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여기저기 그늘진 곳에 버짐처럼 눈이 남았을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천강은 햇볕을 따라 걷다가 조금씩 집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차츰 마을 길을 따라 산책을 다니게 되었다.
월인은 항상 멀찌감치 떨어져서 천강을 뒤따라갔다. 처음엔 월인도 천강과 함께 산책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천강이 월인을 경계하고 싫어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멀찌감치 떨어져 천강을 뒤따라 갔고 천강이 불쑥 돌아보면 허리를 숙이거나 등을 돌리고 딴전을 피워야 했다.
마을 어귀에 이르러 천강은 걸음을 멈추고 식물원 안을 기웃거렸다. 마침 야생화 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숙희가 천강을 먼저 발견하고 달려 나왔다.
천강은 숙희가 내미는 손을 잡고 식물원 안으로 들어갔다.
'안 들어오고 뭐해요.'
숙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월인은 식물원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숙희가 환하게 웃으며 재촉하지 않았다면 월인은 그냥 문밖에 서서 천강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바깥과 달리 식물원 안은 습하고 따스했다. 천강과는 의자 두 개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낡고 오래된 원목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숙희가 커피를 내어왔다.
키가 훤칠하게 큰 숙희의 남편 경수는 이웃으로서 인사만 겨우 나누고 다시 쪼그려 앉아 분갈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경수 주변에는 쏟아놓은 흙더미와 거름, 퇴비, 빈 화분, 흙이 엎질러진 화분, 비닐봉지, 철사 따위가 널려 있어 어지러웠다. 숙희는 집에 왔을 때처럼 수다스럽지 않았다. 대신 숙희는 커피를 마시다가도 분갈이에 필요한 것을 가위로 잘라다 주기도 하고 필요하다 싶은 화분을 남편 경수 옆에 가져다 놓기도 했다. 알아서 잘 챙겨주는 숙희의 모습이 영락없는 내조의 여왕 같았다.
천강은 커피 잔을 내버려 둔 채 뭔가에 이끌리듯 숙희의 남편 경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숙희 남편 경수 옆에 바짝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조심성이나 경계심은 없었다.
- 선생님도 한 번 심어 보실래요. 선생님이 심으신 건 선생님 드릴게요.
경수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왜 그런지 월인은 경수와 천강을 바라보고 있기가 불편했다. 월인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안쪽 어두운 통로를 지나 옆쪽 식물원으로 건너갔다.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 열대 식물이 가득 차 있는 그곳은 더욱 습했다. 하우스 끝 천장까지 치솟은 바오밥나무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숙희가 산 아랫길로 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다가와 월인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의 젖무덤 안으로 집어넣었다. 땀으로 끈적하게 젖어 있었고 불쾌하게 여겨질 정도로 미적지근했다. 놀란 월인이 얼른 손을 빼냈다.
숙희가 소리 없이 웃으며 월인을 바라보다가 급히 몸을 돌려 다시 산 아랫길 문을 열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얼마쯤 후, 식물원 바깥쪽으로 나가는 동굴처럼 어두운 통로 쪽에서 숙희 남편 경수와 천강이 나란히 나타났다. 천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경수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결벽에 가까울 만큼 남자들을 조심할 뿐만 아니라 경계하던 천강이었다. 그런데 천강에게 조심성은커녕 경계심조차 없었다. 월인에게는 너무 낯선, 낯설어서 타인 같은 천강이었다. 그러니 질투심마저 일지 않았다.
- 아가베아테누아타, 선생님도 따라 해 보세요.
경수는 식물원 입구에 생뚱맞게 서 있는 키가 큰 나무 앞에 천강을 세워놓고 말하면서 월인을 쳐다봤다. 아픈 당신의 아내를 내가 이렇게 자상하게 받아주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 아가베아테누아타! 언제 꽃이 피는 거예요?
천강은 경수의 팔짱을 낀 채 나무를 올려다봤다.
- 꽃을 피우려면, 그러니까 꽃이 보고 싶으면 말라죽기 직전까지 물도 주지 않고 햇볕에 내놓으면 돼요.
