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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Jul 17. 2023

월화 3-2, 문 잠그지 마.

어느 여름 해변에서 만난 소나기

“안녕하세요. ”


문을 열자 낯선 방문자들이 내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


네  안녕하세요.


나는 미처 치우지 못한 월화의 옷이 떠올라서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게다가 월화가 알몸으로 뛰어나와서 강간당했다고 엉엉 울어대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흙의 기운을 버리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도착하자마자 강간범이 될 수도 있는 위기였다.


“아~ 선교사님,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와서 놀라셨죠? 이 시간이 아니면 며칠간 찾아뵙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주무시고 계셨던 건 아니시죠?”


사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허둥대는 나를 보고 그도 당황한 듯 보였다.


"저는 선교사가 아닙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방문이 뭔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려주면 발길을 돌릴 수도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아, 네. 그거야. 본교회 수석 장로님 사위 되실 분이라고, 소영 씨한테 들었습니다."


사십 대 남자가 아는 척하면서 내 손을 잡으려고 했다. 악수를 하려고 한 거겠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뒤로 감춰버렸다.


이내 바보 같은 짓인 걸 깨달았지만 손을 다시 내미는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사내도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그들 눈엔 내가 모자라보였을지 몰랐다.


나는 이 촌구석에 사는 그가 본교회 여직원을 알고 있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사내가 본교회 소영 씨에게 내 행동거지를 보고 하면 그녀는 다시  이사님에게 전달하는 식의  감시 체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설사 의도한 체계는 아니라 해도 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들이 그런  경로를 거쳐 나를 음해할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크게 흔들어 주었어야 옳았다. 하지만 내가 겁에 질린 듯 손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가 손을 내미는 순간 나는 할머니가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옷걸이에 걸린 월화의 원피스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아챘고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겁에 질린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머니, 뭐 하세요."


다행히 사내가 자기 어머니의 팔을 툭 치는 바람에 할머니는 시선거두어들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얼굴은 여전히 저게 뭐지? 여자 옷이 왜 저기 있지? 하고 스스로 고민하는 듯 보였다. 금방 자기 어머니의 팔을 특 쳤던 그도 자꾸 옷걸이 쪽으로 시선이 가는지 힐끔거렸다. 


"오셨으니까, 잠깐 올라오세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것도 아주 공손하게. 그 대목에서 내가 그들에게 해야 할 온당한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만약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면 남자까지 나를 의심할게 분명했다.


다행히 나의 공손한 환대는 금방 효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구심을 일단 보류하고 소파를 두고 굳이 바닥에 꿇어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기회였지만 그걸 놓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나는 앉는 척하다가 뒤꿈치를 들고 공중부양하듯이 옷걸이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곳에 널려 있던 월화의 옷을 걷어 안방으로 들어갔다.


월화는 내 셔츠를 꺼내 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월화가 허락도 없이 내 여행 가방을 뒤졌어도 화는 나지 않았다.


"꼼짝 말고 있어야 해요."


나는 월화의 옷을 내가 들고 온 트렁크 위에 내려놓고 나오면서 속삭였다. 월화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착하고 순진무구해서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졌다. 대신 비밀스러운 보물을 숨겨놓은 것 같이 행복했다.  


옷도 감췄겠다  나는 느긋하게 그들 곁으로 돌아가 기도가 끝나길 기다렸다.




사내는 자신을 율오리교회 청년회 회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율오리 이장도 있다고 했다.


함께 온 할머니는 율오리교회의 권사였다. 청년회 회장은 권사의 사대독자이기도 했다.


"전 그냥......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나는 하마터면 휴양 어쩌고 할 뻔했지만 다행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바쁜 여름철 시골 사람들에게 휴양이라는 말이 곱게 들릴 리 없었다. 게다가 말이란 한 다리 건너면 자기들 기분에 따라 살을 붙이거나 깎기 십상인데 자칫 이사님 귀에 휴양온 남자로 지칭되어 덕 될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흙의 기운을 빼러 왔다고 고백하기도 뭐 해 그냥 입을 다물었다.


"폐를 끼치다뇨. 그런 말씀 마세요. 본교회 신도면 율오리 교회  신도들  하고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청년회 회장이 너그럽게 웃어 보였다. 


“아직 미혼인가 봅니다. 혼자 오신 거 보면.


권사 할머니가 불쑥 묻고 소리 내어 웃었다.


“아, 예....... 아직.”


"아이참 어머니! 이분은 본교회 수석 장로님 사위 되실  분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내가 정신이 이렇게 없다니까. 금방 들어도 돌아서면 까먹어."


청년회 회장의 말에  권사는 무안하게 웃었다.


“저희 가족도 실은 교회 하고는 거리가 먼, 아니 교회가 하는 일은 뭐든지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카르타필루스처럼 방랑하는 유대인이었죠.”


카르타필루스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향해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예수에게 빨리 가라고 채찍을 휘둘렀다가 죽지 않고 세상 끝나는 날까지 영원히 살아야 하는 저주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후세례를 받고 성직자들과 함께 교회에서 봉사하며 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청년회 회장은 교회를 핍박하다가 개종한 자신의 가족을 카르타필루스에 비유했다. 죽지 않고 떠도는 자, 카르타필루스라고.


“그럼 회장님 연세가 이 천 살 정도 되겠군요?”


