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1. 젖 짜는 여자 숙희
'간밤에 내린 눈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아니, 이쯤 되면 눈이 곧 폭력이다.
순백의 폭력.
저렇게 희고 깨끗한 얼굴을 한 채 건장한 나무를 쓰러트리고, 멀쩡한 비닐하우스를 무너트릴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희고 깨끗한 것이라도 지나치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렇다면 모자라지 않으면서 지나치지 않은 적당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적당한 사랑! 좀 우스운 생각이 드는 군.
아니, 아니, 적당한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사랑이다. 적당한 사랑이 완전한 사랑인 것이다.
굳이 동양철학의 중용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얼마나 추상적인가.
우리를, 우리의 사랑과 삶을 지배하는 온갖 것들, 환경과 유전자와 호르몬들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또 얼마나 타의적인가.
타의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는데, 자기 의지로 완전한 사랑을 만들고 지켜간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완전한 사랑이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월인은 마을 옆 산등성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등허리가 꺾여버린 나무가 안타깝다. 어쩌면 병들어 있던 탓에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부러진 건지 모른다.
누군가 저 멀리 마을 초입에서 이쪽으로 걸어 올라오고 있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 알아보기 쉽지 않다.
아직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두꺼운 외투가 특유의 개성이랄 수도 있는 사람의 자태를 가려버린 탓도 있다.
외지 사람이라면 폭설이 온 데다 아직 눈발이 흩날리는 이런 음산한 날에 이렇게 구석진 마을을 방문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식물원이 하나 있긴 하지만 식물원 남자는 좀처럼 마을로 올라오는 일이 없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만 월인은 그 누군가는 식물원 안 주인 숙희 일 거라 짐작한다.
타지에서 억척스러움 하나로 자수성가한 숙희 내외는 월인과 천강 부부보다 두 해 앞서 이 마을로 이주해왔다.
그리고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수시로 남의 목장을 돌며 젖 짜는 일을 한다.
목장을 돌며 젖을 짜는 일은 숙희 부부가 천직으로 알고 오래 해온 일이다. 그래서 숙희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틈날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외는 목장 운영은 맘에 없어 마을 입구에 이천 평정도 되는 식물원을 열었다.
식물원이 잘 되면 지긋지긋한 새벽일을 그만 둘 생각이었지만 식물원에서는 아직 마땅히 나오는 수입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새벽에 일어나 젖을 짜러 나가곤 하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숙희의 눈두덩에는 가끔 젖소의 푸른 발자국이 훈장처럼 달려 있곤 한다.
그러나 숙희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젖소의 행패가 아니라 남편이 휘두른 주먹 일지 모른다며 은밀하게 쑥덕공론을 펼치기도 한다.
노인들의 쑥덕공론은 숙희가 툭하면 자신의 남편을 두고 쌍시옷 들어가는 욕지거리를 퍼붓는 것에 힘입어 꽤 그럴듯한 가설로 발전되었다.
가령 숙희가 읍사무소 문화센터로 기타를 배우러 다니다가 바람이 났는데 그걸 어떻게 알게 된 남편이 한방 날려버린 것 같더라, 하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숙희는 내가 그 인간한테 맞고 가만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기타 선생은 아직 서른도 안 된 애기여유 애기, 라며 단박에 노인들의 가설을 일축해버렸다.
기타 선생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노인들의 상상력이 여지없이 깨져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제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젖소 비린내까지 나는 아주머닌데 서른도 안 된 총각하고 바람을 피울 수야 없지 않겠느냐, 하는 쪽으로 마을 노인들의 중론이 슬그머니 기우는 것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만 늘어놓는데 일가견이 있는 이장 마누라에 의해 침몰 직전의 가설은 구조되기도 한다.
서른도 안 된 총각이 무슨 기타 선생질이냐,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내가 아는데 문화센터 선생들은 젊어도 사십 대 후반이다,라고 하는 이장 마누라의 주장이 급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기타 선생이 아니라 함께 기타를 배우는 읍내 형제농약사 김 씨하고 바람난 것 아니냐.
