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전에도 천강은 노래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고음을 힘들이지 않고 소화할 수 있는 성량과 맑은 음색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천강의 노래를 듣게 된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놀라워하곤 했다.
키만 크지 뼈도 가늘고 살집도 없는데 어디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할 정도였다.
그러나 천강은 노래를 즐겨 부르지 않았다. 어쩌다 기회가 되면 마지못해 노래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기타를 배우러 다니고부터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노래를 부른다. 기타 연습을 하고 있는 건지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오늘은 예전의 그 애절한 목소리에다, 어찌 보면 좀 넘친다 싶은 감성까지 더해진 목소리다.
서재에 있던 월인은 천강의 목소리를 좆아 거실로 나온다. 거실은 텅 비어 있다.
해주는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시간이 되지 않았다.
장모는 아침 일찍 동네 노인들과 함께 관광여행을 가셨다.
면과 면내 기업의 지원을 받아 오월 초면 가곤 하던 효도 관광인 셈인데 이번엔 무슨 사정이 있어 유월로 미뤄졌다.
서울 사람인 장모는 관광여행을 따라갈 수 있는 자격이 안 된다. 하지만 동네 할머니들이 함께 가자며 성화를 하기도 하고 장모 역시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해서 싫다 소리 안 하고 따라나섰다.
월인은 소풍의 주인인 천강의 이름으로 금일봉을 쾌척했다. 이장의 은근한 압력이 없었더라도 장모까지 따라가는데 모른 척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천강의 방문은 닫혀 있다. 노랫소리는 천강의 방이 아니라 이층에서 나는 것 같다.
겨울엔 거의 출입을 하지 않던 이층인데 봄 어느 날부터 천강이 올라가서 혼자 지내곤 한다.
불쑥불쑥 천강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잔소릴 해대는 어머니를 피해서 달아난 것이다.
장모도 그 정도 눈치는 있지만 이층까지 올라가서 잔소리를 하고 싶지 않은지 모른 척이다.
가끔 해주가 천강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긴 하지만 이층은 자연스럽게 천강만의 공간이 되었다.
다행인 것은 이층을 혼자 쓰다시피 하면서부터는 집을 나간다고 방을 얻어 달라며 무작정 조르던 천강의 고집이 누그러들었다.
월인은 이층 층계참에 서서 천강의 노래를 듣는다.
천강이 새로 연습을 시작한 곡은 김현식의사랑했어요, 이다.
천강은 능숙하게 아르페지오로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문득문득 목메어 멈춘다. 낯선 천강의 모습이다.
겨우 진정이 된 천강은 기타 줄을 튕기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에 다시 노래를 시작한다. 그렇지만 곧 목이 메어 노래를 멈춘다. 그리고 감기 걸린 사람처럼 코를 훌쩍인다. 감정의 과잉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엔김광석의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을 부른다. 경쾌한 듯 서럽다. 달라진 천강의 노래다.
노래를 끝낸 천강은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한참 동안 고요히 앉아 있다.
무슨 애틋한 생각에 잠긴 건지 가끔씩 깊은 한숨을 내뱉기도 한다.
월인에게도 상실 너머로 피어오르는 천강의 번민이, 번민 같은 것이 느껴진다.
가슴속엔 그리움이 가득한데 그가 누군지 몰라서 서럽고 아픈 것이라고 월인은 짐작한다.
천강은 자리를 고쳐 앉아 아르페지오로 '너의 침묵'에를 친다.
노래를 끝낸 천강은 다시 로망스를 연습한다. 앞부분에서는 제법 능숙하지만 중간쯤엔 소리가 잘 나지 않는다.
천강은 지금껏 배운 것들을 차례로 연주한다. 에델바이스, 긴 머리 소녀, 등대지기, 엄마야 누나야, 얼굴, 참새와 허수아비 등 이제 천강이 능숙하게 치는 곡은 제법 많다.
- 어디야!
천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층계참에 걸터앉아 천강의 노래를 듣고 있던 월인은 고개를 빼고 이층을 올려다본다.
- 내가 노래 불러 줄게. 들어봐.
천강이 스마트폰을 들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어쩐지 천강의 목소리가 들떠있다.
월인은 고개를 숙인 채 천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은 난 정말 몰랐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지나간 시간이 너무나 아쉬워요 ~
기타를 내려놓고 스마트폰으로 흘려보내는 애끓는 천강의 목소리가 월인을 전율케 한다.
- 빨리 와, 바보야. 보고 싶단 말이야.
천강은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장난스럽게 소리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같다.
월인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허방을 딛는 것처럼 아뜩하다.
