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2. 천강의 기억을 찾아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수저를 옮겨가며 식사를 하던 천강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갑자기 어느 손으로 수저질과 젓가락질을 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대는 것이다.
월인이 원래 오른손잡이였다고 알려주어도 소용이 없다.
천강은 아침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왼손에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월인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천강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더듬더듬 주방을 나선다. 거실 한복판에서 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리번거린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것이 마치 벼랑을 만난 것 같다.
월인은 달려 나가서 천강의 손을 붙잡고 이끌어주고 싶다. 하지만 의심과 분노로 희번덕이는 그녀의 눈빛 때문에 안타까움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얼어붙은 침묵 속에서 얼마간 시간이 지난다. 마침내 천강은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천강은 그대로 석고상처럼 고요하다.
차츰 천강을 뒤덮은 것은 짙은 안개다. 천강의 몸이 밤낮없이 안개를 자욱이 피어 올리는 호수가 되어버린 것인지 모른다.
‘역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대개 며칠 혹은 몇 달 만에 기억이 돌아옵니다. 드물게는 몇 년 만에 기억이 돌아오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기억이 돌아오면 기억을 상실한 뒤의 일은 또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을 수 있죠.’
담당 의사가 말했을 때 월인은 절망보다는 희망을 더 가졌다. 처음엔 며칠을 기다렸고 며칠이 지나자 몇 달을 기약했으며 몇 달이 지나가고 나자 몇 년에 희망을 걸고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영원이라도 기다리리라.'
월인은 다시금 다짐한다.
벽난로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온다. 마침 설거지를 끝낸 월인은 생각난 듯 찻잔에 과육을 담아가지고 나온다.
과육은 사고 전 천강이 흑설탕에 재어 발효시켜 놓은 것이다. 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에 뜨거운 물을 반쯤 채우자 과육이 풀어지면서 달콤한 향기를 풍긴다.
하지만 천강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치솟은 천강의 콧날 위로 가파르게 흐르던 괴로움과 외로움의 안개가 인중과 턱 선을 지나 폭포수 같은 목을 타고 빠르게 쏟아져 그녀의 가슴골에 푸르게 고인다. 금방 익사할 만큼 깊어진다.
월인은 얼른 과육이 몸을 풀고 있는 찻잔 속으로 시선을 빠뜨린다. 그리고 수저로 찻잔 속을 휘젓는다. 천강이 기억을 상실하고 난 뒤로 월인에게 사랑은 금지되었다. 천강의 입장에서는 낯선 남자를 거부하는 것일 뿐이지만 월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다.
-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셔야 돼요.
월인이 모과차를 내밀지만 천강은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무심하다.
천강은 속울음을 삼키고 있는 중이다.
나는 누구일까! 아무리 떠올리려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망각의 끈을 놓아버리면 편할 것 같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헛된 도피. 하얀 기억을 더듬으며 나를 찾아 나서는 게 습관이 되었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새하얘지는 기억. 하얀 기억 속에서 뭔가 떠오를 듯 어지럽게 맴도는 그 무엇이 도리어 벼랑처럼 나를 막아서지.
그러면....... 내 모든 감각은 깜깜해지고 맹인이 된 듯 한 발도 내딛을 수 없어.
내가 낯선 이곳에서 남편을 자처하는 낯선 남자를 참고 견디며 숨 쉬는 이유는 뭘까. 나는 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듯 내 마음조차 알 수 없다. 그저 분노하거나 울거나 방에 들어가 누워버리거나 할 뿐이다.
- 집에 가고 싶어.
생각의 막다른 끝에서 천강은 습관처럼 내뱉는다.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천강에게 집은 그리운 모든 것이다. 집에 가면 지워졌던 모든 것이 마술처럼 되살아날 것만 같은 기대 때문에 천강은 이 낯선 남자와의 일상을 참고 견딜 수 있다.
불현듯 이 남자가 내 남편일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편일 수 있다는 것과 남편인 것은 전혀 다르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 남자를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게 천강에겐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 낯선 남자가 남편이라고 주장하면 천강은 말할 수 없이 불편하고 불쾌해진다.
