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7. 봄바람이 부는 날

by 이세벽

철없이 벙싯거리며 볼을 들이대던 어린 매화가 위험천만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람은 기어코 매화의 볼을 사정없이 할퀸다. 매화의 살점이 뜯겨 나가고 피비린내가 허공으로 자욱이 번진다. 외로운 울음이다.


정원 그네에 앉아 있던 월인은 귀를 막으려다 말고 팔짱을 낀다.


피 냄새는 환취일 테고 울음소리는 환청일 테다.


천강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데 왜 전에 없이 헛것들이 보이고 분노가 이는 건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사납습니다. 언젠가는 폭발하고 말 겁니다.'

월인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고 난 의사는 갑상선 항진증입니다,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며칠 전 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건 줄 알면서도 월인은 물었다.


'그게 사나움의 원인이라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죠. 살이 빠지고, 설사 아무리 많이 먹는다고 해도 살이 찌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되며, 쉽게 흥분하고, 난폭해지죠.'

의사는 대답했다.


월인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월인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일이다.


돌계단을 딛고 정원으로 내려서는데 바람이 달려든다.


월인은 가볍게 머리를 젖혀 바람을 피해 본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는 손가락으로 이마와 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정원 디딤돌을 따라 걸어 나온다.


디딤돌은 대문 없는 대문 앞에서 끝난다. 디딤돌이 끝나는 그곳을 대문이라고 부를 뿐 대문은 없다.

애당초 담을 쌓지 않았고 대문을 달지 않았으니 대문이 있었던 흔적도 없다.


그는 마지막 디딤돌 위에서 더 이상 걸음을 떼지 못하고 서 있다. 마치 천강에게서 더 이상 멀어질 수 없도록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인 사람처럼.


마을 어디에도 인적이 없다. 어쩌다 모습을 드러내곤 하던 할머니들도, 호기심에서든 길을 잘못 들어서든 우연히 들러 마을을 한 바퀴 돌아나가는 외지 차량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꼭대기 집에서 놓아 키우는 개들도 요 며칠 조용하다. 하릴없이 정원을 서성이고 있으면 그 개들은 이방인처럼 멀찌감치 서서 월인을 지켜보곤 했는데.


장모가 서울에서 오실 때 데려온 애완견 투도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투는 어쩌다 꼭대기 집 개들이 정원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으면 쫓아내려고 맹렬하게 달려가 짖었다. 하지만 투보다 덩치가 몇 배는 큰 꼭대기 집 개들은 투를 무시해버리고 딴전을 피웠다.


투의 극성에 못 이겨 개들이 정원에 들였던 발을 빼내긴 하지만 자기들끼리 장난치며 투를 완전히 무시해버림으로써 오히려 투를 맥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덩치 큰 개들을 길로 내쫓고 돌아오면서도 한 번씩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짐짓 거만하게 장난치고 있는 개들을 바라보던 투.


그러나 동네 개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투가 외로워 보였다.


투가 장모를 따라 뒷집에 갔을 리는 없다. 정원이 투의 영역이라면 뒷집은 꼭대기 집 개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주 집을 비우는 꼭대기 집 남자 재욱 대신 뒷집 할머니가 먹이를 주다 보니 절반은 뒷집 할머니 개가 되었고 그곳도 자연스럽게 그 개들의 영역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장모가 거기 있다고 해도 투가 따라갔을 것 같지는 않다. 영역에 대한 구분이 분명한 투는 장모를 따라 나갔다가도 뒷집 대문 앞에서 슬그머니 돌아섰다. 월인은 그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마을에 있는 개들 대부분은 영역보다는 서열을 중요시하는데, 그런 것 같은데 투에게는 자기 영역과 자기 영역 밖만 존재한다.


누가 봐도 서열 1위인 의젓한 황구는 투의 그런 점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긴다. 월인의 눈에도 그게 보였다.


황구는 일단 서열을 인정한 개들에게는 관대하여 면전에서 까부는 것도 애교로 봐 넘기고 때론 먹을 것을 양보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열을 인정하지 않는 투에 대해서 황구가 아직까지 어떤 태도를 보인 적은 없다.

진돗개일지도 모르는 황구가 멀찌감치 서서 투를 노려보다가 자리를 뜰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위협이었다.


