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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Jun 20. 2023

이지속 작가님의 206호 여자

내 어머니는 이혼하지 않고 버텼다.

어제 후배가 우리를 초대한 식당입구.

너무 맛있게 먹느라 사진도 못 남겼습니다.


본문


아버지가 휘두른 주먹에 맞아 종종 어머니 눈이 퍼렇게 멍들었다. 하지만 어린 아들들은 지들 대갈통이 부서질까 봐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숨죽였다.


특히 큰아들인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 집을 나가버리곤 했다.


집 근처 골목을 오가며 하릴없이 서성대다 밤늦게 돌아왔는데 아기를 업고 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어머니가 내 손목을 움켜잡고 무작정 산 쪽으로 나를 끌고 갔다.


너랑 나랑 같이 죽자. 오늘 밤 같이 죽자.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는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어둠이 깊어지고 길이 험해질수록 높아졌다.


그 많던 별들이 어찌나 서럽던지 나는 소리 내어 울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발을 끌며 발버둥 쳤지만 결국 산 밑 저수지까지 끌려갔다.


나는 저수지의 시꺼먼 어둠이 아니라 그 많던 별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하늘을 쳐다보며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다.  


어머니 살려주세요.


무진장한 별들이 무너져 내리라고 나는 소리쳤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저수지에 발이라도 들여놓았던 건지. 아니면 정말로 풍덩 빠졌다가 기어 나왔던 것인지.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폭력에 맞선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내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안방에서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안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의 손목을 아챘다. 아버지가 나를 무섭게 노려봤으나 나는 더 이상 겁을 먹지 않았다.


중학교 삼 학년, 긴 겨울 방학 동안 나는 그동안 크지 못한 키가 자랐고 몸도 삼손처럼 단단해졌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맨 앞줄에 앉았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을 만큼 폭풍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때 나보다 크고 힘이 셌던 아이들은 이제 조무래기처럼 보였다.


아버지도 작아 보였다. 나한테 아버지가 더 이상 거인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왔지만 나는 아버지의 양손을 붙잡고 제발 이러지 말라고 소리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뭐가 그리 억울한지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댔다. 그리고 급기야 화장대 위에 있던 탁상시계를 집어 나를 향해 던졌다. 탁상시계는 내 얼굴을 비켜 날아가 벽에 부딪쳐 박살이 났다.


그날 밤 분을 못 이긴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가 보름이 훨씬 더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어른들 말로 입 댈 것이 없다는 이른바 바른생활이 몸에 밴 나는 어떤 경우에도 가출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가출 아닌 가출도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도 아버지의 폭력은 반복되었으나 나는 더 이상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이미 어머니의 눈두덩 멍들어 있거나 밥상이 엎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응징하지 못했다.


그저 슬픈 마음으로 내 방에 틀어박혀 멍든 어머니의 눈과 엎어진 밥상을 지우거나 잊곤 했다.


그럴 때 나는 주로 문학작품을 읽었다. 죄와 벌, 좁은문, 폭풍의 언덕, 베니스상인,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데미안.... 등등  


게다가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트렁크 하나 들고 집을 떠나왔다.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 구두 때문에 뒤꿈치가 까졌지만 구두와 양복을 맞춰준 아버지에게 종종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썼다.


두 분이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서울 다녀가실 일이 있으면 나를 만나고 가셨다. 아버지와 함께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은 적도,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날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연세가 드신 뒤에도 폭력을 아주 멈추지는 못했다.


어느 날 부모님 집에 들렀는데 어머니의 눈이 파랗게 멍들어 있어서 내가 소리쳤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거냐고. 나이도 드셨으니 제발 이제 그만하시라고. 그러자 아버지는 현관 앞에 있는 소화기를 집어 들고 나를 내리칠 듯이 달려들었다.


그날 이후로 몇 해 부모님 집에 발길을 끊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을 만큼 괴로워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부모님 집을 찾았다.


아버지가 말기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두 분은 나란히 서실에 다니며 서예를 즐기셨다.


겉으로 보기엔 꽤 행복해 보였다. 아니 사실은 괜찮았다.


하지만 나는 가끔 어머니가 내 손목을 움켜쥐고 어둔 밤길을 끌고 가던 생각이 나면 소리 없이 운다.


지금도.....


하지만 뼈저리도록 사무치는 아픔은 아니다. 그렇다고 선물이랄 수는 없지만 내면의 친구라 여기고 싶다. 아물기도 하고 덧나기도 하면서 동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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