평소엔 꿀 먹은 벙어리로 지내다가 뜬금없이 끼어들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하는 포도밭집 남자의 이 한 마디면 숙희의 눈두덩에 생기곤 하는 푸른 멍에 대한 오해와 진실 게임은 수그러들지 못하고 또다시 현재 진행형이 된다.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 숙희에 대한 오해와 진실 게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암팡스런 숙희지만 뜯어보면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
게다가 푼수탱이라는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손재주가 좋고 친화력이 뛰어난 편이다.
남편 흉을 보다가도 남편이 출현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요조숙녀로 돌변하는 것도 숙희의 재주 중 하나다.
- 숙희 씨라고, 마을 입구에 있는 야생화 농원에 살아요. 틈이 날 때마다 천강 씨가 그 식물원에 놀러 가곤 했어요.
언덕을 지나 근처 황토 기와집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월인은 숙희를 알아보고 천강에게 알려준다.
천강은 무슨 말이냐는 듯 월인을 힐끔 쳐다보고 호기심마저 지워버린다.
어느새 집 앞까지 온 숙희는 천강을 향해 손을 흔들더니 불쑥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온다.
천강이 일 년 넘도록 입원해 있어도 병문안 한 번 온 적이 없는 숙희다. 하지만 집 앞을 지나가면서까지 차마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나 보다.
- 천강 씨, 나야. 나 모르겠어?
크고 낡고 무거워 보이는 외투를 벗은 숙희가 천강 옆으로 다가앉는다. 외투 속에 껴입은 것도 두터운 겨울 점퍼다. 그 속에도 털 스웨터를 껴입었는지 털실로 짠 목깃이 점퍼 위로 나와 있다. 바지도 누빈 솜이불로 지은 듯 둔해 보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숙희를 바라보던 천강은 슬그머니 옆으로 물러앉는다.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천강의 얼굴엔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과 고통이 고밀도로 스며있다. 하지만 그걸 숙희는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위로하기 위해서 그런 건지 마냥 즐거운 얼굴이다.
- 손이 참 예쁘다.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고 고울까. 애기 손 같다. 잡고 있어도 되지?
숙희가 말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천강의 눈가에 물기가 차오른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경계심은 온데간데없다.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고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천강의 감성이다.
- 왜 그런 얼굴이야. 내 손이 너무 차가워서 그래! 나는 따뜻하고 좋은데.
그러면서도 숙희는 심술궂게 천강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 손이 불쌍해요.
눈물이 천강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 괜찮아. 밖에 있다가 와서 그래. 천강 씨, 마음 고운 건 여전하네.
숙희는 휴지를 뽑아 천강의 눈물을 닦아준다.
- 얼마나 다행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치매 걸리면 욕하고, 부수고, 거칠게 굴어 감당하기 힘들대요.
월인이 내민 찻잔을 받아 든 숙희가 수다스럽게 내뱉는다.
- 천강 씨는 그냥 사람을 기억 못 하는 것뿐입니다.
월인은 숙희가 천강을 치매 환자 취급하는 것 같아 왠지 불쾌하고 거북하다.
- 알아요, 그렇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건 치매나 마찬가지잖아요. 제 말은 천강 씨가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뜻이에요. 예쁜 얼굴도 그대로고 몸매도 예전처럼 늘씬하고, 아니 그 전보다 더 날씬하고 어려 보이는 것 같아요. 천강 씨처럼 예뻐질 수만 있다면 치매라도 걸리고 싶어요. 호호호
숙희는 자기 농담이 재밌다는 듯 웃어젖힌다.
-.........
월인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고 억지웃음을 머금는다.
- 전 스물한 살이에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천강이다.
- 맞아. 얼굴을 보나 몸매를 보나 스물한 살이야, 천강 씨는.
숙희가 능글능글 웃는다.
- 천강 씨는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것만 빼면 다른 건 다 정상입니다.
숙희가 숫제 천강을 정신지체아 취급하는 것 같아 월인은 화가 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목소리를 낮춘다.