투는 그것을 못 느끼는 것 같았지만 월인은 어떤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투의 행방을 찾으려고 월인은 먼 곳으로 시선을 휘돌린다. 사나운 담배집 개도 그렇지만 공방 집 개 역시 언제나 사슬에 묶인 채 짖음으로 존재를 알린다.


좀처럼 정원을 벗어나지 않는 투가 거기까지 갔을 턱이 없다.


- 투, 투~

월인은 나지막하게 투를 부른다.


'은진아, 네가 투라고 이름 지었어.'


처음 키우던 개가 죽고 두 번째 키우는 아이라서 투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장모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장모는 종종 자기마저 못 알아보는 천강을 서운해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사지육신 다 멀쩡하고 말하고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할 건 다하는데 어째서 엄마를 못 알아보니. 못 알아본다고 해도 그렇지 너를 낳은 엄만데 어떻게 그렇게 생판 남 같니?'

그러고도 마음이 안 좋으면 장모는 월인이 들으라고 한 번씩 장탄식을 늘어놓곤 한다.


'뭐 하러 그 좋은 직장 다 집어치우고 이 시골 골짜기까지 오긴 와. 변호사가 식당이 다 뭐니. 남편이 아무리 좋아해도 말렸어야지. 멀쩡히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을 그 미친 트럭 운전사는 왜 밀어붙여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그래 놓고 징역도 안 가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긴 한 거니. 보험만 들면 사람을 죽여도 되는 세상이 괜찮은 거니.'


장모는 천강을 치고 달아났던 덤프트럭 운전사가 아직도 구속되지 않은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게다가 월인이 전직 검사씩이나 되면서 자기 아내를 저 꼴로 만든 사람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는 것만 같아 야속한 것이다.


'제가 전직 검사라거나 변호사였다는 말씀은 동네 사람들에게 하지 마세요.'


언젠가 월인이 노파심에서 슬쩍 말을 꺼냈을 때였다.


'전직 검사가 식당 한다고 하면 무슨 큰 비리라도 저지르고 숨어 사는 줄 알 텐데 뭐 하러 그런 말을 하겠나. 말 많은 시골 사람들한테. 창피해서 하라고 해도 안 하네.'


장모는 언짢은 마음을 드러냈다.


- 투~

월인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기 전이다. 투는 집 뒤에서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머리를 조아리며 작은 몸뚱이가 중심을 잃을 정도로 꼬리를 흔들어대는 투를 월인은 쪼그려 앉아 쓰다듬어준다.

투의 몸에는 톱밥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월인은 투의 몸에 묻은 톱밥을 일일이 뜯어낸다.


투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곤 한다.


투의 몸에서 톱밥을 다 뜯어낸 월인은 손을 털고 일어난다. 그리고 창고로 향한다. 투가 재빨리 앞장선다.

창고 앞으로 다가서자 익숙한 참나무 향이 날 것으로 올라온다.


창고 주변에는 댕강댕강 몸뚱어리가 잘려나간 참나무가 사방으로 흩어져 나뒹군다.


유혈이 낭자할 것 같은 참상이다.


아침나절 통나무를 베다가 천강의 늦은 아침을 차려주느라고 내팽개쳐 두었던 것이다.

월인은 엔진톱을 켜고 시동을 건다.


시골에는 늦봄까지 아침저녁으로 한기가 든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벽난로를 피워야 한다. 앞으로 한 달 여를 쓸 장작을 준비하고 나면 한동안 나무 자를 일이 없을 것이다.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톱날을 땅바닥에 누워 있는 통나무에 갖다 댄다. 순식간에 톱날이 참나무 몸뚱어리 속으로 파고든다. 공회전할 때와 달리 비명소리가 난다. 톱밥이 피처럼 사방으로 튕겨 쌓인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사체로 드러누워 있던 참나무가 동강 난다.


생뚱맞게도 동강 난 참나무는 또 다른 생명이 깃든 무엇처럼 여겨진다. 마치 새롭게 태어난 존재 같다.

창고 앞에 엎드려 월인이 하는 양을 쳐다보고 있던 투가 벌떡 일어나 길로 나간다.


월인은 이마에 맺힌 땀을 장갑 낀 손등으로 문질러 닦는다.


길 저편으로 사라졌던 투가 먼저 나타나고 뒤이어 천강이 창고 앞으로 다가온다. 월인은 엔진톱을 끈다.


