락을, 처음으로 받은 것만 같았다. 다만 그날 자리가 파하도록, ‘이렇게 공부 잘하는 딸을 두셔서 얼마나 좋으세요’, ‘아이고, 다 선생님들 덕분이지라’라는 대화가 오가는 동안, 김지은에 대한 직접적인 칭찬은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부친이 말했다. 


“아따, 니 때문에 돈을 너무 많이 써부렀다! 니는 쓰잘데없이 일 등을 해부러 갖고.”


‘아빠가 일 등 아니면 꼴등이라면서요….’


김지은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슬펐다. 아무리 애써도 부친에게 진정한 인정을 받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표정은 밝았으니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왜 아니었겠는가. 딸이라는, 쓸모없는 줄 알았던 물건이 자기 위신을 세워 주었으니, 딱히 투자도 안 한 곳에서 잭팟이 터졌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하지만 김지은은 혼란스러웠다. 


‘죽도록 애써서 부친에게 기쁨을 안겨 주는 순간에도 동시에 빚을 지는 사람이구나. 내 존재 자체가 그저 빚이구나. 그건 성적으로 대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구나.’


너무 충격을 받은 김지은은 얼마 후 모친에게 부친이 한 말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모친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느그 아빠가 속으로는 좋음시롱 안 그냐.”


이번에도 김지은은 부친의 깊은 애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이미 그것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일 등 아니면 꼴등’이라는 트랩에 김지은 자신이 갖혀 버렸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안타깝게도 김지은은 마흔이 다 되도록 그 트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만약 김지은이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그냥 아예 노력할 필요가 없겠구나!’ 하는 성격이었다면 달라졌을까. 김지은은 애썼다. 부친의 입에서 나오는 ‘잘했다’는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김지은은 자신을 채찍질했다. 기꺼이 부친의 자랑이자, 모친의 안심이 되고 싶었다. 본인이 아들이 되어 줄 수는 없어도, 아들을 낳게 해 줄 수는 없어도 그거라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어이없게도 그 소원은 삼십여 년 만에 이뤄졌다. 이루어질 필요도 없는 소원이 툭 튀어나와 갑자기 이루어졌다. 심지어 ‘역시 우리 딸이여!’라는 그제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는 상찬이었다. 그 어렵다는 입시와 시험에 통과해도 ‘돈 쓸 궁리만 한다’며 핀잔을 주던 부친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믿기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그날은 김지은이 서른둘의 나이에 ‘2종 보통’ 운전면허를 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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