- 사람을 못 알아보는 건 치매하고 똑같은 거예요. 젊든 늙든 치매가 오면 부모형제도 몰라보고 날뛰잖아요.
조심성 없이 막무가내로 지껄여대는 숙희다.
입을 열었다가는 폭발하고 말 것 같아서 월인은 입을 꾹 다문다. 그러나 입가가 어색하게 일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천강 씨 모과차 담근 거 생각나?
차를 한입 삼키고 나서 천강의 손등을 토닥이는 숙희다.
천강은 미간을 찌푸린다.
- 나하고 청주 육거리시장에 가서 사 온 모과로 담갔잖아. 천강 씨가 모과향이 좋다고 한 바구니 사기에 내가 기왕 산 거 모과차 담그라고 담는 법을 가르쳐줬었어.
숙희는 천강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 그날 흑설탕도 사고 그랬는데.
- 천강 씨가 청주 육거리시장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데려갔었잖아. 기억 안 나? 호박죽도 사 먹었어. 죽 집에 사람이 많았잖아.
숙희는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떠올려보지만 천강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질 뿐이다.
- 우리, 눈 녹으면 육거리시장에 호박죽 먹으러 갈까? 그런데 다니다 보면 정신이 돌아올 수도 있잖아.
- 집에 가고 싶어요.
숙희의 출현에 깜박 잊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천강의 목소리는 간절하다.
- 집!
- 네.
- 여기가 천강 씨 집이잖아.
숙희의 말에 천강은 불안하게 사방을 둘러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다.
- 이분이 누구야?
숙희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걸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월인을 가리키며 묻는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한데. 천치가 되었다고 하던데.
마을 사람들이 천강을 두고 쑥덕거리는 걸 익히 들어온 숙희다.
- 모르는 사람이에요.
- 천강 씨 남편이야.
- 아니에요. 음식 배달 온 아저씨예요.
천강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완강하다.
숙희는 무슨 말인지 몰라 묻는 얼굴로 월인을 바라본다.
- 병원에 있을 때 제가 음식 배달원 노릇을 했어요.
월인은 쓴웃음을 짓는다.
천강이 아직도 자신을 음식 배달 온 아저씨로 여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면 무의식 중에 툭 튀어나온 말일 것이다.
사고 후, 며칠 만에 가까스로 깨어난 천강은 오직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 지르고 애원했다.
당시 천강은 오로지 식탐만 남은 짐승이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산처럼 부풀어 올랐는데도 끝없이 먹을 것을 달라며 떼를 썼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천강의 배는 급격하게 부풀어 올랐다. 환자복으로 가려도 천강의 배는 영락없이 임산부 같았다.
사람들이 정신도 없는 여자를 임신시켰다며 병간 하는 월인을 두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천강이 월인을 타인 취급하지 않았다.
딴청을 부리면서도 월인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속옷을 갈아입혀주거나 목욕을 시켜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천강은 월인의 손길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의식이 천강의 안에 생겨난 것 같았다.
월인이 씻겨주는 것도 싫다 하고 옷도 혼자 입겠다며 사춘기 아이처럼 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월인이 천강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을 뿐인데 천강은 바락바락 괴성을 질러댔다.
곁에 있던 장모나, 소릴 듣고 달려온 의사, 간호사, 옆 침대의 간병인들,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월인이 남편이라고 설명해주고 달래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천강의 몸 구석구석을 씻겨준 것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 전에도 종종 천강의 몸을 씻겨주었기 때문에 별다른 죄책감은 없었지만 기억은 돌아오지 않은 채 자의식만 겨우 회복된 천강으로선 수치스러웠을 수 있겠다 싶었다.
어쩌면 소녀 시절의 의식만이 깨어난 것일 수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날 이후 천강의 과도한 식욕이 잦아들었다. 차츰 배가 들어가고 몸매도 예전처럼 날씬해졌다. 장모는 대학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고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사고 전에 비해 어려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월인은 어떻게든 천강의 환심을 사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천강은 좀처럼 월인이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간병하는 게 쉽지 않아서 장모가 대신해야 했다.
