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9. 햇볕의 위악

by 이세벽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때 이른 더위 탓에 상의를 벗어 들고 반팔 차림으로 다니던 사람들이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벚꽃나무 아래로 뛰어든다.


뜨겁던 아스팔트 광장이 습한 먼지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젖는다.


벚꽃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던 사람들 몇몇이 광장 가득 울려 퍼지는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른다. 흥이 많은 사람은 손짓 발짓으로 장단을 맞추기도 한다.


사람들이 둘러앉은 견고한 나무 탁자 위에는 집에서 싸온 음식과 휴게소 매점에서 사 온 번데기, 구운 오징어, 군밤, 호떡 따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벚꽃나무 아래로 끼어들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매점으로 우산을 사러 간다.


매점 주인은 진작부터 우산을 꺼내놓았다. 그러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서 그냥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있다.

쓰고 있던 양산으로 비를 피하던 젊은 커플 한 쌍이 울타리에 기대 대청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광장 가장자리 무대에서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유행이 지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남자는 전자기타를 어깨에 둘러메고는 있지만 직접 연주하지는 않는다. 대신 챙이 넓은 모자를 눈썹 아래까지 눌러쓴 여자가 전자 오르간으로 반주를 한다.


아주 이따금씩 광장 곳곳에 놓인 불우이웃 돕기 모금함에 누군가 돈을 집어넣는다. 그때마다 남자가 노래를 부르다 말고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광장으로 울려 퍼진다. 그러고 보니 모금함들은 모두 그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에 놓여 있다.

어디선가 나타난 중년 여자가 비에도 아랑곳없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광장을 서성이고 있던 봄 점퍼 차림의 중년 사내도 가세를 한다. 그는 날렵한 발놀림과 세련된 춤사위로 광장의 시선을 순식간에 빨아들인다. 그러나 중년 사내는 곧 춤을 추다 말고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광장을 가로질러 간다. 잠깐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아쉬운 듯 그의 등을 쫓는다. 젊었을 때 돈 꽤나 버렸겠네, 마누라 속깨나 썩였겠는 걸, 하며 사라진 중년 사내를 화제로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캔맥주를 마시던 한 중년 여인은 저런 남자랑 한번 놀아보고 싶다며 아쉬움을 드러낸다. 곁에 앉아 있는 남편은 사람 좋게 웃을 뿐이다.

점점 춤추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어떤 연인들은 우산 속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뚱뚱한 아주머니가 무대로 다가가 노래 부르는 남자에게 음료수를 건넨다. 남자는 노래를 부르면서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 보인다.

광장 입구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걸어 들어오긴 했지만 월인은 마땅히 앉을 곳을 찾지 못한 채 내리는 비를 그냥 맞고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일주일에 두 번, 천강이 기타 수업을 받으러 가는 날마다 월인은 혼자서 거리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왔다.


처음엔 읍사무소 문화센터에서만 두어 시간 레슨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레슨이 끝나면 선생과 함께 청주 음악학원까지 가서 연습하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때로는 문화센터에 가는 날이 아니어도 레슨을 받는다며 집을 나간다. 월인이 승용차로 데려다준다고 해도 마다하고 택시를 불러 타고 청주 음악학원까지 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천강은 몰라보게 밝아졌다. 기타 학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땐 돌연 냉정해지지만 기타를 배우고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낯빛이 환하다. 뿐만 아니라 집에 와서도 몇 시간씩 기타 연습에 몰두할 만큼 의욕적이다.


그만큼 천강의 기타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정기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 의사는 천강이 기타 배우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월인도 천강이 방에 들어가서 긴 낮잠을 자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천강을 보내고 혼자 지내는 시간은 턱 없이 길기만 하다. 하루해는 고장 난 시계처럼 길다는 마을 노인들의 농담이 종종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천강이 기타 레슨을 받으러 가고 난 뒤에 월인은 소풍에 출근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식당을 나와 버렸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기도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끼어들 틈이 없었다. 주방은 주방대로 카운터는 카운터대로 체계가 잡혀 있어 월인이 도리어 방해가 되었다.


그 뒤로 월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돌아다니며 보낸다. 자전거를 선택한 것은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대청호반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정처 없이 달리다 보면 어느 날은 노현리 부들 공원이나 소전리 벌랏한지마을에 가 있을 때도 있고 또 어느 날은 오늘처럼 청남대 입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나와 이곳 현암정휴게소까지 오게 된다. 고장 난 시계처럼 긴 하루해 동안 다닌 거리를 돌아보면 뜻밖에도 아득히 멀다.


