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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Jun 25. 2023

월화1-1 짝사랑의 배신

어느 여름 해변에서 만난 소나기처럼

나는 돌아오지 않는 그 남자의 물건들을 살펴보다 봉인된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며칠 동안 상자를 이리저리 살피기만 하면서 호기심을 달랬다.      


그러나 결국 나는 커터 칼로 봉인된 테이프를 갈랐다.      


상자 안엔 뜻밖에도 교정 당국의 마크가 새겨진 노트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겉표지마다 ‘월화 1’ ‘월화 2’.......... 이런 식으로 쓰여 있었다.  


그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왜 돌아오지 못하는 걸까. 나는 궁금증을 안은 채 그 남자가 쓴 것으로 보이는 노트를 펼쳤다.


익숙한 그 남자의 글씨는 반가움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준다.


월화 1       

           

입김에서 나온 것: 사랑에 속한 모든 것.


흙에서 나온 것: 사랑 이 외의 모든 것.     


식물처럼........

나는 빛을 향하여 가지를 뻗는다. 빛의 방향이 바뀌면 가지가 비틀어지거나 꼬이기 일쑤다.

     

식물처럼........

나는 어둠 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어둠 속에서 자라는 뿌리는 항상 뒤엉키기 마련이다.    


뿌리는 가지의 성장을 돕고

가지는 뿌리의 성장을 돕는다.

서로 돕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하고 죽는다.     

뿌리와 나무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빛과 어둠도 마찬가지다.

어둠은 빛의 성장을 돕고

빛은 어둠의 성장을 돕는다.

서로 돕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하고 죽는다.

어둠과 빛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어느 여름 해변에서 만난 소나기처럼 내 첫사랑은 시작되었다.       


월화, 그 철없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오래전 짝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상처만 남기고 훌쩍 떠나버린 열세 살, 그 아이 은선을 생각하며 나는 슬며시 웃음 짓는다.


그때는 억울하고 아프고 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한 조각의 달콤한 케이크 같은 추억이 되어버렸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옛집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래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그 집을 옛집이라고 부르자.


그 집은 내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당시 우리와 세입자들은 마당을 ㄷ자로 둘러싸고 다닥다닥 붙어살았다.


우리 집에는 싱크대와 식탁이 있는 주방을 따로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만은 우리를 포함한 열 한 가구가 함께 썼다.      


세입자들이 사는 단칸방에는 겨우 음식을 해먹을 정도의 좁은 부엌이 있었다.


수도는 없었다. 대신 옛집 마당 한복판에 제법 널찍한 한 공동수도가 있었다.      


세 들어 살고 있던 사람들은 공동수도에 나와서 빨래를 하고 쌀을 씻고 푸성귀를 다듬어 헹궜다.     

 

밥을 먹고 난 뒤에 설거지도 당연히 공동수도에 나와서 했다. 덕택에 세입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 먹고 사는지 감출 수가 없어서 음식을 나눠 먹는 사이좋은 이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당엔 공동수도 외에도 내 몸에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침묵의 소요가 있었다.


정오가 지나면 우리 집 지붕 아래서부터 늘어나기 시작해서 점차 마당을 서서히 덮어가는 그늘이 바로 그것이었다.     

 

마당을 아주 천천히 휩쓸고 지나가던 그늘은 내 몸의 지침을 돌려놓는 시계나 다름없었다.      