- 아저씨, 저도 도울게요.


- 천강 씨가 도울 일 없어요.


- 장작을 리어카에 실어 나르는 건 저도 할 수 있어요.


- 바퀴가 세 개뿐이어서 균형 잡기 힘들어요.


-.......


- 내가 도끼로 쪼개 놓으면 리어카에 실어요. 싣기만 해요.


삐친 천강의 얼굴을 본 월인은 얼른 말을 바꾼다.


천강은 신나서 장작을 집어 리어카에 싣는다.


월인은 두 손으로 도끼를 움켜잡고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가 힘껏 내려친다.


어떤 것은 단번에 쩍 소리를 내며 두 쪽으로 갈라져 나뒹굴지만 어떤 것은 도끼를 몇 번씩 내리쳐도 잘 쪼개지지 않는다.


천강이 두 손으로 장작을 집어 들고 허리를 펴는데 사나운 봄바람이 천강의 머리카락을 마구 뒤헝클어버린다.


손에 들고 있던 장작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데 길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천강은 길로 시선을 돌린다.


숙희 차다.


- 천강 씨가 일을 다 하네.

차에서 내린 숙희가 천강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다가 월인을 쳐다보고 활짝 웃는다.


월인은 숙희의 과장된 눈웃음을 못 본 척 외면한다.


가끔씩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 취기가 한껏 오른 목소리.


'저 혼자 식물원에서 술 마시고 있어요. 전 힘들 때면 바오밥나무들 하고 이렇게 앉아서 술을 마셔요. 남편 몰래 위스키를 사서 식물원 냉장고에 숨겨두었으니까 사장님도 언제든지 오셔서 꺼내 드세요. 좋은 건 아니고 박정희가 총 맞은 날 마셨다던 그거 시바스예요. 땅. 저도 때로는 총 맞고 싶어요.


요즘은 200미리짜리가 나와요. 우유 작은 팩 있죠. 그 정도 양일 거예요. 그걸 박스로 사서 넣어놓고 하나씩 꺼내 마시는 거예요. 좀 많이 마시는 날은 세 병까지 마시는데 대개는 한 병 정도 마시고 들어가 자요.


새벽에 젖을 짜러 나가야 할 때는 그 마저도 못 마셔요. 젖소한테 차일까 봐.


제가 젖소 젖이나 짜는 여자라고 너무 하찮게 보지는 마세요. 누군들 꿈이 없었겠어요. 저도 멋진 인생을 꿈꾼 적이 있어요. 사장님처럼 잘생긴 남자하고 연애도 하고 사장님처럼 좋은 집에서 살고 싶었어요.


이런 식물원 하고 식물원 딸린 집에서 살면서 새벽에 젖이나 짜러 다니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


그래도 제 삶에 만족해요. 제 주제를 아니까요. 제 주제에 이 정도면 감지덕지죠.


제 주제를 몰랐다면 이러고 살지 않았을지 몰라요. 저도 치장하고 나가면 예쁘단 소리 많이 들어요.


아, 내가 취했나 봐요. 아무튼, 사장님도 힘들 때 여기 오셔서 바오밥나무들하고 마셔보세요. 제가 없을 때 오셔도 돼요.


문은 항상 열려 있잖아요. 천강 씨랑 몇 번 와봤으니까 아실 거예요.'

하하 호호 저 혼자 지껄이고 사라지는 여자. 그 여자 숙희. 하지만 낮에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전혀 그런 일을, 그런 전화를 걸지 않은 듯 태연해서 월인은 자신이 꿈을 꾼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 천강 씨 데리러 왔어요.

오늘따라 차림새가 말끔한 숙희가 앞뒤 없는 말을 던진다. 옅은 화장까지 한 얼굴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제법 예쁘다.


-.......

뜬금없는 말에 월인은 어리둥절하다. 천강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다.

- 내가 미리 한 번 더 말해 줄걸. 천강 씨 기타 배우러 가기로 했잖아요. 며칠 전에 식물원에 놀러 와서 차 마실 때도 그러기로 해놓고, 잊은 거 아니죠! 사실은 저도 집을 나서다가 생각났어요.

봄바람이 사납게 휘젓고 지나가는 바람에 월인과 천강은 물론 숙희의 머리까지 마구 뒤헝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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