월인은 광장 울타리에 기대서서 호수를 내려다본다. 그런데 하필 오늘 월인이 기대 선 곳은 벼랑이 가파르고 바위 투성이인 곳이다. 울타리 아래를 내려 보는데 어쩐지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발밑이 어지럽다.


천강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덤프트럭에 떠밀려 절개지 중턱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들고 간신히 난간에 매달려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절개지 아래로 떨어진 천강의 처참한 모습도 스쳐 지나간다. 순간 아뜩한 공포가 밀려온다. 그것이 기억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지금 내려다보는 벼랑의 높이가 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시시티브 분석을 통해 어렵지 않게 가해자를 붙잡았다. 가해자는 고의로 천강과 월인을 벼랑으로 밀어붙인 게 아니라 잠시 졸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가해자는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고 사고가 난 줄도 모르고 그냥 간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고의 사고나 뺑소니가 아니라서 월인은 차라리 마음 놓였다. 모르는 누군가가 고의로 해치려 그랬다고 생각하면 더 두렵고 불안했을 것 같았다.

삼십 대 중반 정도 된 가해자가 합의를 부탁하며 찾아왔다. 그는 작업복 점퍼 안주머니에서 얼마 안 되는 돈을 꺼내놓고 무릎 꿇었다.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가 가진 전부라고 했다. 차에서 먹고 자면서 밤낮없이 일하고 있지만 덤프트럭 할부금을 갚느라 집에 생활비도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아내가 식당에 나가 일해서 번 돈으로 겨우 아이들이랑 먹고 산다고도 했다.

월인은 덤프트럭 운전자가 구속되면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나고 말 거라고 짐작했다. 법무법인에서 근무할 당시 중기사업을 하던 남자의 변호를 맡은 기억 때문이었다. 중기사업자인 그는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액수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도 동종 전과가 있어 구속되었다.


보석신청마저 기각되었기 때문에 그는 재판 내내 구속되어 있었다. 1심에서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항소심에서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렇지만 그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중기할부금 장기연체로 인해 포클레인을 압류당하고 가족이 살고 있던 빌라까지 경매에 붙여졌다. 거기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내는 이혼을 요구해왔다. 얼마 안 되는 형사보상금으로는 망가진 그의 삶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런 기억이 떠올라 월인은 기꺼이 합의를 해주고 법원과 검찰에 탄원서까지 제출했다. 하지만 운전자는 뺑소니가 인정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과도 없고 피해자와 합의한 사실이 인정되어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것도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월인은 가해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해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이제 당신을 볼 일이 없다, 는 문자를 보내왔다.


배신감보다는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재판이 끝난 그날부터 월인은 말로만 듣던 트라우마 혹은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기 시작했다.


의사는 월인에게 여러 가지 약 처방을 내렸다. 하지만 장기간 복용해온 약은 갑상선 항진증이라는 새로운 병세를 가져다주었다. 이른바 약 부작용이었다.


호르몬으로 인해 번뇌에 빠져서 허우적이는 사람의 마음이 참 무력하다, 월인은 생각한다. 자칫 의지가 꺾이면 무너져 내리고 말 것 같다.


월인은 난간 울타리에서 물러나려다가 다시 바짝 다가선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듯 외상 후 스트레스와 마주하려는 것이다. 마주하면 트라우마 건 외상 후 스트레스 건 희석되는 것 같다.


조금씩 안정을 되찾은 월인은 저 멀리 호수 건너로 시선을 던진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긴 가뭄으로 호수의 수위는 저만치 내려가 있다. 건너편 대청호 광장과 굳건히 닫힌 수문 둑에는 관광객들이 붐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두툼한 밤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군밤과 맥반석에 구운 오징어 따위를 파는 계단 근처 노점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유독 눈에 띄는 그 남자는 꼭대기집 남자 재욱이다. 월인은 주춤 걸음을 멈춘다. 재욱은 노점에 진열된 군밤인지 맥반석 오징어인지에 정신을 팔고 있어서 월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지난 겨울 가출한 재욱의 아내는 아직 소식이 없다. 이장의 말대로 이번엔 아주 돌아오지 않을 작정인지 모른다. 재욱은 몇 번이나 아내를 찾아 처가로 갔지만 번번이 장모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왔다. 재욱의 장모는 누가 너보고 이딴 거 사 가지고 오랬냐며 그가 사 가지고 간 과일 상자를 마당에 내동댕이쳐버렸다고 한다. 그걸 아무도 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걸음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이 취한 재욱이 오밤중에 뒷집할머니집에 와서 씁쓸하게 고백한 것이니 의심할 여지는 없는 것 같다.


