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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Jun 26. 2023

월화 1-2 짝사랑의 배신

어느 여름 해변에서 만난 소나기처럼 

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의 목소리와 다른 여자들의 목소리에 은선의 몸짓이 바빠졌다.  


팬티를 두어 번 흔들어 헹군 은선은 서둘러 자기 집 앞의 빨랫줄에 널어놓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여자들의 수다를 들으며 간혹 웃음 지었다.     

 

빨랫줄에는 은선네 어머니와 은선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이모라는 여자의 팬티도 함께 널려 있었다.   

   

우리 집에 사는 어떤 여자보다 젊고 바람처럼 가벼운 은선네 어머니와 은선이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게 분명한 이모, 이 두 여자는 다른 여자들이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면 짙은 향기를 흩날리며 집을 나갔다가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은선네 어머니와 이모라는 여자가 집을 나서고 있는 동안에도 수돗가에선 여자들의 웃음과 소란이 계속되었다.


은선이는 마루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어머니가 나가는 것을 못 본 척했다.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가 내 방에 불쑥 들어올 리 없지만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끌어당겼다.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마당으로 슬슬 기어 나왔다. 그러자 마당 가득 내려앉은 달빛 속으로 설렘과 야릇한 흥분이 첨가제처럼 뒤섞여 들었다.         

    

아무도 없는 마당을 서성대던 나는 혼자 잠들었을 은선이네 집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은선이가 앉았던 그 자리 어디쯤이었다. 이미 다 식어버렸지만 나는 은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빨랫줄에 널려 있는 은선의 팬티를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보다가 은선네 어머니와 이모라는 여자가 돌아올 때쯤 옥상으로 올라갔다.   


얼마 후 옥상에 앉아서 은선네 어머니와 이모가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방문을 여닫는 소리와 수돗물소리가 번갈아 나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달이 은선의 얼굴로 보였다. 달의 여신 난나가 은선으로 태어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이, 아니 은선이가, 아니 달의 여신 난나가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나는 환영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힘껏 저었다. 그러자 이번엔 고통스럽게 읽고 있던 괴테의 파우스트 중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가 떠올랐다.      


'교만한 빛은 이제 어머니인 밤을 상대로 자신의 옛 지위와 공간을 두고 다투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물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빛은 물체에서 흘러나와 물체를 아름답게 하지만 물체는 빛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빛은 오래지 않아 물체와 더불어 멸망할 것이다.'


      

빛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물체는 나였다. 내가 오래지 않아 빛과 더불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고통스러웠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쥐고 신음을 내뱉었다.




어느새 희붐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올지 아니면 내 방으로 돌아가서 잠을 자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옥상 계단을 내려왔다.      


마당엔 여전히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사람들이 깨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홀린 듯 은선네 집 앞으로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바로 내 머리 위에 있는 은선이의 속옷을 올려다봤다.     


너무나 간절하게 만져보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안개가 차올랐다. 귓속에서 이명이 들렸다.  


나는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은선의 팬티를 건드렸다. 꽃잎 같은 감촉이 전신으로 퍼졌다. 몸이 황홀한 결핍 속으로 추락하자 나는 강렬한 흙의 기운으로 은선의 팬티를 걷어서 코로 가져갔다.


깊이 숨을 들이켜자 자잘한 핑크빛 꽃잎이 가슴으로 머리로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엄청난 양의 흥분제를 마시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곧 전리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에 빠졌다.     


책가방 속도 내 방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 간 사이 내 방을 치운다는 핑계로 구석구석을 뒤져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어떤 증거를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담임선생이나 규율 선생은 불시에 들이닥쳐 책가방에 있는 것을 모두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라고 명령할지 모른다.  


어디에서 건 은선의 팬티는 나를 몰락시킬 게 분명했다.     


아쉽지만 나는 전리품을 다시 돌려놓기로 작정하고 은선의 팬티를 널기 위해 빨랫줄로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은선이네 방문이 불규칙한 힘에 밀려 덜컥거렸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문은 과한 힘으로 밀려나 한쪽 구석에 부딪히면서 활짝 열렸다.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꼿꼿이 굳은 채 그대로 서 있다가 은선이네 어머니의 놀란 시선과 마주쳤다.  