월인은 서재에 들어가 망연자실 창밖을 내다본다. 유리 파편 같은 햇살이 눈에 들어와 박힌다. 천강은 월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도 그랬다.
전화로 바로 그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은 난 정말 몰랐어요. 그리고 노래 끝에 빨리 와, 바보야, 보고 싶단 말이야, 했던 것도 같다.
당시 월인은 지방으로 출장 중이었다. 이틀째 되는 날까지는 천강에게서 전화가 없었다. 법무법인의 대표이사를 수행 중이었기 때문에 월인도 전화하기가 곤란했다.
마침 천강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도 대표이사가 옆에 있었다. 월인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천강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전화기를 귀에 대고 들었다.
그날 월인은 벅찬 마음으로 양방향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아저씨, 차 좀 빌려주세요.
이층에서 내려온 천강이 서재를 향해 소리친다.
월인은 태연한 척 거실로 나간다. 천강에게 운전면허증이 있고 운전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은 숙희다. 읍내 기타 교실을 오가며 운전까지 시켜본 모양이었다.
- 어디 가려고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웃음 짓는 것이 불편하지만 월인은 애써 웃음 짓는다.
- 싫어요. 사람들이 아저씨가 내 남편이냐고 물어보는 것도 싫지만 그것보다 더 짜증 나는 건 아저씨가 내 남편인 척하는 거예요.
천강은 월인에 대한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 천강 씨 내려주고 안 보이는 데 가서 기다릴게요.
- 그럼 내가 편하겠어요. 아저씨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숨통이 막혀요.
월인은 천강이 갑자기 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지 짐작이 간다.
- 천강 씨가 전화하면 그때 다시 데리러 갈게요. 천강 씨가 누구를 만나든 나한테 감출 필요가 없어요.
- 내가 왜 감춰요. 말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지. 그리고 나한테 운전면허증이 있는데 굳이 아저씨가 저 때문에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잖아요.
-.......
윌인은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영어도, 국어도 여전히 구사하고 있고 텔레비전도 켜고, 스마트폰으로 카톡도 하고, 다른 일상생활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기억상실을 핑계로 운전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천강은 한동안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사진을 보고도 자신이 아니라고, 누군가 자신을 사진 속의 얼굴로 바꿔놓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천강은 거울을 보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운전면허증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기를 인정하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현실과 타협하고 있는 것인지 월인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의사는 천강이 상실의 단계를 거쳤고 이제 수용과 치유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라고 한다.
수용과 치유의 단계에서는 기억상실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그러면 천강은 자신의 기억상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다음이 성장이라고 했다. 기억을 상실한 채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모습일까!
월인은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 아저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언제까지 아저씨 도움만 받을 수는 없잖아요.
월인이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천강은 어쩐 일로 다가와 월인의 팔을 잡아끈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겨우 월인의 소맷자락만 잡아당길 뿐이다. 숙희 남편에게 하듯 덥석 팔짱을 끼지 않는 것이 서운하다.
왜, 남편으로서 천강의 무의식 속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것일까. 그 부족함이, 미진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 천강 씨가 운전하는 거 한 번 볼게요. 운전 안 한 지 오래됐잖아요. 숙희 씨 차를 운전했다고 듣기는 했지만 직접 내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요.
- 좋아요. 읍내까지 함께 갔다 와요. 사실은 아저씨하고 같이 갈 데가 있었어요.
천강은 운전석에 앉아서 능숙하게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출발을 한다.
사고 전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익숙함이다. 운전은 기억 상실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수저질처럼 운전이란 기억이 아니라 이미 몸에 밴 습성 같은 것이 아닐까. 월인은 자신이 운전만큼도 천강의 습성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마을을 빠져나온 천강은 익숙하게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호반로로 진입해서 문의 읍내를 향해 달린다.
운전 도중에 그녀가 스마트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그런 동작도 사고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 스마트폰 역시 기억이 아니라 오래된 습성인 모양이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 같다. 천강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두 손으로 핸들을 잡는다.
그러나 곧 천강의 스마트 폰에서 수신음이 울린다. 천강은 기다렸다는 듯이 스마트 폰을 집어 들고 귀로 가져간다.
- 아주머니, 지난번에 집 보고 왔던 사람이에요. 지금 집 보러 가려고요.
천강은 월인을 힐끔 쳐다본다. 그제야 월인은 천강이 분가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혼자서 나름대로 알아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 금방, 도착할 거예요.