경수가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을 때 동굴 같은 식물원 통로로 숙희가 들어왔다. 천강은 경수의 팔짱을 낀 채 숙희를 보고 살짝 웃었다. 경수는 화난 표정으로 숙희를 일별 했다.
- 저, 마을에 잠깐 다녀올게요. 어머니가 왔다가래요.
숙희는 무표정하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이내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 천강 씨, 금방 올게.
천강에게 말은 하지만 시선은 월인을 보고 있었다. 남편 등 뒤에서 살짝 웃음 짓는 숙희의 얼굴을 월인은 못 본 척 외면했다.
- 숙희야, 이 아가베나무에는 물 주지 마라.
식물원 밖으로 나가는 동굴 같은 어둠침침한 통로로 숙희가 모습을 감추기 직전에 경수가 소리쳤다.
- 왜요!
숙희가 얼굴을 돌리고 경수를 쳐다봤다. 어둠과 빛의 경계에 숙희는 서 있었다.
- 왜요는 무슨 그렇게 하라면 해.
경수는 숙희를 쳐다보지 않고 소리쳤다.
-알았어요.
숙희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 월인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 아마 여름쯤이면 아가베가 꽃이 피는 걸 보게 될 겁니다.
경수는 천강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 여기 있는 화분이 전부 바오밥나무입니다.
몇 걸음 옮긴 경수가 천강을 내려다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마치 딸에게 하는 것 같은 말투지만 눈빛은 이리가 양을 노리는 것처럼 음탕하고 음험하기 짝이 없다고 월인은 생각했다. 그렇다고 천강을 떼어낼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시도를 하면 천강이 발악을 하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
- 아, 바오밥나무.
월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월인도 그제야 나무둥치가 오크통처럼 굵고 키가 큰 바오밥나무 양 옆으로 놓인 크고 작은 화분과 분재들이 모두 바오밥나무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 우리처럼 바오밥나무도 아프리카에서 왔죠.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왔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바오밥나무처럼 아프리카에서 온 거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프리카의 야성이 내장되어 있어요.
아프리카에 육천 살이 넘는 바오밥나무가 있습니다. 그 바오밥나무 속에서 사람이 살 수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실제로 바오밥나무 안에 와인을 파는 술집이 있어요. 몸통 둘레가 삼십삼 미터나 되거든요.
경수가 말하는 동안 천강은 고개를 쳐들고 큰 바오밥나무 꼭대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 오늘 개강이에요. 천강 씨 어서 준비하고 나와요. 얼굴은 안 찍어 발라도 예쁘니까 옷만 갈아입으면 되겠네.
숙희의 말에 월인은 퍼뜩 생각에서 깨어난다.
- 기타를 사놓았어야 하는데.
월인은 자신을 준비성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숙희가 얄밉다.
- 나한테 딸이 치던 기타 하나 있어서 가져왔어요. 우선 그걸로 치다가 실력이 늘면 그때 가서 하나 사요. 천강 씨한테 취미가 없으면 괜히 낭비잖아요.
숙희의 말이 끝나기 전에 천강은 벌써 정원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 기타 선생은 젊고 잘 생겼어요. 실력도 최고고요.
천강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숙희가 월인을 향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바짝 다가선다.
- 어쩌면 천강 씨도 기타 선생한테 홀딱 반할지 몰라요. 기타 선생이 가까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고 주법을 가르쳐주면 얼마나 황홀한지 몰라요. 어떤 남자가 이렇게 거칠고 못생긴 제 손을 잡아주겠어요. 기타 교실이 아니라면 나 같은 시골 아줌마를 젊고 잘생긴 남자가 쳐다나 봐주겠어요. 솔직히 난 그 선생한테 손 잡히는 재미로 가요. 기타 선생이 등 뒤에 서서 내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고 쿵짜작 쿵짜작 하면서 기타 줄을 튕기면 숨이 턱턱 막힌다니까요. 가끔씩 속에서 썩은 냄새가 나서 그렇지........
숙희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젖힌다.