헝클어진 머리와 화장기 없는 부스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은선네 어머니가 곧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지옥에서 튀어나온 마녀처럼 웃음을 참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휴지 한 움큼을 놓아버리고 내 손에 있던 팬티를 낚아챘다.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은선네 어머니가 보기에는 내가 그때 막 팬티를 빨랫줄에서 훔치려던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시 걸어두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은선네 어머니는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빨랫줄에 널려 있던 다른 팬티까지 모두 걷어서 방 안에 던져놓고는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공중화장실로 갔다.


우리 모두 쪼그려 앉아 똥을 싸고 오줌을 싸는 그곳으로 들어간 그녀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음으로써 내 말을 눈곱만큼도 믿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변태 새끼,라는 말을 대신하는 듯도 했다.    




그날 이후 은선네 식구들은 집 앞의 빨랫줄에 더 이상 속옷을 널지 않았다. 여자들이 속옷을 함부로 밖에다 말린다며 흉을 보던 어머니는 은선네의 변화를 내심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어머니의 말처럼 우리 집에 사는 다른 여자들에 비해 제일 나이가 적으면서 가장 큰 애까지 딸려 있는 은선네가 이제 좀 철이 든 것이라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은선네 가족이 나를 변태로 보고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머니는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    

 

나는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될까 봐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내야 했으며, 은선의 얼굴은 물론 은선네 어머니와 이모라는 여자와 부딪칠까 봐 늘 몸과 마음이 아팠다. 몸살감기라도 앓는 것처럼 말이다.    


사나흘쯤 지난 뒤였다. 은선네 어머니가 우리 집 앞에 서서 어머니를 불렀다. 신식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어머니가 안방을 거쳐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방 문 뒤에 붙어서 숨을 죽이고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은선네 어머니가 그날 새벽에 일어난 일을 발설하기라도 하면 자살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은선네 어머니가 수돗물 사용료와 전기 사용료를 어머니에게 넘겨주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젊고 바람처럼 가벼운 그러나 이미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는 은선네 어머니가 집주인의 아들이 저지른 짓을 일러바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이르지 않는 것이 좋은지 다시 한번 고민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젊고 바람같이 가벼운 은선네 어머니가 내뱉은 말은 자기 어머니에게 병원비를 보내야 하니 두어 달만 집세를 미뤄달라는 부탁이었다.      


만약 어머니가 단호하게 거절한다면, 어쩌면 은선네 어머니는 화가 나서 내가 저지른 일을 말해버릴지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순간 떠올렸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 대부분을 교회로 전도한 어머니가 그 정도 부탁을 거절할 성품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데도 내 생각은 부정적으로만 치달았다.  


물론 어머니는 생각해 보고 말 여지없이 은선네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일에 시간 내서 교회에 같이 한번 가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럴게요. 은선네 어머니는 선뜻 대답을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은선네 어머니가 생각보다는 입이 무거운 괜찮은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은선네 어머니가 지옥에서 온 악마에서 연옥을 지키는 천사로 승진하는 순간이었다.         


남은 여름방학을 독서실에서 보낼 작정으로 정기권을 끊었다. 부모 허락을 받지 않고 거액이 드는 수십 권의 책을 할부로 들여놓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적지 않게 꾸중을 들은 탓도 있었다.      


어머니는 책을 샀다는 걸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그렇게 큰돈을 쓸 때는 반드시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를 달랬다. 내가 생각해도 어머니나 아버지의 걱정은 타당했다.   

  

그러나 아무튼 집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은선네 어머니와 마주칠까 봐 불안한 것도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독서실에 갔다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은선이가 생각났지만 지우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서 팬티 사건의 고통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우울함, 수치심, 도피하려는 마음 등이 옅어지고 몸과 마음은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잡념 없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성취감에 젖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인숙의 좁은 나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여자가 길바닥에 널브러진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여자의 치마가 허리께까지 말려 올라가서 팬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작고 얇은 팬티 위로 음부가 도드라져 보였다.    