월인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 천강의 가슴골로 향하는 시선을 억지로 떼어내며 그녀 맞은편에 앉는다. 그러나 어쩐지 천강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것처럼 그녀의 살 냄새가 나는 듯하다. 냄새는 보드랍고 촉촉하고 따뜻한데 어쩐지 갈증이 인다. 목마른 환취다.
월인은 애 혹은 욕을 삼키고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눈 덮인 마을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흐린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 내리고, 세상은 새하얗게 지워져 있다. 이미 폭설로 뒤덮여 곳곳에서 눈사태 조짐마저 보이고 지형조차 분간하기 어려운데 눈은 그칠 줄 모른다.
눈에 짓눌리고 짓밟힌 세상처럼 천강의 머릿속은 시도 때도 없이 하얀 폭력에 시달리고 있겠지. 세상이든 천강의 머릿속이든 하얀 폭력을 막을 방법은 없다. 무력하게, 무력적인 눈에 파묻히는 일밖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고구마 타는 냄새가 달콤하게 난다. 천강이 방에서 나오길 무료하게 기다리며 벽난로에 넣어 놓은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월인은 벌떡 일어나 벽난로에 달린 쇠서랍을 잡아당긴다. 다행히 많이 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방열 장갑을 끼고 고구마를 꺼내 접시에 담는다. 살짝 탄 것도 있고 껍질이 터져 노란 속살이 드러난 것도 있다. 월인은 그중 가장 알맞게 익은 것을 집어 껍질을 벗긴다. 손끝이 데일만큼 뜨겁다. 월인은 결국 포기하고 고구마를 내려놓는다.
고구마를 굽고 껍질을 벗기긴 했지만 처음부터 꾸역꾸역 먹을 마음은 없었다. 고구마를 구운 건 그냥 습관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받자마자 던져버릴게 분명한 천강에게 내미는 것도 망설여진다.
월인은 더 이상 천강을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천강의 분노가 커지는 것 같아 그저 지켜보며 기다리기로 마음먹는다. 잠시만이라도 그렇게 기다려보고 싶어 진다.
천강은 월인이 내려놓은 고구마를 곁눈질로 본다.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인 시선이다. 고구마 타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할 때 천강은 불편한 식욕을 느꼈다. 하지만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행동만 하는 낯선 남자 앞에서 선뜻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천강은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모르는 남자가 베푸는 친절이 싫고 역겨운 것이다.
'나를 가지기 위해 온갖 흉계를 꾸미고 마치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구는, 그래서 슬퍼 미치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이 남자의 눈빛이 나를 화나게 한다. 나는 욕망과 위선 덩어리인 이 남자를 혐오한다. 그것이 내 안에 있는 분명한 감정이고 나는 그것을 믿는다.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것이라고는 이 남자에 대한 혐오감밖에 없다. 설마 기억이 돌아온 뒤에 이 남자의 말이 전부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도 내 안에 있는 이 감정이 바뀌지 않는 한 나 또한 바뀔 수 없을 것이다.'
천강의 차가운 눈길과 창백한 얼굴에 드리운 알 수 없는 분노 그리고 경계심을 월인은 그렇게 읽는다.
아닌 게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난 천강은 월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
월인은 서재로 들어가려다 말고 우뚝 서서 천강의 방문을 바라본다.
천강의 방은 본래 월인과 천강이 함께 쓰던 부부 침실이다. 하지만 천강이 퇴원한 뒤로 자연스럽게 천강의 방이 되어버렸다. 반대로 천강과 함께 쓰던 서재는 월인의 침실이 되었다.
월인이 천강의 출입을 막은 적이 없다. 하지만 천강은 아직 한 번도 서재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천강도 월인이 그 방에 들어오는 걸 막은 적이 없다. 애당초 월인이 그 방 출입을 하지 않은 것뿐이다.
병원에서부터, 그러니까 의식을 되찾은 이후 줄곧 천강은 월인을 타인 취급해왔는데 집에 왔다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천강을 이 집, 특히 그 방에 머물도록 설득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었다.
