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10. 그녀의 분가 선언

by 이세벽

재욱은 붕어찜과 소주를 주문하고 앉는다. 사내는 소주와 양파와 고추가 담긴 접시를 먼저 내려놓고 주방으로 돌아간다.


주방을 마주하고 앉은 월인은 사내가 음식 하는 걸 자꾸 쳐다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사내와 월인의 시선이 가끔씩 허공에서 마주친다. 사내는 뭔가를 씻어서 도마에 올려놓고 썬다. 칼도마 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엉성하다.

재욱과 월인이 소주 반 병 가량을 비웠을 때 노란 냄비에 담긴 붕어찜이 나온다. 매운 고춧가루 냄새가 진동을 한다. 고춧가루 양념 빛깔이 붉고 선명하다. 뜻밖에 야채들도 신선하다.


- 좀 전에 건져 올린 거유.

사내는 엉성하게 담은 묵은 김치와 멸치볶음 따위의 반찬 몇 가지를 더 내려놓고 가버린다.

월인은 젓가락으로 고춧가루 양념 속에 파묻힌 붕어 살을 떼어먹는다. 빈속인 데다 술 마신 뒤끝이라서 그런지 달고 맛있다.

- 이모님(월인의 장모를 재욱은 그렇게 부른다), 말씀이 거짓이 아니었시다.

재욱이 불현듯 앞뒤 없는 말을 꺼낸다.


- 우연히 말이 나와서 내가 형씨를 샌님이라고 놀렸더니 이모님이 발끈하시더라고. 나 같은 인간은 상대도 안 된다면서 까불면 맞을 수도 있다고 그러시던데. 걸어오는 걸 보니까, 이모님 말씀대로 형씨 어깨가 제법 단단해 보이는 게 영 샌님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시다.

월인은 자기의 어깨밖에 오지 않는 왜소한 재욱을 웃으며 바라본다.


장모는 아마도 집 안에 러닝머신이며 아령, 벤치프레스 등을 들여다 놓고 꾸준히 운동하는 자신이 사내다운 기백이 있어 보인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사고를 당한 이후로는 운동을 해 본 적이 없지만. 월인은 장모가 사위를 그저 책벌레로만 여기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 강한 남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 재밌다.


- 그렇지만 나를 만만하게 보지는 마쇼. 내가 체구는 작고 힘은 없어도 깡 하나는 쎕니다. 어느 놈한테도 안 지지. 왜 그런 줄 아쇼?

-........


- 그렇게 웃지 마쇼. 정들겠시다. 설마 나를 비웃는 건 아니겠죠, 형씨.

- 왜 비웃습니까. 그런 거 아니니까 계속 말씀해보세요.


- 내 이 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딱 멈췄시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까지는 나도 키가 큰 놈이었는데, 다른 새끼들이 하나둘씩 나를 추월하기 시작하더라고, 내 어깨밖에 안 오던 새끼가 나보다 모가지 하나는 더 커가지고 나타나고, 그때 내가 기죽지 않기 위해서 품기 시작한 게 깡이요.

놈들에게 꿀리지 않으려고 위악도 서슴지 않았소. 물론 그것만으로는 먹혀들기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다행히 놈들의 유년 시절 기억 속엔 강하고 크고 배짱 좋은 내가 자리 잡고 있었던 거요. 어쩌면 놈들은 내 깡보다는 자신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나한테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소.

왜 그런 거 있지 않소. 초등학교 때 싸움 잘하던 놈은 평생 싸움 잘하는 친구로 기억되는 거. 공부 잘하던 놈은 평생 나보다 똑똑하고 잘 살 것 같은. 내가 바로 그 싸움 잘하던 놈 중의 하나였소. 놈들의 기억 저편에서 나는 그 새끼들의 기억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왔던 거요. 그게 내 깡이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재욱이 이야기하는 동안 월인은 검사 시절 만났던 사기 피의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얼굴이었다.


그는 조사를 받는 중에도 콧물을 연신 흘리고 있었고 눈에서는 마른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몸은 가냘플 정도로 말라 있었고 얼굴에도 핏기가 없었다.

수사관은 그를 심문할 생각도 않고 이름과 생년월일을 거듭 확인하더니 어디 고등학교 나왔는지를 캐물었다.


