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시간에 호수를 집어삼킨 저녁 어스름이 집 앞으로 진군해 오고 있는데 천강이 성장을 하고 거실로 나온다.
옅은 화장을 한 얼굴이다. 그녀한테서 롤리타렘피카향까지 난다.
- 아저씨, 저 친구 만나고 올게요.
장난스럽게 하는 말인데 불량하게 들린다. 불량한 사람의 웃음기 같은 거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른다.
- 어두워지는 데 어딜 가려고요? 곧 어머니께서 오실 텐데.
- 내가 내 발로 나가는데 그 할머니가 무슨 상관이에요.
자기 어머니에 대한 적대감은 감추는 법이 없다.
왜 가까웠던 사람들은 모두 꼴 보기 싫고 전 같으면 싫어했을 법한 사람들에는 친근감을 느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 천강 씨, 차분하게 예의를 갖춰 말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야 남들한테 업신여김 당하지 않고 존경받을 수 있어요.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면서요.
-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 천강 씨가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돼서 하는 소리예요. 꼭 나가야 할 약속이 있다면 내가 데려다 줄게요.
- 아저씨! 왜 그렇게 끈질기게 구는 거야. 난 아저씨가 싫어.
-......
-나를 괴롭히지 않으면 밉지는 않지만 이럴 땐 아저씨가 방해꾼 같아.
- 어두워지는데 혼자는 안 돼요.
- 지금까지 저 혼자 잘 다녔잖아. 갈래. 저리 비켜.
천강은 월인을 밀친다.
- 천강 씨.
월인은 천강의 팔을 잡는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듯 붙잡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결국은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 나가려면 먼저 약속해요. 내 전화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받는다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겠다고. 약속하세요.
- 약속할게요.
대답하는 천강의 얼굴엔 귀찮아 미치겠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 혹시 조금이라도 술을 마시게 되면 꼭 나한테 전화해요. 대리기사를 보내줄게요.
월인은 천강의 등에 대고 사정한다. 자포지기한 음성이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테고 집을 나서는 순간 전화도 받지 않을게 분명하다.
자물쇠를 채우고 방에 가두면 더 위험하다, 는 의사의 견해가 아니라도 천강을 방에 가둘 자신은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천강이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될지 알 수 없다.
월인은 천강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천강이 탄 자동차는 가차 없이 저녁 어스름을 짓밟고 마을을 빠져나간다.
투는 오랫동안 천강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맥없이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간다.
- 아빠!
언제 나왔는지 해주가 걱정스럽게 월인을 올려다본다.
월인은 말없이 해주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해주는 천강에게 오늘 만나는 그 누군가에 대해 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월인은 묻지 않는다.
- 엄마가........
- 해주야, 아빤 괜찮아. 엄마 기억이 돌아오면, 그러면 아무런 문제없어. 옛날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야.
월인은 어린 해주를 통해서 천강의 남자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다.
해주는 이미 세상 어느 누구보다 상처가 많은 아이다.
자신이 아물지 않았을 해주의 흉터를 헤집는 것 같고 행복하게 해 주려고 데려와서 고통만 안겨주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고 마음 아프다.
천강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뒷집으로 마실 나갔던 장모가 돌아온다.
월인은 걱정하는 장모를 서재로 모시고 들어간다.
월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장모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다.
- 그래서 이사를 보낼 텐가?
-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월인은 천강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만큼은 하지 않는다.
아직 누군지도 모르고 또 그것이 천강 혼자만의 감정일지 모르는데 섣불리 나서서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다.
- 자네 같이 똑똑한 사람이 그런 말을 다 하는가. 그렇게 뜻을 받아주기만 하니까 그런 거 아닌가.
그러면서 장모는 또다시 천강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는다.
하고 다니는 걸 보면 멀쩡한데, 카드도 쓸 줄 알고, 사고 싶은 거 사고, 가고 싶은 데 가고, 좋은 옷, 좋은 신발, 제 몸에 맞고 제 눈에 차는 거 살 줄 아는데, 그거야, 지가 번 돈 지가 쓰니까 뭐라 할 순 없다고 해도 집에서는 왜 방안 퉁수가 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냐.
기억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 노릇은 해야 하고 당연히 하는 게 마땅한데 어째서 천강은 제 몸 씻고 제 방 치우는 것 외에는 하는 일 없이 기타 치는 데만 열중이냐.