퇴원하던 날이었다. 천강은 집에 간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도착하자 낯설어하며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월인은 하루만 쉬었다가 집에 가자며 천강을 달랬다. 오랜 설득 끝에 거실까지는 어떻게 천강을 데리고 들어왔다.
집 안에 발을 들여놓은 천강의 얼굴에는 낯선 사람들에게 이끌려 낯선 곳에 온 사람의 두려움과 소외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월인과 장모는 병원에서 입던 옷가지며 음료수, 약봉투 따위를 정리하느라 분주히 집안을 오갔다.
천강은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고 소리 없이 울고 있다가 월인이 다가가자 납치라도 당한 것처럼 살려달라며 애원했다.
천강이 겨우 진정이 되었을 때쯤이었다. 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해주가 엄마를 부르며 다가갔다. 월인이나 장모가 해주에게 뭐라고 귀띔하거나 만류할 겨를도 없었다.
- 해주야, 엄마 아직 다 나은 게 아니야.
월인은 해주의 뒤에 대고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월인으로서는 혹시라도 천강이 해주를 보고 반색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강은 다가오는 해주를 보면서 울먹울먹 하다가 기어코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해주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해주는 엄마가 자기만은 알아볼 것이라 믿고 있었고, 엄마가 자기를 보자마자 예전처럼 안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아무도 자기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해주를 다독이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은 장모였다.
거실 소파에서 쓰러져 잠든 천강은 일어나자마자 다시 집에 데려다 달라며 떼를 썼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월인은 천강에게 약속했다. 그제야 천강은 천진한 얼굴로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웠다.
다음날 아침, 월인은 천강을 차에 태우고 서초동 아파트로 갔다.
그곳은 결혼 이후부터 줄곧 살던 집이었다. 아파트 경비실 앞에 차를 세운 월인은 경비실에 들러 집주인에게 연락해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설명하기 난감했지만 주인 여자는 전 집주인이란 것만으로 쉽게 허락했다. 그러나 천강은 현관문이 열리자 겁먹은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그다음엔 오피스텔로 향했다. 서초동 아파트를 처분하고 지금 살고 있는 전원주택을 마련했지만 직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주중에만 머물던 곳이었다.
천강은 비좁고 답답하다며 오피스텔 생활을 그다지 즐거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강이 전원주택 가까이 있는 중학교 영어교사로 발령이 나기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니 보여주고 싶었다.
오피스텔은 마침 비어 있었다. 천강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손톱만 깨물고 있었다.
오피스텔 주인이 비밀번호를 알려 줬기 때문에 월인이 직접 현관문을 열었다. 월인이 문을 여는 동안 천강은 더욱더 심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문을 연 뒤로 천강은 손톱 깨무는 걸 멈추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어서 그랬는지 천강은 아파트에서와 달리 신발을 벗고 월인을 따라 들어왔다.
방안엔 미처 치우지 못한 서류더미들이 쌓여 있었고 전선들이 어지럽게 얽혀 나뒹굴었다. 천강은 방안을 한번 훑어보더니 베란다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높은 건물들 속에서 천강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천강은 곧 눈물을 보이며 돌아섰다.
이번엔 그녀가 태어나서 결혼 전까지 살았던 처갓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는 도중 월인은 그녀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고 그녀의 어머니가 살고 계신 집이라고 말해줬다. 물론 천강은 믿지 않았다.
처갓집 대문 앞에서 천강을 알아본 아주머니 한 분이 천강의 진짜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를 했다. 그렇지만 천강은 낯선 사람을 대하듯 돌아서버렸다. 이유를 모르던 아주머니는 얘, 은진아, 하며 더 큰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천강은 도망치듯 달아났다.
월인은 간신히 천강을 붙잡았다. 하지만 천강은 선 채로 완강하게 버텼다. 시간이 흐르자 천강은 지쳐갔고 마침내 주저앉아버렸다.