내 몸은 그늘이 차지하는 넓이에 비례해서 어느 날은 점점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졌다. 왜 어느 날은 무거워지고 가벼워지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아마 사춘기 전후의 변덕스런 호르몬 변화가 그것을 주도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그늘이 공동수도를 완전히 뒤덮고 나면, 시장에서 돌아온 아주머니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저녁 준비를 했다.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에는 그늘이 마당 끝에 있는 우리 집 담장을 넘어서 완전히 물러갔다. 그리고 얼마 후 어둠이 내려와서 마당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낮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지개를 켜고 나서 창가로 다가갔다.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가볍고 평화로웠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마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늘은 벌써 공동수도 근처까지 목을 빼고서 집안 여자들이 시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공동수도는 물론 마당 어디에도 아직 다른 사람의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내 시야에서 벗어난 곳에 사람이 있다면 목소리가 들릴 텐데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그 아이, 은선만이 자기 집 마루에 걸터앉아서 가볍게 발을 흔들고 있었다. 은선이가 입고 있는 연두색 교복 치마 아래로는 햇볕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은선의 왼쪽 허리와 오른쪽 허벅지에는 그늘과 햇볕이 만들어놓은 경계가 선처럼 그어졌다.      


가벼운 그늘과 무거운 햇볕의 경계가 은선의 몸을 둘로 갈라놓았다는 걸 깨닫는 그 순간이었다. 은선의 발등에서 튕겨 나온 표창 같은 그 무엇이 날아와 내 망막을 사정없이 찔렀다.


무거운 만큼 빠르고 예리한 그것이 어떻게 심장까지 가 닿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전신으로 번지던 통증, 그것은 잔인할 정도로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뿌려놓고 달아났다.      


나는 수돗가를 반쯤 침범하기 시작한 그늘과 햇볕의 경계를 측량이라도 하듯 가늠해 보면서 곁눈질로 은선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은밀하게 훔쳐본다고 해도 완전히 상대를 속일 수는 없었다. 내 시선을 느낀 은선이가 나를 힐끔거렸다. 우리의 시선이 비켜가기에는 마당이 너무 좁았다. 아니 아무리 넓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늘이 공동수도를 막 넘어서려는 중이었다. 내 시선과 은선의 시선이 마당 한복판에서 만났다. 좁은 외길에서 맞닥트린 듯 당황스러웠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은선은 양보라도 하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하게 웃었다. 너무 뜻밖이어서 나는 창가에서 물러나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어쩌면 그 아이는 민망했을는지 몰랐다.       




내가 은선이 보다 두어 살 많기는 해도 아직 수줍음이 많은 사춘기 소년이었다. 어쩌다 집 앞의 골목이나 마당에서 은선과 마주쳐도 모르는 척 지나쳤던 나였다.


그늘과 햇볕이 그 아이의 몸에 선을 그어놓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한 울타리에 사는 은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인지 모른다. 존재를 인식하는 것과 한 울타리에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열다섯 살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입학시킨 탓에 다른 아이들보다 1살 어렸고 작은 키로 인해 늘 맨 앞자리에 앉아야 했는데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동안 폭풍 성장해 몸은 어른처럼 크고 단단했다.     


마음은 소년이지만 몸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그날 이후로 심한 가슴앓이를 하기 시작했다.

     

은선의 얼굴과 몸 전체에서 풍기는 어떤 느낌에 대해 예쁘다는 표현보다 더 정확한 의미를 지닌 낱말을 찾으려고 나는 오래 고민하고 애썼다. 예쁘다는 표현으로는 뭔가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예쁘다는 말 외에 마땅히 아는 단어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은선에게 어울리는 적절한 낱말을 붙인다면 ‘섹시하다’일 것이다. 왜 그때 나는 섹시하다,는 그럴듯한 말을 몰랐을까. 아니 어쩌면 알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내가 쓰기에는 너무 불경한 말이어서 감히 떠올릴 수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아무튼 은선으로 인해 어린이 되어버린 내 몸에 심한 왜곡이 일어났다. 딴에 존재에 대한 폭넓은 고뇌를 하는 중이었는데 하루아침에 한 여자 아이에게로 집중되는 쏠림현상이 생긴 것이다.    

  

사랑의 의미나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몸의 배터리와 같던 삶이란? 혹은 왜?라는 질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질문에 지나지 않았다. 은선만이 삶의 의미였고 질문이었다.     