수사관의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피의자는 입을 벌리고 웃곤 하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삼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피의자는 앞니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수사관은 그가 무슨 고등학교 나왔다고 말하는 소리를 한 번에 알아듣고는 아연실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검사님, 이 친구가 왕년에 우리 학교 짱이었습니다. 수사관의 말을 들은 월인은 피의자의 얼굴을 슬쩍 바라봤다. 피의자는 입을 벌린 채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가 당시만 해도 고향에 있는 고등학교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싸움 잘하는 친구였다고 수사관은 덧붙였다. 그는 또래 사이에서 하나의 전설이었고 같은 학년이라도 그와 맞닥트리면 인사를 해야만 할 정도로 크고 위압적인 존재였다고 했다.


하지만 조서를 받고 있는 그 피의자 어디에서도 그런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피의자의 모습은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재욱 어디에서도 왕년의 잘 나가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재욱은 지금 상황에 딱 맞는, 그러니까 아내를 두들겨 패는 술주정뱅이 행색을 하고 있다고 월인은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재욱이 원하는 것은 하룻밤 욕정을 채울 여자다. 그게 아니었다면 재욱은 아마도 재미없는 월인과 이렇게 마주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월인은 재욱에게 가볍게 약속을 해버린 것이 후회는 되지만 지키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 하지만 결국 가장 믿었던 친구 놈한테 당해버렸지 뭐요. 그것도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내 꼬봉이던 새끼한테. 그러니 어찌 안 죽이고 싶었겠소. 그놈은 기억 속의 나를 극복했는지 언제부턴가 슬슬 나를 이용하기 시작했시다. 처음엔 충성을 가장했지만 나중엔 드러내 놓고 나한테 대들었소. 그때 그놈을 아주 짓밟아버렸어야 했는데. 어쨌든 그놈은 아주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시다, 회장 소리 들어가면서. 나는 이 꼴인데........


- 지금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 그게 말처럼 쉽겠시다. 마누라도 도망가 버리고........


-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면 아주머니께서 돌아오시지 않겠습니까.


- 내가 열심히 산 들 그걸 어떻게 압니까. 꼭꼭 숨어버렸는데. 이번엔 안 돌아올 것 같소. 이젠 틀려먹었소.

-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지 않습니까. 사람 됐다는 소문을 듣고 돌아올지 어떻게 압니까.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 그럼 내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란 말이오, 형씨.

재욱이 술잔을 따르다 말고 버럭 화를 낸다.


- 하하, 내가 언제 짐승이라고 했습니까.


- 그게 그거지 뭐요.


- 내 말이 그렇게 서운하게 들립니까?


- 서운한 게 아니라, 형씨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느냐 그 말이지.


- 이웃사촌인데, 내가 모른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 이모님이 그럽디까, 내가 짐승이라고?


- 하하, 그렇게 자꾸 어깃장 부리면 갈 겁니다.

재욱은 괜히 술을 거푸 따라 마신다.


- 마음 푸시고 내 술이나 한잔 받으세요.


- 이모님도 나를 무시하더니........

재욱은 못 이기는 척 잔을 받는다.


- 무시는 누가 무시합니까. 어머님이 좀 퉁명스러우셔서 그렇지 속정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 형씨, 전직이 뭐였소! 본래 요리사였소?


- 갑자기 그건 왜.


- 셰프 출신이 맞는 거냐고요.


- 글쎄요, 내가 셰프 출신이라고 누가 그래요.


- 혹시 뭐 외국 호텔 같은 데서 일했소?


- 왜요! 그렇게는 안 보입니까?


- 내가 보기엔 운동선수 출신 같은데. 배짱도 두둑하고.......


- 동병상련인 이웃끼리 마주 앉아서 술 한 잔 하는데, 겁이라도 먹어야 합니까?


- 하긴, 형씨한테는 내 친구들처럼 옛날 내 모습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까.


- 과거가 무슨 소용입니까.


- 그렇게 무시하지 마쇼.


- 그런 말이 아니라, 나는 지금, 소풍의 셰프일 뿐이라는 거죠.


- 형씨가 셰프는 무슨 셰프요.


- 아니, 왜.


- 셰프가 출근은 안 하고 만날 자전거 타고 돌아다닙니까.


- 하긴 그러네요.


- 셰프가 아니라 사장이라서 자유로운가?


- 글쎄요.


- 글쎄요가 다 뭐야.


- 소풍의 주인은 제 아내입니다.