재욱이 자랑삼던 아들들조차도 재욱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보다 못한 뒷집할머니가 재욱의 아들에게 전화를 해서 그래도 아버진데 그럴 수 있느냐며 호통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재욱의 삶에서 유일한 자부심이고 자랑이던 아들은 냉담했다. 전화도, 어머니를 찾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전해달라고 뒷집할머니에게 당부하고는 전화번호까지 바꿔버렸다.


재욱은 생계의 마지막 수단이던 노동일마저 내팽개치고 술로 세월을 보내는 모양인지 몰골이 말이 아니다. 재욱을 양자 삼은 죄로 뒷집할머니가 밥을 걷어 먹이고 통장에 있는 돈까지 내어주어 목숨을 부지하고는 있다. 하지만 뒷집할머니가 언제까지 재욱을 거둘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계단을 따라서 광장 꼭대기에 있는 정자로 올라가려던 월인은 마음을 바꿔 매점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아무래도 재욱과 부닥뜨리고 싶지 않아 그냥 돌아갈 생각이다.

그러나 광장을 빠져나가려던 월인은 숲 속으로 뻗은 길을 발견하고 그리로 향한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 탓이다.


구름다리처럼 숲 속 허공에 매달린 길의 바닥은 원목으로 되어 있고 양옆 난간엔 철봉이 세워져 있다. 숲에 가리고 휘어지는 좁은 오르막길이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통행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도 간간이 내려오는 사람도 있고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양산을 쓴 중년 부부가 길을 막고 앞서 가고 있다. 월인은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 올라간다. 후드득 떨어지는 물기가 월인의 머리와 어깨를 때린다. 비가 오고 있는 건지 아니면 길 위로 뻗은 나무에서 맺혔던 물방울이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다.


길은 숲을 휘돌아 광장 꼭대기에서 끝난다. 계단으로만 오르내리던 월인에겐 길이 마치 자신을 삼켰다가 광장 꼭대기에 토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울타리 아래로 숲이 우거져 있다. 덕택에 경사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월인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다. 이곳 정자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월인은 이끌리듯 산허리를 굽이치며 펼쳐진 호수를 내려다본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산허리를 기대고 누운 호수 아래 어딘가에 살았다고 하던 말이 떠오른다. 그 사람들에게 호수는 거대하고 검푸른 짐승이다.


의젓하기 짝이 없는 저 호수는 두 얼굴을 가진 짐승인 것이다. 겉모습은 천혜의 경관처럼 보이지만 깊은 속에는 온갖 해악을 저지른 짐승이 살고 있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도회로 사지로 내몰았을 테고 수많은 비리가 저질러졌을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향을 삼켰을 것이다. 그리고 호수의 창자 속엔 아직도 소화되지 않은 수몰민들의 삶이 잔해처럼 흩어져 있을 것이다.

월인은 울타리에 기대서서 정자를 바라보다가 정자에 앉아 있던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재욱이다. 재욱을 피해서 왔는데 재욱이 기다렸다는 듯이 정자에 앉아 있다. 그도 월인을 알아보고 배시시 웃는다.


재욱의 옆에는 막 따서 먹기 시작한 막걸리와 종이컵, 번데기가 놓여 있다. 오징어와 군밤은 사지 못한 모양이다.


재욱은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월인에게 잔을 내민다. 어쩐지 월인은 거절하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막상 받아 들었어도 선뜻 마실 수가 없다.


재욱은 월인의 잔을 기다리지 못해 비닐봉지를 펴서 번데기를 쏟아놓고 그 컵에 막걸리를 따라 마신다. 그리고 번데기를 집어 먹는다.


- 술은 깊이 가라앉은 마음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시다. 형씨 안에 무거운 게 가라앉아 있는 거 다 보이는데, 거 답답하게 콱 누르고 살면 형씨도 병날 거요. 형씨가 병나면 선생님은 누가 돌보겠소.

재욱은 월인을 향해 가당찮은 설교를 늘어놓는다.


입술만 적시고 있던 월인은 마침내 남은 잔을 단숨에 들이켠다. 월인의 희고 가는 손가락을 재욱은 바라본다. 주름살 없는 하얀 목덜미가 오르내리는 것도 본다. 월인이 잔을 비우자 재욱은 씨익 웃는다. 월인은 빈 잔을 재욱에게 건네고 막걸리를 따른다.

막걸리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땐 제법 시원하더니 아래로 흐를수록 뜨거운 기운이 들불처럼 번진다. 월인은 비로소 자신이 아침부터 빈속으로 다니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인지 번데기가 고소하고 맛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앞에서 사 먹어 보고 처음인 것 같은데도 그 맛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월인은 번데기를 몇 개 더 집어 먹는다.