그것이 도파민이나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조화와 작용에서 기인한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맞는 이론이라고 해도 도대체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내 경우는 신경전달물질이 먼저 나온 뒤에 은선에게 열정을 느낀 게 아니라 내가 은선에게 뭔가를 느꼈기 때문에 그런 물질들이 뒤이어 나왔던 것 같다.      


때로는 은선을 보고 있지 않고 그저 생각만 하는데도 불현듯 뭔가가 내 몸에서 쏟아져 나왔다.     

 

신경전달물질은 은선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만나고 난 뒤에야 만들어진 결과물에 지나지 않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파민과 같은 호감 단계에서 나오는 호르몬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나한테 뭔가가 나왔다면 흥분과 열정을 일으키고 껴안고 싶어 하게 만드는 페닐에틸아민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오르가슴을 느낄 때 나온다는 옥시토신이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연애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 또는 그리움이나 외로움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어서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뒤적였다.      


그리고 남자라는 말과 여자라는 말도. 입맞춤이나 키스. 껴안음. 욕망. 욕정. 남녀의 성기를 나타내는 숱한 말들을 모조리 찾아봤다.     

 

그러나 원하는 답을 찾지 못했다. 어떤 책들은 내가 봐서는 안 되는 금서에 가까웠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책들로 버젓이 남자와 여자의 성기가 그려진 도 있었다.    

  

나는 백과사전에-백과사전은 내가 볼 수 있도록 허용된 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나오는 남자의 알몸과 여자의 알몸을 번갈아 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왜곡된 몸의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불면뿐이었다.       


어느 날 톨스토이의 연애론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렇다 그것은 내게 있어 발견이었다.


톨스토이의 연애론에서 마음에 와닿는 부분은 빨간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감동이 느껴지는 부분은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톨스토이는 뿌리의 성장은 접어둔 채 가지의 성장만 강조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어느 정도 의식의 톱니바퀴가 맞는 글이었다. 그 글이 흥분과 열정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의 대립되는 성향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은 톨스토이가 중년에 소설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교도의 길을 택했다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톨스토이의 연애론은 중년 이후에 쓴 듯 가지의 성장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엄마라는 말보다 하나님이란 말을 먼저 배우고 성서로 글을 깨우친 나에게 톨스토이의 연애론은 아름답고 황홀한 또 하나의 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뿌리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톨스토이는 뿌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글을 끝내고 말았다.     

 

톨스토이는 중년이어서 뿌리와 가지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심한 불균형에 시달려야 했다.      


뿌리는 너무나 뜨겁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나는 뿌리를 죄악시 여기며 저주하는 것 말고는 달리 어떤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은선이가 수돗가에 나와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창문 뒤에서 도취한 듯 은선을 훔쳐보는 버릇이 나에게 생겨났다.      


좁은 어깨를 들썩이는 은선의 모습이 신비로웠다. 은선의 작은 손보다 더 작은 빨랫감.  

    

그것은 은선이 입고 있던 팬티일 터였다. 하루종일 은선의 속살을 감싸고 있었을 팬티는 은선이가 손으로 치댈 때마다 거품을 피워 올렸다.      


은선이가 엉덩이를 치켜들고 세숫대야에 빨랫감을 담갔다. 은선은 꽤 야무지게 조그만 빨랫감을 양손으로 문질렀다.


그 때문에 아래로 늘어진 티셔츠 안에서 작고 하얀 두 개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은 어둠과 어울리는 차가운 빛을 내뿜으며 나를 오라 손짓했었다.      


마침내 은선은 세숫대야의 물을 버리고 수돗물을 틀더니 고개를 들어 우리 집 쪽을 바라봤다. 나는 얼른 방 안으로 숨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은선은 경계심을 완전히 풀고 치마를 허벅지 위로 걷어 올린 채 방만하게 주저앉아서 팬티를 헹구고 있었다. 치마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뜩하고 어지러워서 쓰러질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방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작가님들 읽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편도 곧 올리겠습니다. ㅎ

늘 건강조심하시고요.

언제나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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