물론 천강은 장모의 애처로움이나 애정이 담긴 손길조차 본척만척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천강이 음식 배달 온 아저씨에게 유독 우호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식욕이 정상으로 돌아왔는데도 그랬다.
월인은 천강이 좋아하는 프라이드치킨이나 김치찌개, 비빔밥 따위를 사들고 음식 배달 온 것처럼 가장했다. 다행히 천강은 더 이상 월인을 내쫓지 않았다.
부부이면서 타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운명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너무했다. 음식 배달 온 아저씨가 왜 여기 있겠어.
자세한 내용을 모르면서도 숙희는 더 캐묻지 않는다. 월인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 두 분이 다정하게 손잡고 산책하는 걸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숙희는 생각난 듯 말을 이어간다.
- 제 남편은 어쩌다 손만 닿아도 질색팔색이니까요. 왜 여자도 때가 있잖아요. 남자만 발정기가 있는 거 아니에요. 여자도 그런 거 있어요. 그럴 땐 꼴 보기 싫은 남편이라도 바라게 되거든요.
바로 그럴 때, 어쩌다 손이라도 스치면 나를 무슨 벌레라도 되는 것처럼 지랄이라니까요.
저는 발정 나면 내가 밀어내든 말든 강제로 해치우면서.
다행히 그렇게 해서 생긴 우리 아이들은 다 잘 컸어요. 우린 사지육신이 멀쩡한데도 저 따로 나 따로 거든요. 잠자리 같은 거 안 한지 몇 년 째인지 몰라요.
어쩌다 발정 나면 달려드는 게 전부인데, 그게 어디 잠자리라고 할 수 있어요. 발정 난 짐승한테 물린 거죠.
그 인간은 남들 다 피는 바람도 못 피는 등신이에요. 하긴 물총을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어요.
숙희는 깔깔깔 배를 잡고 한바탕 웃어젖힌다. 새삼스레 장모가 숙희를 푼수탱이라고 부르며 업신여기는 것이 이해가 간다.
천강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숙희를 바라본다. 왜 웃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곤혹스러운 월인은 신음을 내뱉는다. 이제는 그만 돌아가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늦게나마 이웃으로 병문안 와준 고마움은 여기까지다.
- 우리 부부도 어쩌면 진작부터 치매에 걸려버린 건지 몰라요. 뭐 처음부터 사랑해서 만나고 결혼한 건 아니지만.
그저 의지가 필요했고 의지가 될 것 같아서 결혼까지 했지만 먹고살만해지니까 이제 그딴 건 다 잊어버린 거예요.
돈 한 푼 없는 비렁뱅이였을 땐 사람이 의지가 되었지만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지니까 서로 귀찮아지나 봐요. 솔직히 저도 남편이 싫어요. 어쩌면 싫은 게 아니라 필요를 못 느끼는 건지 몰라.
그러다 더 늙으면 서로를 아주 잊어버릴 테죠. 곁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사는 거죠. 그게 저나 나나 치매지 뭐겠어요. 치매가 뭐 별건 가요.
이웃 남자에게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 속내를 마구 털어놓는 숙희가 월인은 사뭇 신기하다.
- 세상은 참 공평한가 봐요. 돈 있지, 사랑 있지, 뭐하나 부족한 거 없을 것 같던 사장님한테도 한 가지 고통은 생겼잖아요.
숙희의 목소리는 자못 유쾌하고 즐겁다. 위로를 하러 온 건지, 아니면 남의 불행을 위안으로 삼으려는 건지 알 수 없다.
- 사장님이, 아무리 유능한 셰프라고 해도 이 집이며, 읍내의 큰 식당을 사기에는 아직은 젊은 나이인데, 혹시 로또라도 맞은 거 아니에요? 왜요, 로또 맞으면 아는 사람들이 귀찮게 하니까 모르는 데로 이사 가서 살고 그런다면서요. 로또 맞은 죄로 피난살이하는 거죠. 혹시 사장님도 그런 거 아니에요?