- 천강 씨 걱정은 마세요. 천강 씨가 늘씬하고 예쁘긴 하지만 젊고 잘생긴 기타 선생이 우리 같은 유부녀를 좋아하겠어요. 기타가 바람둥이이긴 해도 우리는 아니죠. 그 남자는 젊은 아가씨만 좋아해요. 그렇지만 혹시라도 천강 씨한테 집적거리면 내가 모가지를 비틀어버릴게요.
숙희의 어투는 가볍고 수다스럽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듣기 좋게 낭랑하다. 월인으로서는 그런 숙희의 목소리가 그나마 다행스럽다. 가라앉은 목소리, 진지하고 근심에 찬 목소리라면 월인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천강이 나오지 않는다. 월인과 숙희 둘 다 천강이 그냥 방에 들어가 누워버린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이다. 마침내 천강이 빨강 바바리코트를 입고 나온다. 머리는 공들여 빗어 올리고 핀을 꽂았다. 그래서인지 턱 선이 도드라져 보이고 볼이 홀쭉한 것이 야위어 보인다.
민무늬의 평범해 보이는 검은색 구두는 제법 굽이 높아 천강의 키를 훌쩍 키워 놓았다. 그러나 화장을 안 한 얼굴이다. 그래도 피부는 분을 바른 듯 희고 입술은 붉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아래 인중이 갑자기 선명해 보인다. 천강은 새로 산 옷들을 버려두고 굳이 입던 옷을 골라 입었다. 빨간색 코트 아래로 내려온 감색 치마 역시 새로 산 것이 아니다.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고 다가오던 천강이 조심스럽게 월인을 쳐다본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서먹서먹한 눈길이다. 하지만 다시 눈을 내리깐 천강은 발아래만 쳐다보며 걸음을 뗀다. 수줍은 소녀 같다.
월인 앞을 지나치면서도 천강은 눈길을 주지 않는다. 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도 무심하다.
- 갔다 올게요.
숙희가 대신 함박 웃으며 손을 흔든다.
- 예쁜 머리를 왜 틀어 올렸어. 머리를 풀지. 나이 들어 보이잖아.
숙희의 말에 천강은 눈을 치켜들었다 내리깐다.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다. 차에 올라타는 천강을 월인은 어색하게 지켜본다. 검정 스타킹을 신은 천강의 종아리가 왠지 낯설다. 천강은 월인에게 끝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자동차 문이 닫히고 나자 숙희가 머리를 풀라고 다시 천강에게 말하는 것 같다. 천강은 숙희를 바라보며 머리핀을 빼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환하게 웃는다. 천강의 어깨 위로 치렁치렁 내려온 갈색 머리카락이 풍성하다.
차가 출발할 때까지, 끝내 천강은 돌아보지 않는다. 투가 멀어져 가는 차를 향해 컹 하고 한번 짖는다.
장작을 패는 내내 월인의 마음은 불안하고 불길하다. 알 수 없는 죄책감마저 든다. 장작을 리어카 가득 싣고 마당을 가로질러 가서 거실에 쌓는다. 벽난로 옆에 쌓고 남은 장작은 창고 벽에 기대어 쌓는다. 비어 있던 창고 귀퉁이가 장작으로 채워진다. 창고 바닥엔 톱밥만 남는다. 월인은 톱밥을 쓸어 담지 않고 나이 많은 투가 뒹굴고 놀기 좋게 바닥에 편편하게 깐다. 물끄러미 월인을 바라보고 있던 투가 바깥을 보고 짖으며 달려 나간다.
- 학교 다녀왔습니다.
거의 동시에 해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반갑다.
- 우리 딸, 왔구나.
덤덤하게 말하려고 하는 데 이유도 없이 목이 멘다.
- 아빠, 왜 우세요.
해주는 아빠의 눈가가 젖어 있는 것을 본다.
- 울긴 왜 울어. 치우다가 티끌이 들어가서 그런 거지. 우리 딸 한 번 안아보자.
월인은 무릎을 꿇고 앉아 해주를 꼭 껴안는다. 편안하고 아득한 느낌이다.
