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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Sep 28. 2022

[시] 햇볕의 음모에 대하여

우리가 산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딱 그만큼만이어야 한다

더 멀거나 더 

가까운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그 거리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거리가 아니라

햇볕의 음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햇볕은 

거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굳이 명제의 형식을 

빌리자면

햇볕 없이는 거리도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햇볕이 봄이면 우리를 

어떻게 설레게  하는지

우리를 턱없이 무겁고 

높게 떠받드는지

또 한편으로는 가볍고 

낮게 짓누르는지


아이는 질척한 악취를 풍기며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엄마는 이웃집 총각과 

발바닥을 부비고

아빠는 낯선 여자에게서 

검은 눈물을 훔치는 건지


햇볕이 여름이면 서늘하기 짝이 없는 

불덩이를 던져대는지

바다와 땅은 녹아 쩍쩍 갈라지고 

산과 강은 차갑게 끓어대고

도시는 모두 음습한 지하 술집에서 

과음을 하게 되는지


술 취해 비틀거리는 거리에서 

알몸으로 섹스를 하게 만드는지

어떻게 사랑과 욕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짐승과 사람의 구분을 

쓸모없이 만드는지


햇볕이 가을이면 왜 우리를 

견딜 수 없는 환희에 빠트리는지

그리하여 분노한 누군가는 

드디어 햇볕을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추격에 나서지만


결국 거리에서 밤마다 

달의 목을 조르고 

등대의 음부를 핥고 있는 건지  


우리 중 누군가는 드디어 

햇볕을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허공에 수백 개의 

텔레비전을 설치하지만

왜 그곳에 올라서서 

열광하며 

울어대고 

오줌을 갈겨대고 마는지


햇볕이 겨울이면 우리에게 

그토록 초라한 외투를 입히고

그을린 한숨과 메마른 목구멍으로 

오직 거리를 숭배하게 하는지


햇볕을 살해하려고 떠났던 사람은 

마침내 백발이 되어 돌아왔으나

이제 어린 시선으로 

어두운 우물을 응시하며 침묵하는지


우리 중 누구도 더 이상 

햇볕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려하지 않는지


그래서 우리는 

햇볕을 용서하는 

더러운 꼴이 되고

햇볕을 떠받드는 

처참한 몰골이 되고 

심지어는

햇볕을 숭배하는 

바보가 되는지


우리는 결국 햇볕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누군가 내뱉었으나 

거기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비아냥거리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는지


언제까지 햇볕이 아니라 

거리와 싸워야 하는 건지


그러나 어쨌든

햇볕의 음모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더라도

햇볕을 처단하거나 

사랑할 수 없더라도

   

여전히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딱 그만큼만이어야 한다

더 멀거나 더 

가까운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그 거리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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