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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언 Apr 29. 2023

4. 터

픽션과 논픽션 사이

“안녕하세….”

“아이고, 가시네야 니는 왜 터를 안 파냐. 가시네가 더럽게 욕심도 많네.”


어른들은 김지은의 인사도 받지 않고 그녀를 타박하곤 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 전부터 김지은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터를 팔라’는 주문을 받았다. 조모에게서, 외조모에게서, 이모에게서, 심지어 모친의 손을 잡고 간 시장에서 만난 생면부지 아주머니에게서까지. 그렇게 김지은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자 유일한 숙명은 ‘터를 파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터를 판다’는 말은 김지은이 살던 고장의 말이었는데, 열 달간 머물렀던 ‘터’, 그러니까 어머니의 ‘자궁’을 동생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남동생’을 생기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김지은은 의문이었다. 하지만 의문은 잠시 스쳐갔을 뿐, 김지은을 가장 무겁게 짓누른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터를 팔라’는 주문은 곧 김지은 모친을 향한 화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김지은은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모친이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는 것만으로도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자신 때문에 ‘아들도 낳지 못한 여자’ 취급을 받는 것이 너무도 미안했다. 실제로 부친이 휘두르는 폭력의 이유에는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가 곁들여지는 일이 많았다. 김지은은 자주 생각했다.


‘내가 아들이었다면. 내가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실제로 이 생각은 근거가 있었다. 부친은 오 형제 중 넷째였는데, 셋째 형과 쌍둥이였다. 셋째 형은 아들 하나만 두었다. 김지은과 여섯 살 차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터’의 ‘ㅌ’자도 듣지 않고 살았다. 오직 성별이 남자라는 이유로 그 아이와 그 모친은 아무런 구박도 받지 않고 가슴을 펴고 다녔다. 조모의 방에는 벌거벗은 그 아이가 ‘남성기’를 드러내고 찍은 사진만이 자랑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김지은의 사진은 당연히 그 어떤 것도 걸리지 않았다. 김지은은 남몰래 그 아이를 부러워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허전한 아랫도리를 저주했다.


김지은 부친은 자신의 모친을 모셨다. 그래서인지 넷째 며느리인 김지은 모친은 실질적인 맏며느리 역할을 죄 감당해야 했다. 그 시대 여자들이 으레 그랬듯, 집안일을 전담하고 밖에서 돈도 벌고 자식도 키우고 남편도 챙기고 시어머니도 봉양했다. 김지은의 눈에 모친의 역할 수행은 완벽했다. 딱 하나, 아들 낳는 것만 빼고. 하지만 그 하나는 나머지 모든 것을 상쇄했다. 김지은 모친은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모진 구박을 받았다. 하지만 어린 김지은 눈에 이상하게 비친 것은, 모친조차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 교회에 헌신했고 눈물로 기도했다.


그런 모친 옆에서 어린 김지은도 ‘남동생’을 달라고 무릎 꿇고 기도했다. ‘부르짖는 자에게는 반드시 주신다’는 그분에게,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그러나 두 여자의 부르짖음이 부족했던 탓인지, 아니면 사실 ‘주는’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 끝내 남동생이 생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지은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싫었다. 자신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싫기 이전부터 그랬다. 사춘기가 되어 초경을 하던 날, 김지은이 느낀 절망감은 아직도 생생했다. 열다섯 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였기에, 사실 김지은은 자신이 아예 월경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걸 바랐다. 월경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일종의 ‘낙인’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월경’이라는 낙인은 붉고 아팠다. 낙인을 찍힌 이상 지울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법. 김지은은 그날 밤, 오래 울었다.


훗날 삼십 대에 지병으로 자궁 적출 수술을 받고서, 김지은은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수술 직후에 쓴 일기 제목은 ‘자궁은 나일 수 없다’였다. 김지은은 살면서 다른 훌륭한 무언가로 인정받기를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딸이라서 부정당하고, 아들이라서 추앙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저 오롯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존중받고 싶었다. 적어도 모친만이라도 그리 해 주기를, 바랐다.


존재란 고유하다. 이미 존재한 이상 아무리 애써도 지울 수도, 바꿀 수도 없다. 하지만 김지은은 평생 자신의 존재를 지우거나 바꾸기 위해 애썼다. 그것이 헛된 노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좀처럼 노력을 거둘 수 없었다. 존재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건 존재 자신이 아니다. 김지은은 생애 초기부터, ‘타의’에 의해 철저히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부정당했다. 어느덧 타의는 자의의 옷을 갈아입었다. 타인보다 자기 자신이 더 집요하고 악랄할 수 있다는 것을, 김지은은 깨달았다.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잠시도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김지은은 ‘터를 팔지 못한 이기적인’ 자신을 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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