그 책임이 월인한테도 있다. 왜 천강이 하는 대로 받아주기만 하느냐. 기억이 있을 때야 자기 마누라 예뻐서 밥을 떠먹여 주든 매일 몸을 씻겨주든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억만 없는 게 아니라 정신까지 어떻게 되었는지 은진이는 이제 자기밖에 모른다. 이제 예전의 내 딸이 아니다. 기억이 없으면 살려고 노력을 해야지 기타는 무슨 기타냐.
해주도 데려다 놨으면 부모 노릇 성실히 책임감 있게 해야지, 데려다 놓고 밥 먹여 주고 재워주면 그게 다 부모 노릇인 줄 아느냐.
-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는 거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해주에게도 더욱 신경 쓰겠습니다.
월인은 장모 볼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인다.
-천강을 야단친다고 해서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천강 씨를 힘들게 하면 아마 우리 곁을 아주 멀리 떠날지 모릅니다.
- 걔가 도망이라도 간다는 말인가. 갈 테면 가라고 해.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데다 집을 얻어주지 그랬나. 아주 멀리..
장모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월인을 노려본다.
-.......
- 자네는 정말 정신없는 애를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둔다는 겐가, 혼자 나가서 살게 둘 셈이냔 말이네, 자네는?
- 죄송합니다. 저로서도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억지로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막아서도 안 되고요.
- 나는 못 내보내겠네. 기억도 없는 애를 어떻게 혼자 살게 내버려 둬! 방문에 시금 장치라도 달게. 가둬 놓으면 될 거 아닌가.
- 어머니! 천강 씨는 기억이 없을 뿐 일상생활을 하는 덴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 자네 눈엔 그렇게 보이는가. 내가 보기엔 문제가 있어 보이네. 엄마도 몰라보고 남편도 몰라보고 자식도 몰라보고, 그리고 정신이 똘똘해지는 만큼 말이 거칠어지고 행동이 무례하고 천방지축인데, 어느 구석, 뭐 하나 은진이 다운 데가 없는데, 자네는 어째서 문제가 없다고 장담하는 건가.
- 천강 씨 성품은 차츰 나아질 겁니다.
- 그걸 어떻게 장담하나. 혼자 나가서 살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쩔 텐가?
- 제가 열심히 가르치고 도와야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천강 씬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성품이 달라진 겁니다. 예전하고 비교하시거나 예전과 같은 모습을 기대하시는 것보다는 현재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사고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천강 씨 주치의도 그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장모는 한숨을 쉬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하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주 나와서 천강의 방문을 열어본다.
밤 11시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아예 거실에 나와 서성대던 장모가 자동차 불빛이 마을 입구로 접어드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천강이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애타는 마음과 달리 천강을 보면 버럭 화부터 내게 될까 봐 피하는 것이다.
자동차 불빛은 마을 회관 앞을 지나서 곧장 윗마을 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자신의 방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장모가 실망한 얼굴을 하고 다시 방에서 나온다.
월인이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천강에게로 전화를 건다. 벌써 수십 번째다.
어느새 마을 깊숙이 들어온 자동차 불빛 하나가 집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월인은 얼른 전화를 끊고 정원 등을 켠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서치라이트 불빛이 길까지 환하게 비추고 있다.
불빛 속으로 천강이 타고 나갔던 자동차가 들어와 멈춘다. 뒤 따라온 자동차도 있다.
천강의 자동차 운전석 문이 먼저 열린다. 하지만 내리는 사람은 천강이 아니라 모르는 남자다. 조금 있다가 천강은 뒷좌석에서 내린다.
- 야, 대리기사면 대리기사답게 입 다물고 운전에나 신경 쓰지. 건방지게 손님한테 뭘 이것저것 물어보고 지랄이야.
월인이 다가오는 것을 본 천강은 운전해준 남자에게 사납게 소리친다. 투도 덩달아 짖는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항변이라도 할 것처럼 우뚝 서서 천강을 바라보다가 이내 뒤따라온 차에 올라탄다.
짖고 있던 투는 제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돌아온다. 천강은 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천강의 곁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투는 서운한 듯 집으로 들어가 엎드린다.
천강의 차를 뒤따라 왔던 자동차는 달아나듯 곧장 산 아랫길로 사라진다.