금방 막걸리 한 병이 다 빈다. 월인은 재욱에게 마지막 잔을 따르고 일어선다. 얻어 마시고 그냥 말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월인은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세상이 변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음처럼 들리던 무명가수의 목소리는 제법 흥겹고 땅바닥은 춤을 춘다. 월인은 자꾸 헛웃음을 웃는다. 막걸리를 사면서도 웃고 오징어와 호떡과 군밤을 사면서도 웃는다. 웃지 않으면 울음이 터져 나오고 말 것 같아 술주정처럼 헤프게 웃는다.


- 여기 있던 사람 어디 갔습니까?

돌아와 보니 재욱이 보이지 않고 대신 젊은 남녀가 앉아 있다. 월인은 히죽히죽 웃으며 조금 전까지 술 마시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젊은 연인에게 묻는다.

- 저쪽으로 내려갔어요.

스물서넛 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말한다.

- 그래요.

월인이 말하고 그쪽을 쳐다보는데 재욱이 바지를 추스르며 숲 속에서 올라오는 게 보인다. 재욱은 초췌하고 꺼칠한 웃음을 띠고 있다.


- 여긴 우리 자리야. 금방 오줌 싸고 왔다고.

재욱이 다가와서 억지를 부린다.


- 애들 때문에 오줌도 마음 놓고 못 싸겠네.

젊은 남녀가 샐쭉한 표정으로 가버리자 재욱은 월인을 바라보며 유쾌한 듯 헤벌쭉 웃는다. 재욱의 헐렁한 어깨가 의기양양하다.


- 형씨, 앉읍시다.

재욱은 월인이 사 가지고 온 호떡을 맛있게 먹어치운다. 월인도 배가 고팠던 터라 호떡이 당긴다. 하지만 재욱이 달게 먹는 걸 보니 집어 들 수가 없다. 월인은 구운 오징어도 재욱이 먹게 두고 빈속에 막걸리만 자꾸 들이붓는다. 입에선 시원하지만 마시고 나면 들불이 되는 막걸리. 군밤을 쪼개 입안에 넣는데 재욱에 대한 기억이,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공소장 내용에 의하면 재욱은 초등학생들을 위한 무슨 학습지를 발행하는 회사를 차려놓고 전국에 지사를 모집했다. 하지만 일 년도 못 되어 수표를 막지 못해 최종적으로 부도를 냈다.


그 외에도 전국 지사에서 보증금 명목으로 받아 챙긴 돈과 선입금된 학습지 대금 또한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포승줄에 묶인 채 조사를 받는 그의 왜소한 모습에서 그런 규모의 사업을 벌일만한 어떤 됨됨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월인은 재욱이 그 회사의 이른바 바지 사장일 거라고 짐작하고 실제로 돈을 가져간 배후의 인물 즉 진짜 범인을 알아내려고 주력했었다.


그 진짜 범인 즉 그 학습지 회사의 진짜 사장은 재욱의 친구라고 월인은 생각했다. 돈은 재욱이 동업자이자 친구라고 지칭하는 소위 진짜 사장이 다 가로채고 재욱이 죄를 뒤집어쓴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재욱은 돈을 떼인 건 사실이지만 자신이 법인의 대표 이사라고, 바지 사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법인 대표 이사의 서명 란에 초서로 휘갈긴 그럴듯한 서명을 재현해 보이기까지 했다.

검찰관이 보는 앞에서 예사롭지 않은 서체로 자신의 서명을 재현했을 때 월인은 그가 진짜 대표 이사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는 사기, 횡령, 부정수표단속법 등으로 형사 처분을 면할 수 없었던 데다 동업자라는 친구를 죽이려고 맘먹고 쫓아다니다가 결국 실행에 옮기기까지 한 중대한 범죄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식과 아내에게조차 버림받은 불쌍한 사내에 불과하다. 입으로는 지금도 자신이 과거에 큰 사업가였노라고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먹고 마시고 숨 쉬는 기능뿐이다. 그나마 뒷집할머니 덕택에 간신히 노숙자는 면하고 있지만 그의 삶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쩌다 자신이 직접 기소한 범죄인과 한 마을에 살게 되고 이렇게 술까지 마시게 됐는지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이다.


- 형씨, 아까부터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습니까?

재욱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는다.

- 아무것도 아닙니다.

- 나도 같이 좀 웃읍시다.


-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 그럼, 형씨가 실성했시다.


- 하하 실성! 맞아요. 실성입니다.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온 몸이 가렵고 달뜨는 것이 실성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습니다.


- 좋기도 하겠시다.