- 왜요, 선생님이 번 돈으로 차린 건가 보죠. 그렇다고 해도 선생님하고 형 씨하고 남남이오! 하긴 남남보다 나을 것도 없지. 형씨나 나나. 안 그렇소?


- 나한테 아내는 전부입니다.


- 왜요, 소풍 때문에.


- 하하, 처음 내 아내를 만나는 순간부터 내 것은 전부 아내의 것이 되었습니다. 소풍도,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내 몸, 내 영혼까지 모두 아내 것이 되었습니다.


- 그 말은 결국 형씨 거라는 말 아니오.


- 하하 그렇습니까?


- 형씨는, 순정파요.


- 순정파!


- 그렇소,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공룡 같은 존재란 말이오.


- 그럼 난 살아 있는 화석이군요.


- 그런 셈이지. 이모님이 형씨가 선생님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말하기 전부터도 마을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소. 사고 전만 해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붙어 다니는데 그걸 누가 모를 수 있겠소.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다. 여자는 게임에 몰두하고 있고 남자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다. 월인의 무심한 시선과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 선생님이 어서 정신을 차리셔야지.......

오랜만에 든든하게 배를 채운 재욱은 술이 도로 깨서 목소리가 기운차고 또렷하다.

- 가르치던 학생들이 와도 못 알아 보드라면서요.


- 어리둥절해하죠, 뭐.


-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선생님이 안 됐시다. 예쁘고 상냥한 분이신데.......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 오입하러 가기에는 시간이 좀 이르고.......

재욱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본다.


- 오랜만에 긴 밤 여자 냄새에 빠져 있을 생각을 하니 맘이 설레는 걸.


- 하하, 그런 걸 그동안 어떻게 참았습니까.


- 술로 삭였시다, 술로. 말 그대로 삭인 거지. 삭아서 이제는 그것이 욕정인지 뭔지도 모르겠소. 생긴 건 박색이라도 그 여자 덕에 한 세월 그럭저럭 살았는데.......


- 부인이 그리우신가 봅니다.


- 가끔씩 보고 싶긴 해요. 안 그렇다면 거짓말 아니겠소. 미우나 고우나 자식새끼 낳고 한평생 살았는데.


- 그래도 부인을 많이 사랑하시는군요.


- 사랑! 솔직히 난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소. 욕정이 끓어오를 땐 누구든 사랑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소. 때론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잘해주고 싶고 잘해줘야지 마음은 먹는데 그게 영 안 됩디다. 얼굴만 보면 짜증이 나는 걸 어쩌것소. 말로는 얼굴 뜯어먹고사는 거냐고 할 테지만, 마음은 보는 데서 나는 법 아니오. 안 그렇소, 형씨.


- 그럴 수도 있겠죠.

월인은 재욱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비판할 마음은 없다.

한 이불 덮고 살다 보면 언제나 예쁜 모습만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간혹 흉한 모습도 또 더러 입 냄새도 맡게 되지만 그런 것은 사랑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월인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믿어왔고 그래 왔다.


- 사실 형씨야, 예쁜 선생님하고 사니까 내 심정을 이해 못 할 수도 있겠수다. 그렇다고 내가 도덕률이 낮다고 짐작은 마시오. 나도 한 때 대한민국 교육 사업에 몸담았던 몸이오. 그렇지만 교육과 현실은 괴리가 있는 법 아니오.

- 우리가 아직 반인반수인 미노타우로스인 까닭입니다.

-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형씨도 짐승이 되어 봅시다.


- 나한테는 천강 씨뿐입니다.


- 각방 쓰는데 뭐 어때요.


- 하하.

월인은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그리고 식당 남자에게 대리운전기사와 콜택시 한 대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 지금 내가 가진 전부입니다.

월인은 비상금으로 넣어가지고 다니던 오만 원 권 지폐 몇 장을 재욱에게 건넨다.


- 정말로 나 혼자 가라는 말이오.

재욱은 못 이기는 척 돈을 주머니에 챙겨 넣는다.


-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 좋시다, 좋아. 하지만 나를 너무 저급하게만 보지 마시오, 고상한 선생. 그래도 매춘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짝짓기 관습 중 하나 아닙니까. 어쩌면 오늘날 결혼보다 더 오래됐을 겁니다.


재욱이 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콜택시가 온다.

'호수에서 부는 바람' 마당에 나와 앉아 있던 월인은 택시를 탄다. 소풍으로 가자고 택시 운전사에게 말해놓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술 냄새가 마음에 걸린다.