천강이 가까이 다가오자 롤리타렘피카 향이 먼저 달려들고 술 냄새가 따라온다.
- 건방진 놈이, 여자라고 우습게 보고.......
천강은 혼잣말로 위악을 부린다.
- 제 놈이 뭐라고 나한테 술을 얼마나 마셨느냐, 직업이 뭐냐, 물어봐. 후사경으로 자꾸 힐끔거리고....... 눈깔을 확 뽑아줄 걸....... 구두를 벗어서 뒤통수라도 갈겨줄 걸 그랬네.
천강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나는 것 같더니 웃음을 터트린다.
- 내 이름은 천강이가 아닌데....... 은진이도 아니고........ 이젠 내 이름을 찾을 거예요. 잃어버린 내 이름을........
신나는 일이라도 있었던 듯 흥얼거리며 정원의 징검돌을 하나씩 내딛는 천강. 조금 전 위악을 부리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들뜬 목소리다.
그러나 지나치게 넓게 내딛는 보폭은 왠지 불안하다.
- 아니면 새로 이름을 새로 지을까! 새로! ..... 이 집에 사는 동안만 난 천강인 거예요. 이 집을 떠나면 나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질 거예요. 진짜 내 이름을 찾을 때까지 말이에요. 뭐라고 지을까........
문득 뒤돌아보다가 징검돌에서 미끄러지며 비틀거리는 천강을 월인이 얼른 다가가 붙잡는다.
- 에이, 에이....... 이러면 안 돼요.
그러면서도 사납게 굴진 않는다. 그렇지만 불결한 것이라도 닿은 듯 천강은 월인의 손을 털어내는 시늉을 한다.
- 난 사랑에 빠졌어요.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요. 그 사람도 날 사랑해요. 눈빛을 보면 알아요.
천강은 웃음을 터트리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러나 장모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뚝 그친다.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 던진 천강은 갑자기 화난 얼굴이다. 마치 신발이 여기저기로 날아간 게 장모의 탓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장모의 시선을 피해 못 본 척하고 지나쳐 자기 방으로 향한다.
- 이제는 술까지 마시고 다니니.
천강이 벗어던진 구두를 아연실색 바라보고만 있던 장모는 기어코 천강의 등에 대고 한마디 내뱉고 만다.
천강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장모는 월인을 힐끔 쳐다보더니 천강을 뒤따라가서 닫히고 있는 문을 낚아챈다.
- 기억에 없어도 나는 네 어미다. 너를 낳아 키운 어민데 네 방에 들어오는 게 뭐가 잘못이라고 그렇게 못마땅한 얼굴이냐.
- 피곤하게 왜 이러세요.
- 그리고 뭐, 사랑에 빠져. 넌 엄연히 남편이 있는 여자야.
- 또 그 이야기. 씨팔, 지겨워 정말.
술기운에 젖은 천강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다. 사나운 얼굴이다.
- 너 지금 누구 앞에서 함부로 욕지거리냐.
- 누가 욕했다고 그래요.
딱 잡아 떼놓고 보일 듯 말 듯 웃는다.
- 넌 아직까지 한 번도 엄마한테 대든 적이 없었어. 엄마한테 눈 한번 부릅뜬 적이 없었다고.
- 누가 내 엄마예요.
- 내가 네 엄마야. 네 기억에 없어도 난 너를 낳은 엄마야.
장모의 목소리가 애원조로 바뀐다.
- 억지 쓰지 말고 나가세요.
목소리는 수그러들었지만 내뿜는 기운은 더 차갑다.
- 기억도 없는데 이젠 술까지 마시고........
체념한 듯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은 장모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린다.
- 칫, 자기가 무슨 상관이람.
천강은 입을 삐죽인다.
- 은진아, 넌 지금 아픈 사람이야. 약을 먹잖니. 술을 마시면 안 돼, 이것아.
- 간섭하지 말고 나가세요. 그리고 부탁이니까 제발 내 방엔 들어오지 마세요.
치켜세운 천강의 눈꼬리는 내려가지 않는다.
- 쟤 눈빛 좀 봐. 제정신이 아냐. 저런 애를 어떻게 혼자 살게 한다고 그러는지.......
장모는 천강의 사나운 눈길을 어찌할 줄 모른다.
월인이 장모를 거실로 밀어낸다. 더 이상 천강을 마주 볼 자신이 없는 장모는 못 이기는 척 거실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