재욱은 술버릇처럼 말투가 바뀐다. 듣기 싫지는 않다.

- 형씨, 귀 좀 잠깐.

재욱은 월인의 귀에 대고 자기한테 여자를 사줄 수 없겠냐고 묻는다.


- 그럽시다.

월인은 호수의 수면 위로 쏟아지는 벌침 같은 햇살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선뜻 대답한다. 그러나 비가 오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약속했시다, 형씨.

재욱은 월인의 새끼손가락을 낚아채고는 자기 새끼손가락을 건다.

- 하하하.

월인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 형씨한테 처음 하는 이야기인데, 그 여자가 생긴 건 박색이어도 참 맛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아주 죽여줬시다. 도망간 내 마누라 말이시다.


풀지 못하고 쌓인 욕망 탓인지, 아내에 대한 그리움 탓인지, 그도 아니면 술기운 탓인지 그의 목소리가 일순 축축해진다.


- 형씨도 각방 쓴 지 꽤 됐다고 들었시다. 우리가 동병상련이시다. 형씨도 꽤 힘들었을 텐데, 오늘 밤에 어때요.

- 하하........ 그런 이야긴 나중에 하고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합시다.

월인은 검은 비닐봉지에 빈 막걸리 병과 어질러진 종이 봉지들을 주섬주섬 집어넣는다.

광장 주차장에 세워놓은 재욱의 낡은 카니발에는 옷가지들이 여러 벌 걸려있다. 재욱이 종종 차에서 자는 듯 뒷자리에는 이불 보따리 같은 것도 보인다.


화장실 앞 자전거 보관소에 묶어둔 월인의 자전거 위로 늦은 오후 햇살이 얼룩져 있다. 화장실 입구에 쌓인 벚꽃 잎 위에도 햇볕이 한 줌 떨어져 있다. 햇볕이 누군가 쓰고 나서 함부로 구겨 버린 휴지조각 같다.


재욱은 기어코 자신의 차를 가지고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그러나 월인은 자전거를 마저 버려둔 채 현암정휴게소를 빠져나온다.


월인이 대청호반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데 재욱의 차가 다가온다. 재욱은 타라고 종용하지만 월인은 거절한다. 재욱의 행동은 차량 정체로 이어진다.


-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시다. 천천히 오슈.

뒤따라오던 차들이 거칠게 빵빵거릴 때쯤 재욱은 속력을 낸다.

대청호반길 옆 '호수에서 부는 바람' 앞에 사내가 서성이고 있다. 간판 불빛을 등지고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는 실루엣은 재욱이 틀림없다. 월인은 멀리서도 한눈에 그를 알아본다. 그의 낡은 카니발은 보이지 않는다.


- 날도 어두워지는데 그렇게 걷다가는 사고당하기 딱 좋시다.

월인이 가까이 다가가자 재욱은 땅바닥에 담배를 버리고 발끝으로 문질러버린다. 불씨 하나 남기지 않는 악의적인 발길질이다.


- 여기서 붕어 매운탕이나 한 그릇 하고 갑시다.

재욱은 무턱대고 '호수에서 부는 바람'으로 내려간다. 월인은 '호수에서 부는 바람' 입구에 '빙어'라고 적힌 입석 위에 걸터앉았다가 못 이기는 척 일어선다.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에 재욱을 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자신이 장동혁 검사였다는 사실을 재욱이 알게 되면 무슨 소동을 벌일지 몰라 불편하고 꺼림칙한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장동혁 검사였소,라고 고백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다.

마당에 내려서자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건물이 나타난다. 파란 천막으로 에워싼 걸 보면 건물이라기보다는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것 같다. 재욱의 카니발은 도로보다 한 길이나 낮은 그곳 마당에 세워져 있다.

실내에서는 물비린내인지 붕어비린내인지가 떠다닌다. 월인과 재욱이 들어가자 노트북을 켜놓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스물 한 둘쯤 돼 보이는 여자가 주방 쪽에 대고 아빠 손님, 하고 외친다. 여자는 손님을 거들떠볼 생각도 않고 그냥 앉아 컴퓨터 게임을 한다.


오십 대 초반쯤 돼 보이는 까무잡잡하고 수염까지 텁수룩한 사내가 물 묻은 손을 때 절은 바지에 씩씩 문질러 닦으며 나온다. 사내는 음식을 하는 사람 같지가 않고 산적이나 해적 같다.


주방 안은 쌓인 설거지거리와 흐트러진 주방용 도구, 양념통들 따위로 어지럽고 불결해 보인다. 앳된 여자와 그 남자 사이도 부녀 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납치당한 여자와 납치범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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