월인은 소풍으로 전화만 하고 집으로 향한다.


월인이 현관문을 열자 거실 중간에 서 있던 천강이 엉거주춤 뒤돌아본다. 천강의 어깨에 아직 기타가 걸려 있는 것이 금방 돌아온 모양이다. 천강을 보자 월인은 가슴이 먹먹하고 서럽다.

- 아저씨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막연하게나마 월인에게서 슬픔을 감지한 천강은 사뭇 놀란 표정을 짓는다.


-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하는데 월인의 목이 멘다.


- 그런데 왜 우시는 거예요.


- 당신이 미치도록 그리웠습니다.

오랜만에 마신 술 때문일까.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그리움이 눈사태처럼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다.


- 아저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천강은 한 발짝 물러선다.


- 지금 당신을 껴안지 못하면 나는 죽을 것 같습니다.

월인은 와락 천강을 껴안는다. 어쩌면 재욱의 말대로 사랑과 욕망은 한통속 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멈출 수 없다.

- 아저씨,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마치 더러운 벌레라도 달라붙은 모양으로 천강은 소리를 지르며 월인의 팔을 떼어낸다.

월인은 천강을 놓아주지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하지만 천강은 냉정하게 쏘아보다가 분이 안 풀린 듯 월인의 뺨을 소리 나게 때린다.


- 뭐 하는 거야.

김치찌개를 끓여서 뒷집할머니에게 갖다 주고 돌아오던 장모가 마침 이 광경을 보고 소리친다.


- 니가 뭐라고, 남편 뺨을 때리니, 응. 니 남편이 뭘 잘못했다고. 너 살리겠다고, 너 하나 때문에 이러고 사는데.......


- 아저씨가 술 마시고 저를.......


- 장 서방이 어째서 아저씨냐. 이것아, 귀하고 귀한 니 남편이야. 니가 어디 가서 이렇게 착하고 곧은 남편을 또 만난다고. 설령 니가 기억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퇴원한 지 벌써 언제냐. 지금까지 이 집에서 살았으면 눈치로라도 알아야지. 집안에 사진이며, 옷이며, 전부 니가 이 집 주인이고 장 서방이 니 남편이라고 말해주고 있는데, 어째서 너만 그렇게 새까맣게 모른다고 딱 잡아뗄 수가 있어.


- 어머니, 제가 잘못한 거예요.


- 자네도 그래. 잘못하긴 뭘 잘못했다는 거야. 자기 마누라 껴안는 게 그게 뭐가 잘못인데. 대명천지에 그런 잘못이 어디 있더라는 말인가. 오늘부터 한 방에서 자게. 아무리 기억에 없다고 해도 어디 부부가 따로따로 자는가. 그러니까 오늘날 이런 사달이 나는 게야. 은진이 너도 그렇게 알아. 안 그럴 거면 이 집에서 나가. 니 집도 아니고 내 딸도 아니고 장 서방 아내도 아닌데 왜 여기서 살아.


- 할머니, 엄마 아프니까 그만하세요.

언제 나왔는지 방에서 나온 해주가 울먹이고 있다.


- 들어가자.

장모는 해주의 등을 토닥이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 미안합니다.

월인은 천강을 바라보는 것도 불편하다.


- 뺨을 때린 건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천강은 미안해하면서도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 괜찮아요. 내가 맞을 짓을 한 거죠.


- 아저씨, 저 이 집에서 나갈게요. 그냥 방 하나만 있으면 돼요. 나 혼자 머물 수 있는 방을 얻어주세요. 부탁할게요.

천강은 결심하고 있었던 듯 차분하고 냉정하다.


갈 곳을 몰라 주저앉았던 천강이다. 하지만 이제 갈 곳을 모르는 채로 갈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라도 나갈 결심을 할 만큼 자의식이 강해졌다. 부정적인 발전인지 긍정적인 발전인지 알 수 없다.


-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조심할 테니 마음 푸세요.

월인은 사죄의 마음을 담아 간청한다. 천강이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난감하고 곤혹스러워 질게 분명하다.


- 아저씨 때문이 아니에요. 할머니께서 맞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 실은 얼마 전부터 방을 얻어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문득 월인을 바라보는 천강의 눈빛이 나뭇잎에 매달린 봄 햇살같이 흔들린다.


무엇이 담겨 있는 걸까! 생각해봐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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