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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언 Apr 29. 2023

7. 'HAPPY' Birthday

픽션과 논픽션 사이

※이 글에는 폭력 장면 묘사가 있습니다. 




보통의 삶에서 당연한 일들을 김지은은 당연히 생각할 수 없어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우선 매년 겪어야 하는 일은 생일을 ‘축하’하는 행위였다. ‘생일’이 왜 ‘축하’받아야 하고, ‘birthday’는 또 어째서 ‘happy’한지, 김지은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괜찮았다. 존재는 존중받아야 하니까. 그게 김지은의 믿음이니까. 하지만 김지은에게 자신은 존재가 아니었다. 부재였으면 좋았을, 존재도 부재도 아닌 그 어디쯤이었다. 그러니 그 규칙은 적용될 수 없었다. 

김지은의 열여섯 생일은 특별했다. 좀처럼 생일을 밝히는 일 없었지만, 그때는 단짝 친구에게 생일을 알렸다. 친구는 생일이 되는 날 밤 열두 시 정각에 전화로 축하 노래를 불러 주겠다고 했다. 김지은은 어색하면서도 기뻤다. 생일 전야에, 김지은은 거실에 있는 집 전화 주변을 얼쩡거렸다. TV를 보는 부친 곁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불안했지만,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독였다. 

자꾸만 전화기로 시선을 주는 딸이 낯설었는지, 부친이 물었다.

“뭐 하냐?”

“아, 친구가 생일이라고 전화해 주기로 해서….”

이어서 부친은 입꼬리를 히쭉 올리더니 말했다.

“미친년들 염병을 허네.”

그 순간, 김지은은 자신 안의 안전핀이 뽑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 또한 알았다. 김지은은 벽면에 꽂힌 전화선을 거칠게 뽑아내고는 전화기를 들어 거실 저편으로 내던졌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보기만 했는데도’ 폭력은 정확히 학습되었다. ‘발현’이 늦었을 뿐. 김지은은 그 사실에 좌절했다. 

부친의 눈은 돌아갔고, 자기 분노를 어쩌지 못해서 펄펄 뛰었다. ‘미친년’을 능가하는 쌍시옷이 난무하는 욕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 모친이 김지은을 향해 원망스러운 눈으로 소리질렀다.

“가시네야, 니는 진짜, 왜 그냐! 아빠는 느그 하는 짓이 오징께 안 그냐!”

순간, 김지은은 얼어붙었다. 부친의 마음을 읽어 내는 데, 또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친의 표현에 따르면 ‘징하게도 융통성이 없는 애’인 것이다. 부친은 그저 욕이 입에 붙은 사람이어서 그렇지 정이 없거나 딸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닌데. 부친의 ‘미친년들’은 ‘귀여운 것들’이라는 말에 다름 아닌데. 부친에게 밥을 얻어먹고 잘 곳을 제공받고 공부하는 주제에 ‘감히’ 부친에게 ‘반항’한 열여섯 사춘기 딸이 그들 눈에 곱게 비칠 리 없었다.

무엇보다 모친은 오랜만에 평화롭던 집안을 공포 분위기로 뒤바꿔 버린 딸에게 분노했다. 부친의 분노는 본인조차도 끌 수 없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딸이 ‘건방지게도’ 그런 짓을 했으니 모친이 화를 참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폭력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수직으로 이어진 사슬과 같았다. 빗물처럼 아래로만 떨어졌다. 하여, 남편의 폭력을 당한 모친의 폭력이 다시 부친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모친은 자연스레 더 ‘약한’ 고리를 찾았다. 이 가족의 가장 약한 고리는 당연히, 김지은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라는 권력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부모는 자식을 죽여도 가중 처벌되지 않지만, 자식은 부모를 살해하면 ‘패륜아’라는 낙인이 찍힐 뿐 아니라 처벌도 중해진다. 처음부터 강자와 약자는 엄격히 구분된다. 김지은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순식간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나, ‘너 하나 보고 산다’는 말로 스스로를 약자로 둔갑시킬 때에도, 김지은은 속지 않았다. 속지 않으려 애썼다.

사실 이때 김지은을 가장 괴롭힌 것은, 버젓이 자라나 버린 ‘폭력’의 싹이었다. 물건을 던져 깨부술 수 있을 정도의 폭력은 금세 타인을 향한 ‘직접적’ 폭력으로 자랄 것이었다. 김지은은 때때로 자신 안의 까맣고 단단한 씨앗을 보았다. 하지만 애써 외면했다. 혹여나 그 씨앗이 싹을 틔울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순간을 대면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지은의 ‘폭발’은 부모에게는 사춘기 소녀의 작은 ‘반항’으로 취급되었다. 작고 왜소한 ‘딸’의 폭력이 그들에게 위협이 될 리 만무했다. 그들은 빠르게 그 일을 잊었다. ‘우리 딸은 착해. 말을 잘 듣지’라는 프레임에서 내 딸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또 하나 김지은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생일이라고 해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면서도, 미역국은 꼭 먹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비린내를 힘겨워해서 생선 미역국을 좋아하지 않는 김지은의 취향보다는 ‘이게 얼마나 좋은 건데’로 밀어붙이곤 하는 모친이 과연 그날은 김지은이 좋아하는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김지은은 미역국을 생각하면, 자신이 태어나던 날, 생판 모르는 사람이 보다 못해 모친에게 가져다주었다는 미역국이 떠올랐다. 김지은에게 미역국은 더는 일반명사가 아니었다. ‘특정한 그 날의 소품’이었다. 그러니 소고기 미역국이든 생선 미역국이든 절대로 기쁜 마음으로는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김지은은 자신의 생일에 모친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날은 모친이 아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아이를, 그것도 성치 않은 딸을 조산한 날이자, 세상에서 버려지는 경험을 한 날이자, 자신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두들겨 패는 남자와 살 수밖에 없게 만든 날이기 때문이다. 

김지은은 다른 존재를 무참하게 짓밟으면서까지 존재할 만큼, 자신이 가치 있지 않다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김지은에게 생일이란 그 사실을 가장 깊고 진하게 곱씹는 하루이기도 했다. 김지은은 생일이 되면 자신이 아직도 존재하는 데 실망했고, 이듬해 생일에는 부디 자신이 ‘부재’하기를 바랐다.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김지은이 쌩쌩 달리는 트럭을 좀처럼 피하지 않게 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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