월인은 어이없어 웃고 만다. 어쩌면 또 하나의 근거 없는 소문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싶은 생각이 퍼뜩 스친다.
동네 사랑방이나 다름없는 뒷집 할머니 집에서 숙희가 그런 추측을 토대로 조잘거리면 아무리 근거 없는 이야기 일지라도 사람들의 입으로 짠 그럴듯한 진실의 옷이 덧입혀져 읍내까지 활보하고 다니게 될 것이다.
침 냄새나는 진실의 옷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지어지는 것이니까.
- 우린 처음 결혼해서 수중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처럼 살았죠. 그때는.......
숙희는 월인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자기 말을 하기 시작한다.
-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뒷집 할머니께서 기다리실 텐데요.
월인은 숙희의 지나간 삶에 대해서는 더 듣고 싶은 마음도 없다. 물론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리고 숙희 부부가 산에서 화전민처럼 살다가 돈을 모아 조금씩 땅을 사서 재산을 불렸다는 것은 장모를 통해서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인내심의 바닥이 드러나고 있어 자칫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무분별한 이웃에게 화를 내게 될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 가야죠. 너무 힘들어하시는 거 같아서 웃으라고 푼수 같이 지껄였어요. 제가 푼수잖아요. 동네 사람들이 저더러 푼수라고 하지만 저 없으면 웃을 일도 없을 걸요. 어머니(숙희는 뒷집 할머니를 그렇게 부른다.)가 오라고 성화를 부려서 이 눈길을 헤치고 올라가던 길이에요. 떡만둣국 끓여 먹자고 부르신 건데. 여길 지나다 보니 천강 씨 퇴원한 생각이 나서 올라와봤어요.
월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짐작한 대로다.
- 진즉에 찾아봤어야 하는데.
- 바쁘신데 뭘요.
- 이모님(숙희는 월인의 장모를 그렇게 부른다.)은 서울서 언제 오세요.
- 봄에나 오실 거예요. 내가 그러시라고 했어요. 천강 씨 병원에 있는 동안 축난 건강도 좀 회복하시라고.
- 사장님은 참 생각이 깊으세요. 어떤 인간 같으면 빨리 와서 집안일이라도 해 달라고 장모를 달달 볶았을 텐데. 아니 내가 천강 씨처럼 됐으면 나를 아예 친정으로 내쫓았을 거예요, 그 인간은. 그나저나 이모님이 오셔야 용돈이라도 좀 타 쓰는데. 호호........ 이모님 오실 동안에 제가 집안 청소를 도와드릴까요?
- 말씀은 고맙지만 청소며 세탁기 돌리는 건 제가 합니다.
- 아 참, 천강 씨도 기타 배우러 다니면 어떨까요.
일어서려던 숙희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꺼낸다.
- 제가 천강 씨 데리고 다닐게요. 집안에 이렇게 갇혀 있는 거보다 훨씬 좋을 거예요. 기타를 치다 보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지 모르잖아요.
말해놓고 보니 자기 생각이 기특한지 만족스런 얼굴이다.
-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월인은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웃의 호의를 대놓고 거절은 못한다. 어차피 인사치레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 봄 되면 제가 천강 씨 데리고 다닐게요. 그건 그렇고 노인네들 눈 오는 날 눈 빠지겠네. 호호.......
마침내 숙희가 벗어두었던 크고 낡고 무거워 보이는 외투를 집어 든다.
푼수탱이에다 억척스럽기까지 한 숙희는 새벽에 일어나 착유를 하고 돌아온 날에도 피곤해하거나 지치는 기색이 없이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괴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답을 빌려 혼자 힘으로-어찌 된 일인지 남편은 거의 도와주지 않는다.- 논농사며 밭농사를 짓고, 시절에 따라 수확한 것들을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것만도 벅찰 듯한데 숙희는 그 와중에도 읍내 문화센터로 기타를 배우러 다닌다.
때문에 마을 노인들은 '하여튼 체력 하나는 타고났다.'는 말로 그녀의 강철 같은 인생을 함축하길 좋아한다.