여인숙에서 뛰어 내려온 남자가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워 다시 여인숙의 가파른 나무 계단으로 데리고 올라갈 때까지 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그 광경을 낱낱이 지켜봤다.     


내 머릿속엔 팬티에 둘러싸인 그 여자의 음부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은선의 치마 속이 자꾸 겹쳐졌고 불길하게도 팬티 사건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마치 폭풍 전야 혹은 폭로 전야의 불길한 징후처럼 여겨졌다.        

  

아니나 다를까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가 전하고 다르게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공동수도에서 수다를 떨 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예닐곱 명의 여자들이 내가 돌아온 것을 모르고 우리 집 앞에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수군거림이 나와 관련되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나는 다가갔다. 그곳은 내가 마땅히 돌아가야 할 집이었으니까.     

 

집안 여자들이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비켜섰다. 여자들이 둘러싸고 있던 사람은 뜻밖에도 젊고 바람처럼 가벼운 은선네 어머니와 은선이었다.      


은선네 어머니가 담배를 물고 나를 노려봤다. 공중화장실에서만 피우던 담배를 어머니 앞에서 당당하게 물고 있는 걸 보았을 때 나는 어머니가 고개 숙일 무슨 일이 벌어진 거라고 확신했다.      


옆에 서 있던 은선이가 나를 한차례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떨어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팬티 사건이라고 단정 짓기엔 너무 비극적인 흐느낌이었다.     


은선네 어머니가 병신 같이 울지만 말고 똑바로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은선을 재촉했다. 그러자 은선은, 내 짝사랑은 상상도 못 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빠가- 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은선 나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면서도 끝까지 나를 오빠라고 지칭했다.-  내 가방을 빼앗아가더니, 오빠가 돈을 꺼내 갔어. 오빠가 그랬다고. 오빠가 그랬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돼. 이제 오빠를 그만 보고 싶어. 오빠가 무섭단 말야.'


여동생이 없던 나는 오빠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은선이 한테 태어나서 처음 오빠라는 말을 들은 셈이었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이 듣게 된 오빠 소리였지만 감동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무슨 쌍욕처럼 들렸을지 모르고 치욕처럼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이젠 기억이 아득하다.


은선네 어머니가 설명을 덧붙이기를, '집안에 숨겨놓은 자기 어머니 병원비를 저 미친년이 도둑 들까 봐 걱정돼서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학생에게 빼앗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저 미친년이 시키지도 안 한 짓을 하다가 이 집 큰 아들한테 봉변당 한' 것이라며, '어떻게 알고 따라가서는 돈을 빼앗아 갔는지 모르지만 정말 아들내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둔' 것 같다며 입을 삐죽거리다 나중에는 코풍선이 터질 정도로 세게 코웃음 쳤다.       


은선네 어머니의 코에서 코풍선이 터지는 걸 본 여자들이 키득키득 웃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팬티에 대한 것이 아니라서 나는 은근슬쩍 안도감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오늘 은선과 마주친 적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어머니도 못 믿겠다는 듯 그럴 애가 아니라고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주장했다.  굳이 내가 나서서 결백을 주장하지 않아도 되는 다 이긴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은선네 어머니는 갑자기 더 크게 코웃음 치면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리고 단번에 역전승을 거두었다.


'학생이 새벽에 우리 집 앞에 널린 팬티를 훔치는 것을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봤는데, 그 더러운 손버릇을 남 줬겠어요. 자식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뭐가 그럴 애가 아니라고 역성을 드세요. 그럼 어린 은선이가 있지도 않은 것을 꾸며냈다는 거예요. 없이 산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은선네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패자의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건 마당에 떨어져 있던 걸 주어서 다시 걸려고......... '


나는 겨우 그렇게 말하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은선에게서 빼앗지 않은 돈에 대해서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은선이가 나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돈을 돌려주고 이사 비용까지 물어줬다.    

 

'미친년아 겁도 없이 왜 돈을 책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녀', 라며 은선을 한 번 더 윽박지르고 나서 모녀가 물러갔다.      


그렇게 짝사랑은 나에게 실연의 상처를 남기고 떠났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질책도 용서도 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이르지도 않았다.


엄마는 너를 믿는다.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나에게 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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