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언 Apr 29. 2023

6. 방언

픽션과 논픽션 사이

김지은은 모친에게 저지를 죄를, 진 빚을 갚을 길이 없었다. 그 생각만 해도 자그마한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부친의 광기 어린 폭력을 막아 줄 수도, 남동생을 만들어 줄 수도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김지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모친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를 자신도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모친은 그것을 원했다. 


모친에게 절대적인 존재는 ‘아버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모친의 사랑과 신뢰는 말 그대로 절대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김지은의 뒤틀린 몸을 ‘정상’으로 되돌려 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모친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모친은 좀처럼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 없는 삶을 산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모친에 따르면, 김지은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것은 ‘착한 심성’을 주신 하나님 덕분이었다. 공부를 곧잘 하는 것 또한 ‘명석한 머리’를 주신 하나님 덕분이었다. 김지은 또한 완전히 이 의견에 동의했다. 김지은은 하나님이 살펴 주지 않았다면 죽은 목숨이었고, 못된 아이였고, 잘하는 것 하나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다.


아침잠이 많았지만 ‘주일’에도 일찍 일어나 교회 가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성경을 암송하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무엇보다 모친이 흐뭇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주일뿐만이 아니었다. ‘기독교대한감리교’라는 명패를 붙인 교회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평일 오후 두 시 반, 매일 예배가 열렸다. 그들은 그것을 ‘두시 반 예배’라고 불렀다. 김지은은 모친 손에 이끌려 두 시 반 예배에 참석하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까? 그날 예배를 김지은은 잊을 수 없으리라.


언젠가부터 모친은 어린 김지은이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성경에 따르면 방언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이자, 믿음의 증표였다. 특히 두 시 반 예배에 모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말로 울부짖으며 기도하곤 했다. 그 ‘알 수 없는 말’이 바로 은혜의 상징인, 방언이었다. 김지은은 모친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깟 방언쯤이야, 뭐가 어렵겠는가. 


그럼 김지은의 마음이 무색하게도, 안수기도를 받고 어른들 속에 섞여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꼭 쥐고 눈물 콧물을 짜며 기도했지만 혀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권사님의 오른손이 김지은의 입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권사님은 방언을 받기 위해 안간힘 쓰는 김지은의 입에 ‘기꺼이’ 자신의 손을 넣고 혀를 주물렀다. 김지은은 욕지기가 일었지만 간신히 참고 기도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분명한 표의(表意)를 지닌 것이었다. 방언을 하려면 표의를 잃어야 했다. 그때, 이제 갓 열 살을 넘긴 김지은은 작정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이들이 하던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모방’했다. 그제야 권사님의 손이 입에서 빠져나갔다. 김지은의 소리는 점점 커졌다. 비로소 권사님의 표정은 누그러졌고 모친은 ‘아멘! 아멘!’을 외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모친을 기쁘게 하는 일이 이리도 쉬운 것이었다면, 그 오랜 세월 용쓰지는 않았을 거라고, 김지은은 생각했다. 


‘진작 그냥 흉내 낼걸….’


김지은은 더욱 큰 소리로 방언을 흉내 내는 한편으로, 너무도 능숙히 거짓을 연기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모친의 말에 이내 안도했다. 


“역시, 우리 딸은 하나님이 택한 자손이었어.”


그때 김지은의 얼굴을 타고 내리는 눈물이 모친을 만족시켰다는 안도였는지, 연기까지 해야 하는 자기 신세에 대한 슬픔이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모친에게 사랑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히 알게 되었다. 마음이 놓였다.

이전 07화 5. 오각형의 밀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