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13. 잔인한 농담

by 이세벽

읍내 부동산사무소에 들러 전세계약을 하고 나와서다. 기분이 좋은 천강은 운전석에 앉아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금방이라도 환호성을 지를 것 같은 얼굴이다.

천강이 원하는 대로 전세계약을 하긴 했지만 월인은 마음이 복잡하다. 장모에게 미리 알리지 못한 탓도 있지만 천강이 이사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 해주한테 전화해보세요. 수업 끝났을 텐데.

천강은 출발하려다 말고 월인을 바라본다.


착잡한 월인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상기된 얼굴이다. 하긴 천강이 월인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 지금 해주는 피아노 레슨 받고 있을 겁니다. 시간이 그래요.


- 전화는 받을 거 아니에요. 전화해보세요. 아님 제가 해주한테 전화할까요?


- 그럼 해주가 더 좋아하겠죠.


- 알았어요. 제가 전화할게요. 해주 데리고 소풍에 가서 맛있는 거 먹어요.


모든 게 갑작스럽고 마음은 편치 않지만 월인은 그렇게 하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천강은 가끔씩 이층으로 해주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언니라고 지칭했고 해주도 어쩔 수 없이 언니라고 부른다.


그러나 할머니 앞에서는 엄마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할머니가 노여워하기 때문이다.

해주가 두 개의 다른 호칭 사이에서 갈등하고 힘들어하는 줄 천강이 모를 리 없지만 천강은 해주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해주가 등교하는 걸 도와주거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걸 기다린 적이 없는 천강이다.


그런 천강이 살갑게 해주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이 월인은 반갑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다.

- 해주야, 언니야. 레슨 마치고 소풍으로 와. 아빠랑 함께 맛있는 거 먹고 가자.


수화기 밖으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해주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이사하고 나면 학교에 복직할 거예요.

- 예! 기억이 납니까? 천강 씨가 선생님이었다는 게.


- 전에 언젠가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숙희 씨도 제가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었다고 했고요.


- 하지만 믿지 않았잖아요. 흥미도 관심도 없었고.

- 지금도 믿어지진 않아요. 별로 관심이 가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전 영어로 말할 수 있잖아요. 서재에 있는 원서들도 읽을 수 있고 영화를 볼 때도 자막을 읽지 않고 알아들어요. 그러니까 전에 내가 영어 선생이었든 아니었든 그게 뭐 중요해요. 그냥 가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 되죠.

- 선생님은 그냥 학과목만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낙관적이고 자신만만한 천강의 목소리와 눈빛이 우려된다.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성품이 차츰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억도 없는 천강을 학교에서 받아줄지 의문스럽다.


- 그럼 또 뭘 해야 하는데요!

- 아, 내 말은 학생들에게 좋은 성품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본보기가 되어야 살아 있는 교육이 되죠.


- 그런 건 아저씨가 걱정할 필요 없어요. 기타 교실 사람들은 나를 다 예쁘고 착하다고 하는 걸요. 학생들도 그럴 거예요. 그건 그렇고 해주는 제가 데리고 있을 게요.


- 해주를! 천강 씨가 데리고 있는다고요?


- 왜요, 싫으세요.

도전적인 목소리다. 언제부턴가 천강은 월인이 자기 부탁을 거절하거나 그런 기미가 보이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목소리를 높인다.


- 싫은 게 아니라, 아직 해주하고 이야길 못 해봤잖아요. 우리 둘 다. 그리고 아직 어머니껜 천강 씨 집 계약한다고 말씀 못 드렸어요. 기회 봐서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그리고 나서 해주 문제는 다시 상의하도록 해요. 해주라도 천강 씨 곁에 있다면 그나마 마음이 놓이겠지만 해주 마음이 어떨지 모르잖아요. 집에 가면 우선 어머니부터 설득해야 돼요. 그다음에 해주하고 이야기해 보자고요.


- 에이, 못돼 먹은 할망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 없는데 뭐 어때요. 서울이 집이라면서요. 가버리라고 하세요. 왜 안 가고 그러고 있대요.

- 그런 말은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리고 해주한테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해주가 혼란스러울 테니까. 오늘은 그냥 즐겁게 식사나 하는 걸로 해요.


금방 소풍 앞이다. 천강은 좌회전 깜빡이를 켠다.

천강은 길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시 알게 된 것일까 문득 월인은 궁금하다.


천강은 익숙하게 이것저것 음식을 주문한다.

월인이 천강에게 기타 교실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식사를 대접하라고 할 때는 시큰 둥 하더니, 두 번인가 기타 교실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밥을 먹고 갔다고 희진 부장에게 들었다.


기타 선생으로 보이는 남자와도 한 번 와서 식사를 했고 숙희와는 종종 와서 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소풍의 희진 부장은 월인이 전화를 하거나 들를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때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또 때로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주문한 음식이 차례로 나오고 있을 때 송현이 대리가 해주를 데리고 온다.


해주는 어디에 앉을지 몰라 망설이는 눈치다. 송현이 대리도 눈치만 살핀다.


월인은 천강에 대한 호칭 때문에 잠시 고민한다. 하지만 천강이 해주에게 손짓하며 언니 옆에 앉으라고 말한다. 그제야 해주는 천강 옆에 나란히 앉는다.


- 해주야, 언니랑 함께 살까?

식사 도중에 천강이 불현듯 해주에게 묻는다. 월인의 당부를 그새 잊은 듯하다.


- 네! 지금 같이 살잖아요.


- 아직 해주한테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 알았어요.

천강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난다.


- 언니는 그 집에서 나올 거야. 오늘 네 아빠랑 너희 학교 옆에 있는 빌라를 계약하고 왔어.