나는 짐짓 농담을 던졌다.


“아, 그렇게 되나요.”


청년회 회장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신학을 하고 있는데 졸업 후에는 율오리교회에서 시무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선교사가 자주 바뀌는 데다 그나마 파송이 늦어져 일 년씩 목자 없이 지내는 경우가 있어 신학교에 다니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본교회 여직원인 소영 씨가 본교회에서 설립한 신학교 교무실에서도 근무한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러니까 그가 신학교에서 소영 씨를 알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모르긴 해도 신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사님에게 더러 특강을 듣기도 했을 터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 앞에서 더욱 조신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산골 오지에 려고 하는 교역자가 없기 때문에 본교회에서도 좋아할 거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커피라도 끓여 올게요."


갑자기 권사 할머니가 자기 집인 양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했다.


"실은 제가 좀 피곤해서...."


나는 그들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어머니. 늦은 시간 커피 마시면 잠 못 잘 수 있으니까 그만두세요. 선교사님도 쉬셔야 하고, 우리도 이제 가야죠."


청년회회장이 벌떡 일어나서 바지를 추켜올렸다. 그때만큼은 청년회회장이 시원스러워 보였다.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는 그들을 사택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 마을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청년회회장은 선 채로 그렇게 말했다.


"사찰집사도 그렇고 그 집 두 딸은 사악한 마귀의 자녀들이니까 선교사님께서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택엔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좋아요.

혼자 식사 차려드시기 힘들면 저희 집에 오셔서 드시고 가시든지요."


권사 할머니의 목소리가 커서 월화가 듣고 알몸으로 뛰쳐나올까 봐 걱정됐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안방문을 힐끔 대는 것밖에 없었다.


권사 할머니는 성이 안 는지 아니면 그녀들이 마녀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인화와 월화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들을 끄집어내서 들려주었다.


인화와 월화가 어린 시절 율오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웃 마을까지 돌아다니며 음식을 훔쳤을 뿐만 아니라 남의 집 바가지에다 똥까지 싸질러 놓고 다니는 악동이었다는 것이다.


"훈계하고 야단을 쳐도 미친 것처럼 깔깔 웃어대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들인데, 인제 대가리까지 커버려서 누가 뭐라지도 못해요. 저 마녀들이 몸 팔고 다닌다는 소문이 읍내에까지 다 퍼져서 제가 창피해서 죽겠어요. 어서 사택에서, 아니 마을에서 쫓아내야 되는데."


권사는 청년회회장이 그만하라고 만류하는데도 끝내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뒤에야 걸음을 뗐다.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나는 안방문을 흘끔거리며 가슴 졸여야 했다. 다행히 내가 염려했던 일, 즉 월화가 뛰쳐나와 권사 할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흔든다거나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권사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월화를 비롯해 사택 식구들이 혐오스럽기는커녕 이상하게 더 마음이 갔다.   




주방에 가서 물을 한 컵 마시고 괜히 거실을 서성대다가 거실 창에 붙어서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간간히 빗줄기가 내리쳤다.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나뭇가지가 내 마음처럼 휘청 기울어졌다 일어서기를 되풀이했다.


마침내 나는 월화를 깨워서 돌려보낼 결심을 하고 방문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그냥 놓고 물러나서 거실을 서성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지만 월화를 돌려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무너지고 말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거실 탁자 앞에 앉아서 졸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수미도, 어머니나 아버지도, 선지자도, 하나님도 아니었다. 만난 지 단 하루도 지나지 않은 월화였다.


붉은 노을이 지고 있는 다리 위에서 월화의 허리를 껴안고 서 있는데 어디에서부턴가 슬픈 운율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벌레 울음소리 같기도 한 신비로운 운율은 월화의 긴 머리카락에서, 아니 월화의 몸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니 월화의 몸이 울고 있는 소리였다.


등 뒤에서 월화를 껴안고 있다가 월화의 머리카락에 입 맞추었다. 월화가 고개를 돌려 내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갰다.


노을이, 붉디붉은 노을이 냇물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화강석 다리를 불태우고 월화와 나마저 집어삼켰다. 노을 속에서 타 죽는 그 순간 황홀하고 행복했으며 또한 슬프고 눈물겨웠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언젠가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다는, 그 다리 위에서 월화를 만난 적이 있다는 강렬한 현시의 느낌에 사로잡혔다.




안방 문이 빠끔 열려 있는 걸 보고 월화가 사택으로 돌아갔나 생각했다. 신발장 문을 열어보았다. 월화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


화장실에라도 다녀온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상하게도 무덤덤한 마음으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두려움도 애절함도 극진한 마음도 모두 사라지고 긴장감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월화는 이불을 걷어차고 대신 내 와이셔츠와 내 삼각팬티를 찾아 입고서 큰 대자로 누워 자는 척했다. 자는 척하는 거라고 느껴졌다.


욕망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월화의 몸을 덮어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월화가 으응, 신음소리를 내면서 뒤척이는 듯하더니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오른발을 내 어깨 위로 올렸다.


콧속으로 월화의 살 냄새가 스며들자 욕망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흙의 기운이 하늘을 뚫을 기세였다.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가서 8:7)  


하나님의 말씀을 핥던 바로 그 입술로, 그 혀로, 나는 어느새 월화의 다리를 핥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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