대청호가 보이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체념한 듯 얌전하게 있던 천강은 내려달라고 생떼를 썼다. 할 수 없이 월인은 호수 둔치로 내려와 차를 세웠다. 천강과 가끔 자전거를 타고 와서 놀다 가던 곳이었다.
천강은 더듬더듬 길을 찾아 걸었다. 월인도 천천히 뒤따랐다. 부들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다. 천강은 호수를 바라보며 서럽게 울었다. 보다 못한 월인은 천강이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월인은 습관처럼 천강을 끌어안았다.
'천강 씨, 나를 두려워하지 마. 난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이야. 이제 내 품에 안겨서 나를 느껴봐. 우리는 서로 사랑했으니까, 기억은 나지 않더라도 느낌은 남아 있을 거야. 조금만 참고 나를 느껴 봐. 내가 누구인지 몸으로 느껴 봐.'
천강은 날뛰며 소릴 질렀다. 숫제 비명이었다. 하지만 월인은 천강을 놓아주지 않고 더욱 끌어당겼다.
월인은 천강의 무의식 속에 자신이 부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한 몸이 될 듯이 그리워했던 시간들이, 한 몸이 되어 지냈던 날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머리로는 기억할 수 없어도 몸 어딘가에는 기억이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무의식 속에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고 월인은 믿었다.
궁지에 몰린 날짐승처럼 파닥이던 천강은 어느 순간 단호하게 월인을 밀치고 도망쳤다. 월인은 위기가 온 것을 감지했다. 늘 염려하던 것 중에 하나가 자칫 천강을 잃어버리면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월인은 천강의 뒤를 쫓았다. 다급해진 천강은 호수로 뛰어들었다. 놀란 월인은 뒷걸음쳤다. 그리고 월인은 억새밭에 몸을 감추고 천강을 지켜봤다. 월인의 짐작대로 천강은 몸을 돌려 호수에서 나왔다.
천강은 호수를 따라 달렸다. 그녀는 건조한 검은 모래 위로 물에 젖은 족적을 남겼다. 호수를 멀리 돌아 천강이 뛰어든 곳은 호숫가 반대편 낡은 움막이었다.
예전에도 천강은 호수 건너에 있는 그 집에 누가 살고 있을지 궁금해했었다. 덩달아 월인도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하지만 그날 천강은 궁금증이 아니라 월인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강은 움막 주인으로 보이는 오십 대 남자 뒤에 몸을 숨기며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이 남자가 나를 강간해요. 하려고 한다, 가 아니라 해요,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려고 한다, 보다 해요, 가 더 호소력 있었다.
당황한 움막 주인이 모르는 사람이냐고 더듬더듬 물었다. 월인이 무기라도 들고 있는지 살펴보는 눈길이 겁을 집어 먹은 듯 보였다.
천강은 호숫가에 앉아 있는데 처음 보는 이 사람이 갑자기 달려들어 자기를 강제로 눕히고 발로 차고 때리면서 옷을 벗기려 했다고 움막 주인 뒤에 매달려 호소했다.
울음 섞어 두서없이 내뱉는 말이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움막 주인은 곁에 있던 곡괭이자루를 집어 들었다. 자기 품으로 날아든 가여운 여인을 구하겠다는 열의에 사로잡힌 듯 움막 주인의 두 눈은 이글거렸다.
월인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움막 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움막 주인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천강에게 떠밀리다시피 앞으로 나섰다.
움막 밖으로 도망 나온 월인은 읍내 지구대에 전화를 걸었다.
'왜 나한테 이러죠. 저 사람을 체포해야죠. 저 사람이 나를 따먹으려고 했다고요. 강간한 사람은 놔두고 나한테 이러는 건 수상하잖아요. 나를 체포하면 우리 아버지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천강의 말투와 얼굴 표정은 천박했다. 천강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전에 월인의 사정을 들은 경찰은 겸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사과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누군지 아시죠! 난 이름만 대면 아는 권력가의 딸이라고요.'
천강은 천연덕스런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때부터 천강에게서 코르사코프증후군의 일종인 허언증이나 작화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월인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