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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Jul 09. 2023

월화 3-1, 문 잠그지 마.

어느 여름 해변에서 만난 소나기처럼

열흘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아파트 단지에서 우연히 그 남자를 만났다.


대강 열흘쯤 흘렀다고 생각할 뿐 사실은 그보다 많은 날들이 흘러갔을 수도 있고 겨우 사나흘 정도에 불과한 날들이 지났을 수도 있었다.


열흘이란 흘러간 날에 대한 내 마음속 추상일 뿐이었다. 시계와 달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날들을 나는 그때 살아가고 있었다.


그 남자의 주소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같은 단지의 아파트였고, 위장 전입자나 투자자가 아니라면 그곳에 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인감증명을 떼어주던 날 이미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한 번쯤은 우연히라도 만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몇 동 몇 호인지 모르고 있었다. 주소를 확인하면서도 대강 보아 넘긴 탓이었다. 그 남자에 대한 호감에 비하면 너무도 허술한 탐색이었다.




그 남자는 예의 그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선글라스 위로 똑바로 내쏘면서 그 남자를 향해 걸었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과 태도는 당돌하고 도발적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무심코 나를 비켜가 버렸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마주 오는 나를 못 보고 그냥 지나갈 수가 있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남자가 무슨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나를 위로하면서.

    



집안이 열기로 후끈거렸다.

환기를 하려고 베란다 문을 열어젖혔다. 뭉텅이 바람이 훅하고 불어왔다. 쾌했지만 그 남자가 망쳐놓은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문득 대각선- 그러니까 109동이면서 나와 같은 6층-에서 인기척이 날아왔다.


내가 살고 있는 108동과 109동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직각이어서 거실이 들여다보이는 불편한 이웃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은 거실에 커튼을 쳐 놓고 이웃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나는 인기척이 날아온 109동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남자가 커튼은 물론 베란다 창문까지 활짝 열어놓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파트 꼭대기 반달이 걸려있었다. 아마  남자도 나처럼 집안에 가득 찬 열기를 빼내려고 베란다로 나왔던 모양이었다.


나는 달을 일별하고 그 남자의 거실을 훔쳐봤다.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 남자의 거실엔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소파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텅 빈 쓸쓸함이 고여 있었다.


“거기 사시나 보죠?


나는 뻔뻔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것도 못 알아들을까 봐 큰소리로.   남자가 혼자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


달에서 나에게로 얼굴을 돌린 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뻔히 바라봤다.


“동사무소에서 뵈었잖아요. 도장 잔뜩 가지고 와서 제가 .......”


“아, 예........ 선생님이셨군요. 그땐 죄송했습니다. 제가 워낙 정신이 없어서 고맙단 인사도 못 드리고........ 나중에 기회 되면 다시 찾아볼 생각이었습니다. 마실 거라도 사가지고. 그때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제가 워낙 오랜만에........ 고고국에 온 거라서.......”


그 남자가 고국이라는 말을 할 때 살짝 더듬거렸다고 나는 기억한다. 왜곡된 기억일 수도 있지만.....


“어디에 다녀오셨는데요?”


“여기저기 한 3년 가까이 돌아다녔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갑자기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이웃집 거실이 신경 쓰였다.


“나중에 밥이나 한 번 사세요.”


나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던져놓고 서둘러 베란다에서 물러났다. 그 남자가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월화 3 


문 잠그지 마, . 나 좀 있다 갈게.”   

인화가 등을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월화가 입술을 내 귓바퀴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월화의 입김이 내 안 깊숙이 파고들어 발바닥까지 뜨겁게 달구었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사택을 나왔다.


월화에게 불쾌하다거나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은연중에라도 긍정의 신호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선교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갔다. 정말 월화가 올까 봐 겁이 났었다. 그러나 신발을 벗기 전에 잠갔던 현관문을 다시 열어 두었다.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는지 몰랐다.   


거실에서 잠시 허둥대다가 다시 현관문을 잠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문을 열어 두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결심을 굳히고 현관문을 잠갔다. 그리고 문이 잠길 때 나는 철컥 소리에 안도하기까지 했다.




갑작스럽게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방마다 다니며 창문을 활짝 열어둔 기억이 났다.


나는 서재와 침실, 주방, 거실을 뛰어다니며 열려 있던 창문을 서둘러 닫았다.


그리고 거실 창 앞으로 바짝 다가서서 어둠 속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번개가 천지를 찢어놓는 찰나의 순간마다 비에 흠뻑 젖은 율오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연이은 천둥소리는  밑에서 터지는 수천 개의 폭발음처럼 크고 위협적이었다.


잠시 멈췄던 번개가 또다시 내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마당을 가로질러 오고 있는 윌화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뒤이어 어깨를 짓누르는 천둥소리가 났지만 월화의 실루엣은 끄떡도 않고 태연하게  걸어왔다.


사택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걱정됐다. 나는 월화의 속삭임을 까맣게 잊고 서둘러 잠갔문을 활짝 열고 그 아이를 맞았다.


비에 흠뻑 젖은 월화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말없이 웃으면서 들어왔다.  그리고 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로 더니 거침없이 겉옷을 벗어던져버렸다. 


그 아이는 팬티조차 입고 있지 않았지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부끄러워 숨조차 내쉴 수가 없었다.


신비롭게 솟아오른 작고 힘찬 가슴. 쥐눈이콩만 한 초콜릿빛 유두. 한 주먹에 잡힐 만큼 가는 허리. 학처럼 우아한 다리. 죽음처럼 외롭고 어둠처럼 까맣게 불타오르는 둔덕.


입을 반쯤 벌리고 넋이 나가서 월화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득 생각난 듯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가져온 트렁크를 열고 수건과 가운을 집어 들었다.


“이거  입으세요.”


그제야 말문이 트였다.


에이, 너나 입어."


월화는 장난스레 웃고는 수건만 뺐다시피 아챘다. 자기가 옷을 벗으면 세상의 어떤 남자든 바보 멍청이가 된다는 걸 월화는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샤워할 건데, 같이 씻을래! 응.


월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온 사람을 대하듯 해맑게 말하고 평온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아이에게 죄책감은커녕 어색함조차 없었다.


"저는 괜찮으니까 머먼저 씻으세요."


나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래, 알았어."


돌아서 걷는 월화의 엉덩이는 두 개의 보름달이 출렁이는 것  같았다. 월화가 서 있던 자리에는 달의 오줌 같은 물기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나는 월화가 벗어놓은 옷을 들고 어떻게 할 줄 몰라하다가 물기를 짜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수건을 꺼내와 월화가 흘린 달의 오줌닦았다.


어느새 거센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나는 거실 창문을 열었다. 방충망의 자잘한 구멍 사이로 젖은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조여들었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였다.


하지만 나는 이내 소스라치게 놀라서 창문을 닫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누군가 우산을 나란히 쓰고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 사택 앞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아아 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가 현관문을 잠갔다.


그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했다. 깊은 잠에 빠진 척하고 문을 열어주지 말까. 그러기에는 거실 불이 너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이제 와서 거실 불을 끌 수는 없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불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고 거짓말할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월화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내가 월화에게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분명하게 세 번씩이나 두드렸다.


상황에서도 월화는 싱긋 웃어 보이고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월화에게는 모든 것이 장난처럼 여겨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안방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한 번 더 돌아본 뒤에 월화가 신고 온 슬리퍼를 신발장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또다시 안방 문이 닫혀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봤는데 옷걸이에 걸려 있는 월화의 옷이 보였다. 그러나 이미 문은 열렸고 그들은 들어서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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