월인의 말은 건성으로 넘겨버리고 들뜬 마음을 감추지 않은 채 해주를 바라본다.


- 정말요! 언제 이사해요?

해주는 월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묻는다.

- 가을에. 이상한 여자야. 금방 이사 갈 것처럼 해놓고 막상 계약한다니까 11월에 비워준다고 그러니. 얼른 집에서 나오고 싶은데.


- 집이 안 나갈까 봐 미리 내놓은 거라고 했어요.

월인이 말한다. 천강의 고집을 꺾을 방법은 없다.

- 흥, 그래도 그렇지. 여우 같은 년.

천강은 아무렇지 않게 욕을 내뱉는다. 악의적인 감정이 실리지 않아 사납게 들리진 않는다. 사람들이 천강의 욕설과 거침없는 말투를 재밌어하는 이유이다.


'솔직하고 좋잖아요. 그래서 기타 교실 사람들이 천강 씨를 좋아해요.'

천강의 거침없는 입담을 두고 숙희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다들 그렇게 해요. 천강 씨가 집이 나오자마자 계약한 거고요. 언제나 상대방의 형편이나 입장을 헤아려야 하는 거예요.


- 칫, 또 잔소리. 아저씬 도대체 누구 편이야. 지겨워 정말.


- 아빠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예요.

- 언니도 알아.

어쩐 일로 천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 언니는 아직 아프잖아요. 그런데 혼자 어떻게 살아요.

해주는 월인을 바라본다.


- 아프긴 내가 어디 아프니. 봐 멀쩡하잖아. 처음부터 아픈 것도 아니었어. 언니 가슴속에 희망이랄까, 기대랄까 이런 것이 가득해.

- 할머니께서 허락하셨어요?


- 이 일은 할머니와 상관없어.


- 할머니 때문에 나오시는 거예요? 할머니가 야단하셔서?


- 그런 건 아니야.

- 그런 거라면 제가 할머니한테 야단치지 말라고 말씀드려볼게요.


- 내가 그 집에서 살고 싶다면 그 할망구를 쫓아내면 되지.


당혹스러운 듯 해주가 할 말을 잃고 월인을 쳐다본다.


- 어머니한테 그런 말 쓰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월인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해주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장모, 그러니까 천강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적대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것이 염려된다.


- 그래, 할머니.

천강은 선심 쓰듯 내뱉고는 해주를 보고 활짝 웃는다.


- 그 집도, 여기 소풍도 언니 거래. 다시 말하면 언니가 주인이야, 해주야. 그러니까 언니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야. 주인이 나가라면 아무리 사나운 할머니도 나가야지. 안 그러니!

천강은 해주의 놀란 얼굴에도 아랑곳 않고 즐겁다.


- 언니, 할머니 내쫓지 마세요.


- 걱정 마, 해주야. 그렇다고 정말로 내쫓지는 않을 거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언니가 나오는 거잖아.

천강은 깔깔 거리며 웃는다.


사고 전에도 천강이 웃음이 많기는 했다. 그땐 헤픈 웃음도 깜찍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웃음은 아무리 잘 봐줘도 가볍고 불량하다.

- 할머니가 싫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꼭 할머니 때문에 나오려는 건 아니야. 언니도 새 출발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해주 넌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언니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도 하고 예쁜 아기도 낳을 거야.

수만 마리의 나비가 천강의 눈에서 쏟아져 나와 춤춘다.


천강에겐 황홀하지만 월인에겐 충격이다.


해주는 월인을 쳐다보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웃음기를 띠고 천강 앞으로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밀어 놓아준다.


꽃게 살도 먹기 좋게 발라서 천강의 접시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천강은 냉큼 집어먹는다.


해주가 언니 같고 천강이 동생 같다.

- 천강 씨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월인은 해주에게 눈짓을 하고 짐짓 태연한 얼굴로 천강에게 묻는다.


천강은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월인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해주를 보고 다시 눈을 찡긋한다.


모든 게 농담 같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무력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제자리로 돌아갈 수나 있는 것인지. 만약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니 어떻게 되는 건지.


월인은 식사를 하면서 의사가 한 말을 되짚어 본다.

'경우에 따라서는 취향이 달라지고 성격도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두엽을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기억이 되돌아온다고 해도 예전 같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새로 시작한다고 생각하시는 게 편할 수도 있습니다. 예전과 다르다고 불평하면 힘들어질 겁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혼하는 사람들도 종종 생겨나긴 합니다. 성격이 포악해지거나 괴팍해질 경우 그렇습니다. 정서 불안 형태를 띠기도 하고 거짓말을 일삼기도 합니다. 대부분은 나쁜 쪽으로 변하거든요.'

그리고 의사는 사고로 전두엽이 손상된 피어니스 게이지를 예로 들어가며 설명을 덧붙였다.

건설현장 소장이었던 피어니스는 공사 중 높은 곳에서 떨어진 쇠파이프로 전두엽을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치료 후 퇴원해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남자는 전두엽 중 상당 부분이 훼손되는 사고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차분하고 논리적이며 치밀한 성격이었던 그 남자는 사고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늘 장황하게 떠벌리고 다녔고 난폭해졌으며 절제심도 인내심도 없어서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천강도 전두엽을 심하게 다쳤으니 성품 변화가 올 수 있을 거란 얘기였다.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다. 천강은 콧노래를 부르며 이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해주를 불러 물을 갖다 달라며 심부름을 시킨다.

쟁반에 생수병과 물컵을 받쳐 가지고 올라간 해주는 내려오지 않는다.


간헐적으로 천강의 과장된 웃음소리만 들려온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 같다.


장모가 없는 줄 알고 마음 놓고 하는 통화여서 웃음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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