천강은 전화를 끊고 말없이 앞만 바라보고 운전을 한다. 그러다 커브 길에서는 긴장을 과장하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 난 내가 살던 집과 가족만 기억하지 못하나 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것뿐이야. 그 외엔 다 기억해. 세상 전부다. 하지만 너무너무 궁금해.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진 사람들은 누구일지. 어떻게 생겼을지. 그리운 그 사람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지. 어떤 집에서 살고 있을지. 언제나 나는 그게 궁금해. 때론 눈물이 날 정도로 궁금해.
천강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장난처럼 들리기도 하고 신이 난 듯 보이기도 한다.
월인은 천강이 기억 상실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바뀌거나 다른 인격체로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배신감마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 저한테 큰돈이 필요해요.
읍내에 다 와서야 천강은 월인을 힐끔 쳐다본다.
- 혼자서 집을 알아봤어요?
- 그럼요. 혼자 알아보지 그럼 누구랑 알아봐요.
딱 잡아떼는 천강이다. 월인은 그걸 느낀다. 천강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 이건 비밀인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하지만 이내 털어놓을 기세다. 그럴 땐 어리석고 들뜬 어린아이 같다.
- 알았어요.
- 아저씬 약속을 잘 지키니까 말할게요. 사실, 처음엔 숙희 씨 도움을 좀 받았어요. 하지만 지금 가는 집은 제가 현수막에 적힌 전화번호로 알아본 거예요.
- 그래서 그 집에 가봤어요? 혼자서! 혼자 집 보러 다니면 위험에 빠질 수 있어요. 집 보러 갈 땐 누구하고 든 함께 가야 돼요.
- 혼자 가지 않았어요. 현수 씨하고 같이 갔어요. 숙희 씨가 보여 준 집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비좁고 더러웠어요.
- 지금 보러 가는 집은 맘에 드는군요.
월인은 현수라는 사람, 그 혹은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내지 않기로 한다.
- 그런데 큰돈이 필요해요.
월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천강이 차를 몰아 월인을 데려간 곳은 얼마 전까지 분양 및 임대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던 6층짜리 신축 빌라다.
해주가 다니는 문의 초등학교 바로 옆이고 소풍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월인은 소풍에서 가깝고 읍내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천강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5층 단추를 누른다.
현관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던 4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천강을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하지만 월인을 대하는 낯빛은 어쩐지 어색하고 주저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천강과 함께 집을 보러 왔다 간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월인은 직감한다.
베란다를 확장해서 거실이 넓은 편이다. 방도 세 개다.
숙희가 천강에게 보여 준 집은 아마 원룸이나 단칸방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원룸이나 단칸방이 눈에 차지 않는 걸 보면 집에 대한 천강의 취향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천강은 본래 넓은 집을 좋아했다. 특히 거실이 넓은 집을 보면 살고 싶어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전원주택도 시골에선 드물게 넓은 집이어서, 특히 거실이 넓어서 천강이 선뜻 마음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실 창에 다가서니까 대청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녹조 낀 수면은 무슨 늪지대 같기도 하다. 악취가 풍길 것 같은 풍경이다. 그렇지만 월인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당국에서 노력 중이니까 녹조는 곧 제거될 것이다. 녹조만 빼면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럭저럭 괜찮은 풍경이다. 천강을 보낼 마음은 조금도 없는데 월인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 거실 마루는 제가 원목으로 새로 깔았어요.
집주인 여자는 월인에게 집 자랑을 시작한다. 월인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 도배도 실크 벽지로 새로 했고요. 싱크대도 제가 새로 놓은 거고 수도꼭지도 절수형으로 바꿨어요. 욕실 샤워기도 마찬가지고요. 전에도 아가씨한테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될 수 있으면 팔고 싶어요. 하지만 뭐, 전세도 괜찮아요.
- 아주머니가 갑자기 서울로 갈 일이 생겨서 싸게 내놓은 거예요.
천강은 다 안다는 듯 거든다.
- 저도 가고 싶지는 않지만.
석연찮은 아주머니의 변명이다.
- 내일이라도 결정해서 연락드릴게요.
주방과 안방, 욕실을 차례로 둘러보고 나오는데 천강이 여자에게 약속을 한다. 월인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의 뜻을 나타낸다.
- 네 네, 그러세요.
집주인 여자는 끝내 천강과 함께 온 남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 참, 그때 선글라스 놓고 간 거 어디 있어요?
허리를 숙여 구두를 신던 천강은 생각난 듯 몸을 일으킨다. 아직 한쪽 구두는 신기 전이다.
- 여기요.
집주인 여자는 신발장 어디선가에서 선글라스를 꺼내며 월인의 눈치를 본다.
- 고마워요.
천강이 선글라스를 받아서 가방에 넣는다. 월인이 얼핏 봐도 남자 거다. 하지만 모른 척 시선을 돌린다.
여기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