- 엄마는요?
- 응, 조금 전에 기타 배우러 가셨어. 식물원 아주머니하고 함께.
월인은 어린것에게 위로를 받는다.
- 기타 배우러요!
- 응, 오늘 갑자기 가게 돼서 해주한테는 말을 못 했네.
- 그럼 엄마 다 나은 거예요.
- 그건 아니고 치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배우는 거야.
월인은 해주의 어깨에 매달린 책가방을 든다.
- 네에, 엄마가 얼른 나으면 좋겠어요.
- 그럴 거야. 엄마는 강한 분이니까.
- 엄마 때문에 힘드셔서 우신 거예요?
- 사실은 엄마가 차 타고 가버리고 나니까 조금 슬펐는데 지금은 해주가 옆에 있어서 괜찮아. 아빠가 요즘 감상적인 것 같구나, 그렇지 딸아.
- 감상적인 게 뭐예요?
- 음, 마음속으로 아파하거나 슬퍼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지.
- 어쩐지 아빠가 슬퍼 보였어요.
- 지금도!
- 요즘은 아빠가 항상 외로워 보여요.
- 아니야.
-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 이렇게 웃는데.
월인은 활짝 웃어 보인다.
- 아빠의 웃음은 어쩐지 슬퍼요.
- 미안하구나.
- 괜찮아요, 아빠. 엄마가 저렇게 되셔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기억을 잃어버리셔서.......
- 이해해줘서 고맙다.
월인은 해주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그렇게 둘이서 나란히 디딤돌을 따라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장모가 뒤에서 해주를 부른다. 해주는 할머니를 부르며 다가가 손을 잡는다. 장모는 해주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군것질은 했는지 등 이것저것 묻는다.
월인은 장모가 거실로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천강이 기타 배우러 숙희와 갔다고 알려준다. 해주가 할머니도 몰랐어요, 라며 묻지만 그 말에는 대답도 안 하고 숙희와 간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며 투덜거린다.
장모는 의사도 못 고치는 병을 기타 배운다고 고쳐지겠냐며 시답잖아한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엄마를 어떻게 몰라. 몰라도 알아야지. 저하고 나 사이는 천륜인데.'
언제나처럼 장모는 자기를 생판 모르는 남 취급하는 딸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후회하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일부러 그럴 이유가 티끌만큼도 없는데....... 내 딸이어서가 아니라 똑똑하지, 예쁘지, 남편 잘 만났지, 어디 하나 부족한 데가 있어야지. 평생 살면서 단 한 번도 속을 썩여 본 적 없는 애가....... 아무리 머리를 다쳤다고 해도 무슨 병이, 저런 병이 다 있겠어.'
장모는 괜히 해주를 앞세워 욕실로 향한다.
'착한 사람이 비명횡사한다더니, 이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장모는 욕실 문이 닫힐 때까지도 탄식을 멈추지 않는다.
욕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월인은 천강이 혼자 쓰고 있는 방, 그러니까 자신과 천강이 함께 쓰던 안방 문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긴다.
자연스럽게 출입할 수 없게 되어버린 방이다. 방문이 열리자 그립고 아쉬운 천강의 향기가 어지럽게 전신을 감싸고돈다. 고요한 충격에 빠진 월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다.
천강이 입김을 뿜으며 자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다. 당연하게 들어와 눕던 방. 들어오지 않고 서재에 머물러 있으면 천강이 재촉해서 불러들이던 방. 그러나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방.
예전처럼 천강의 화장대 위엔 아무것도 없다. 천강은 여전히 화장품들을 서랍에 넣어놓고 쓸 때만 꺼내놓는 것 같다.
커튼은 보기 좋게 양옆으로 묶여 있고 침대 테이블 위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다. 월인은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가 쓰다듬는다. 손끝에서 천강의 피부가 느껴지는 것 같다. 그토록 그립던 천강의 살이다. 마치 금지된 구역에 들어와 타인의 은밀한 곳을 훔쳐보는 것처럼 가슴이 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